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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이야기 세 번째

다가오는 폭풍을 알지 못하는 히로시마의 잔인한 여름

by 늘 담담하게


1945년 8월 6일 오전 7시경. 운명의 그 아침 7시... B-29 폭격기 1대가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났다. 한 여름의 더위가 한창인 히로시마. 하늘은 얇은 구름이 끼여 있었고 그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사람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치달아가면서 일본의 여러 도시들이 미군 폭격기의 공습에 의해 하나하나 불타 올랐지만 이상하리만치 히로시마는 맹렬한 미군의 공습이 없었다.


일본의 핵심 군 전력이 몰려 있는 히로시마에 미군의 공습이 없는 것에 대해 일부 일본인들은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재앙이 닥쳐오고 있는 것을 그날 히로시마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이 폭격기는 티니안에서 출발한 6대의 폭격기 중의 하나로서 히로시마 상공을 선회하더니, 7시 15분 한 통의 무선을 남태평양의 티니안섬의 제313 비행단으로 전했다.


"Y3、Q3、B2、C1」 낮은 구름의 량은 4/10에서 7/10로 작다. 중고도 구름의 양은 4/10에서 7/10로 얇음. 고고도 구름의 양은 1/10에서 3/10로 얇음, 제1목 표 폭격요망"


이 비행기는 원폭 투하에 앞서, 히로시마 상공의 기상 조건을 확인하기 위해 날아온 스트레이트 플래시호(조종사 클로드 이자리 소령)였다. 스트레이트 플래시가 전달한 무선 보고는 그날 히로시마의 운명을 결정하고 말았다. 당일 목표지 상공의 시야 정보는 폭격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7시 9분, 스트레이트 플래시호를 포착한 주고쿠 군관구 사령부는 공습경보를 발령했지만 그대로 통과했기 때문에 7시 31분 공습경보는 해제되었다. 그리고 30분이 지난 8시. 이번에는 B-29 3대가 포착되었다. 8시 13분 주고쿠 군관구 사령부는 다시 공습경보를 발령했지만 이 경보는 전달이 늦어졌고, 당연히 라디오에서의 경보 방송도 없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렇다면, 원폭이 히로시마에 투하되기 전에 어떤 과정이 있었고, 왜 히로시마가 목표가 되었던 걸까?


미국이 공식 설명한 원폭 투하의 이유는 태평양 전쟁의 말기 일본 본토에서 치러야 할 전투의 피해를 조기에 수습하기 위해 원자 폭탄이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1945년이 되면서 태평양전쟁의 전황은 급속도로 일본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일본은 1943년 11월 27일의 카이로 선언에 기초한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먼저 카이로선언을 보자.


1943년 11월 27일 미 영 중의 3개 연합국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모여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5일간에 걸친 회담에는 루스벨트, 처질, 장제스 등이 대표로 참가했으며, 회담 결과 발표한 이 선언에서 연합국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최초로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했다. 또한 회담에서 연합국은 승전하더라도 자국(自國)의 영토 확장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결의를 하여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을 받았다.

(1943년 11월 25일 카이로에 모인 연합국 지도자들, 왼쪽부터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다음은 카이로 선언의 핵심 내용이다.


"각 군사사절단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3대 동맹국은 일본의 침략을 정지시키며 이를 벌하기 위하여 이번 전쟁을 속행하고 있는 것으로, 위 동맹국은 자국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또 영토를 확장할 의도도 없다. 위 동맹국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 대만 및 팽호도와 같이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구축될 것이다. 앞의 3대 동맹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3대 동맹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촉진하는데 필요한 중대하고도 장기적인 행동을 속행한다."


이런 카이로 선언의 기본 방침은 그대로 이어져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부가 독일의 포츠담에서 가진 정상회담에서 포츠담선언이 발표된다. 이 회담에서 일본의 항복 권고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다. 선언의 요지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한 것이다.


이 선언은 모두 13개 조항으로 되어 있다.


제1-5항. 서문.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 인민과 일본 인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


제6항 군국주의 배제


제7항 일본 영토의 보장 점령


제8항 카이로 선언의 실행과 일본 영토의 한정


제9항 일본 군대의 무장 해제


제10항 전쟁 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강화, 언론, 종교, 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 존중의 확립


제11항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 유지의 허가


제12항: 민주주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점령군의 철수.


제13항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


특히 8항의 경우, 카이로 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을 묵살했다. 패전 이후 일본의 가세 도시카즈 총무국 참사관(1947년 당시)은 일본 정부가 내부적으로 대일강화조약 체결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카이로 선언은 일본 정부가 감수하기 곤란한 영토 조항을 담고 있다며 이를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증언을 한다. 이것은 결국 연합군이 생각한 항복과 일본이 생각한 항복에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다는 것을 말한다.


당시 일본이 내세운 조건은 진주만 공격 이전의 상황, 그러니까 당시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조선,대만,남사할린)는 물론 만주국과 중일 전쟁으로 점령한 곳까지 일본 영토로 인정하고 남방(동남아)에서만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조건이었고 연합군 측은 결국 힘으로 일본을 무너뜨리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이 결국 원자폭탄 투하라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미국이 처한 정치, 군사전략적인 상황도 한몫을 했다.


1945년 2월 19일에 미군은 보잘것없던 작은 화산섬 이오지마에 상륙했다. 1주일이면 점령할 것이라고 했던 이오지마 전투는 당초의 예상을 벗어나 3월 26일까지 한 달을 끌었고 투입된 11만의 병력 중 전사자 6,821명, 부상자 19,189명, 실종 494명의 뼈아픈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 사상자- 투입된 병력 21,000명 중 216명만 생존, 나머지는 전원 전사)


그리고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2일까지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도 이 작전에 투입된 미군 18만 3천 명 중 12,513명이 전사하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일본군 사상자- 12만 명 중, 95,000명이 전사) 이 즈음에 이르러 미국은 일본인들의 막가파식 전술에 넌저리를 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본토 공략에 대한 작전이 수립되었는데, 작전 이름은 올림픽 작전과 코로넷 작전이었다. 동원되는 총병력은 육해공 총 1,074,600명 정도, 엄청난 규모의 작전이었다.


올림픽 작전은 1945년 11월, 규슈 남부에 14개 사단 250,000명의 보병과 90,000명의 해병대. 지원을 위한 항공모함 42척을 시작으로 전함 24척, 400척 이상의 구축함이 투입될 예정이었고 수천 대의 상륙정, 그리고 약 2,000기의 항공기를 동원하는 작전이었다.


(올림픽 작전도)

코로넷 작전은 일본 본토 상륙전의 핵심으로 1946년 3월 1일에 혼슈지방에 720,000명의 병력과, 약 3000기의 항공기를 동원하는, 관동 상륙 작전이다. 상륙 뒤 도쿄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코로넷 작전도


이 2개의 작전이 입안된 후 보고되었을 때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예상피해였다. 전사자만 단순계산 시에 10만 명 정도라고 보고되었고, 영국의 처칠 수상은 일본을 점령하려면 미국인 100만 명과 영국인 50만 명이 전사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1939년부터 시작된 세계대전이 6년째에 이르러 전쟁의 피로감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미군의 피해는 미국 내의 반전여론을 드높여,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트루만에게는 크나큰 정치적 부담이 될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때에 미국은 군사적인 대안을 여러 개 마련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비상륙/봉쇄 전이었다. 미군이 제공권/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지 오래되었고 일본을 둘러싼 모든 바다를 기뢰로 봉쇄하고 주요 도시는 네이팜 폭격으로 공격해서 일본의 잔존 산업생산력을 파괴하고 숲과 농경지에는 고엽제급 제초제를 투하 일본의 식량 자급 능력을 말살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 때문에 아사상태였던 일본 국민들은 그야말로 굶어 죽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독가스와 같은 화학탄 공격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일본의 모든 지역을 공격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주요 비행장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 확인한 바 있듯이 화학탄 공격은 공격 대상지의 모든 생물의 씨를 말려버리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 대안들의 문제점은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결국은 상륙작전을 해도, 하지 않아도 문제였다.


한시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기를 원하는 미국 내의 정치 경제적인 상황, 본토 상륙 시에 입게 될 엄청난 미군의 희생등이 결국은 미국으로 하여금 원자폭탄 투하라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왜 히로시마가 공격 목표가 되었을까?


히로시마가 구체적인 공격 목표로 선정된 것은 1945년 5월 10일이었다.


(티니안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의 폭격기의 이동경로)


1945년 4월 27일 제1차 목표 선정위원회에서 제 20항공군이 보고한 바에 의하면,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은 다 제거한다는 목표하에 아래의 도시들을 폭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 도시들은 도쿄, 요코하마, 나고야, 오사카, 교토, 고베, 야하타, 나가사키였다. 그리고 다시 17개의 도시들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보고 했는데 그 도시들은 도쿄만, 가와사키, 요코하마, 나고야, 교토, 오사카, 고베, 히로시마, 구레, 시모노세키, 야마구치, 야하타, 고쿠라, 구마모토, 후쿠오카, 나가사키, 사세보였다.


그 뒤 1945년 5월 10일-11일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의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사무실에서 열린 제2차 목표선정위원회에서 교토, 히로시마, 요코하마, 고쿠라로 목표도시를 선정했다.(교토, 히로시마는 AA급 목표, 요코하마, 고쿠라는 A급 목표) 그 선정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목표 도시는 지금 3마일 이상, 대도시이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인지.


-목표 도시에 원폭투하를 하게 될 경우 폭풍으로 인해 효과적인 파괴를 할 수 있는지,


-8월까지 폭격하지 않은 곳 중의 하나.


이후 5월 28일에 열린 3차 목표 선정 위원회에서 요코하마와 고쿠라시가 제외되었고, 투하 목표에 대한 세부 결정을 했다.


-투하 지점은 기상 조건에 따라, 기지에서 결정한다.


-투하 지점은 공업 지역의 위치에 한정하지 않는다.


-투하 지점은 도시 중심에 투하하도록 노력하고, 한 발에 의해 완전히 파괴한다




이 결정 이후 원자 폭탄 투하 목표 도시에 대한 공습 금지가 결정되었다. 금지의 목적은 원폭이 가져오는 효과를 정확히 측정 파악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공습을 하지 않으면 "○ ○에는 공습이 없다"라는 소문이 퍼져나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부 피난을 했던 학생들이 복귀를 하게 되고 폭격을 받은 다시 대도시로부터의 인구의 유입이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날인 1945년 5월 29일 목표에서 제외된 요코하마에 대공습이 이루어졌다. 원폭 투하의 대상지로 거론된 교토,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의 특징은 모두 " 일본 제국의 기초 도시였다는 것이었다.


교토는 일본 천황의 조상들이 살던 도시였고, 히로시마는 죠슈번 번주였던 모리 가문의 조상이 살던 땅이었으며, 고쿠라는 조슈 번이 삼은 도시권에 포함된 규슈와 인접한 도시였고 나가사키는 메이지 유신의 배후였던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의 본거지였다.


히로시마에 대해서는 "도시에 있는 산업지대 한가운데에 있는 중요 군사 거점이자 병사들의 승선 지점. 레이더 표적에 용이하며 폭격할 시 도시에 크게 손해를 입힐 수 있는 곳. 주변에 언덕이 있어 폭격 효과를 크게 상승시켜 줄 가능성이 있음. 호수가 있어 화재를 일으키기엔 적합한 표적은 아님."이라고 설명됐다.


원자 폭탄 투하의 궁극적 목적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에 따른 무조건 항복을 하게 시키기 위해서였다. 최종 목표 도시를 선정할 때 당시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목표 도시를 설정할 때 가장 중요시한 것은 이 폭격으로 인해 일본 제국이 얼마나 큰 정신적 충격을 얻을지였고 또한 국제적으로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였습니다. 교토는 일본 제국의 군수 사업에 있어서 중요한 요충지이자 일본인들에게는 정신적 고향과도 같은 곳이기에 목표 도시로 설정하기엔 적합한 도시입니다. 도쿄 역시 일왕의 궁이 다른 그 어떠한 도시보다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지만 교토처럼 전략적 요충지는 아닙니다."


그러면 이 시기의 히로시마는 어떤 상태였을까?


당시 히로시마는 일본의 주요 산업도시였으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또한 히로시마 고등 사범 학교,·히로시마 여자 고등 사범 학교,·히로시마 문리과 대학,·히로시마 공업 전문학교, 히로시마 고등학교를 가진 학원 도시이기도 했다. 청일 전쟁 때 전선에 가까운 히로시마에 대본영이 옮겨져 임시 제국 의회가 열리기도 했다. 제7회 제국 의회도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등 임시 수도 기능이 히로시마에 이전되어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육군 시설이 히로시마에 많이 놓이게 됐다. 히로시마 성 내에는 육군 제5사단 사령부, 히로시마 역 서쪽으로 일본 영토 남쪽 전체 방어를 지휘하는 육군 참모 하타 순로쿠의 제2총군 사령부, 그 주위에는 각 부대 주둔지 등이 배치됐다. 즉 당시 폭심지의 북쪽은 대략 육군 시설에서 넓게 차지하고 있었고, 육군 부지 남단에서 약 200m에 폭심지가 있다. 또 우지나 항에 놓인 육군 선박 사령부는 병참 상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히로시마 중심부에는 몇몇 강화 콘크리트 빌딩과 가벼운 구조물들이 있었으며 중심부 바로 바깥에는 가옥을 비롯하여 그 사이사이에 나무로 만들어진 작업장이 밀집해 있었다. 교외에는 큰 산업단지가 부분적으로 있었으며, 이 산업단지 안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들 역시 목조건물들이었다. 전체적으로 화재에 크게 약한 도시였던 것이었다.


전쟁 초기 히로시마의 인구는 381,000명으로 최대인구를 달성했지만 원폭 투하 후 일본 정부가 시행한 체계적 이주 정책에 의해 꾸준히 감소했다. 원폭 투하 당시 인구는 대략 340,000명에서 350,000명으로 정도로 추정된다. 하지만 공식 문서가 소멸했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세부적으로 추정하면 당시 거주했던 일반시민이 약 29만 명, 군인이 약 4만 명, 시외에서 볼일 때문에 시내에 들어온 사람이 약 2만 명이다.


본격적인 원폭 투하의 날을 이야기하기 전에, 원폭이전의 히로시마의 사진들을 살펴보자.


오늘날 원폭 돔이라고 불리는 히로시마현 산업장려관이 멀리 보인다. 1930년대 촬영된 사진.


1930년대의 히로시마시 번화가의 풍경이다.


역시 산업장려관의 모습이다. 원폭 투하 이전의 모습이다.

메이지 시대의 히로시마성의 천수각.


CG로 재현된 산업장려관의 부근의 모습

축소 모형으로 재현한 원폭투하 전의 히로시마시의 모습이다


일본의 곳곳이 폭격을 당하고 있었지만, 당시 일본 정부의 본토결전이니 옥쇄니 하는 허황한 선전에 사람들은 불안함 속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거대한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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