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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이야기 두 번째

히로시마 성의 비극

by 늘 담담하게


히로시마 이야기의 두 번째 주제는 히로시마성広島城이다. 일본을 여행하면서 어느 지역을 가도 성은 빠지지 않고 돌아보는 편인데, 이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주요 도시에 있는 성들은 대개 역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찾아가기는 쉽지만 평지에 지어진 성이 아니면 대개 산 위에 있거나, 천수각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등산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히로시마성은 다행히도 산 위에 있는 성이 아니라 평지에 있는 성인데, 나고야성과 오카야마성과 함께 일본의 3대 평성 중의 하나이다.



히로시마성은 최전성기 시절의 넓이가 12만 ㎡ 에 이를 정도의 거대한 성이었다. 서쪽면의 길이가 1309m이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가히 짐작이 되는데, 오사카성, 오카야마성과 함께 일본 초기 근세 성곽으로 평가받고 있다.


앞편에서 설명한 대로 히로시마성을 처음 건축한 이는 모리 데루모토이다. 모리 데루모토 이전까지 모리 가문의 거성은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郡山城(현재의 히로시마현 아키타카타시에 있던 산성)이었다.


고리야마성 모형도

이 성은 모리 데루모토의 조부인 모리 모토나리의 거성으로 요시다성 혹은 요시다 고리야마성이라고 부른다.


(현재 남아 있는 고리야마 산성의 흔적. 혼마루가 있던 자리이다.)

산요지방과 산인지방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인 에노가와 강(江の川)과 다지히가와 강多治比川이 흐르는 요시다 분지의 북쪽에 있는 고리야마 산에 산성을 처음 축조한 시기는 1336년, 모리가문의 3대 가주였던 모리 도키치카시대였다.


그 뒤 12대 모리 모토나리 시대에 이르러 고리야마 산 전체로 성을 확장하였다. 1541년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 전투에서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 1514-1561, 전국시대 이즈모국의 다이묘, 이즈모국은 현재의 시마네현 동부 )가 이끄는 2만의 대군에 공격을 받지만, 오우치 가문의 원군으로 온 무장 스에 다카후사의 활약에 힘입어, 아마고 군을 격퇴하였다. 이후, 모리 가문의 세력확대와 함께 성은 확장 정비되었다.


그런데 영토 쟁탈전이 치열했던 전국시대에는 산성이 방어하기가 더없이 좋은 성이지만 평화와 안정이 찾아온 도요토미 정권의 아즈치 모모야마시대에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산성은 불편하기 그지없는 성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 시대에는 해자와 돌담으로 둘러싸인 넓은 면적의 성들이 수륙 교통이 좋은 곳에 건축되기 시작했고 이런 근세 성곽은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성에서 시작하여 도요토미 정권시대에는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그런 흐름에 맞추어 모리 데루모토는 상업과 해상교통이 편리한 세토 내해의 부근으로 거점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히로시마 성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1588년 데루모토는 처음으로 히데요시를 알현하게 된다. 그때 그는 오사카성을 돌아보면서 그 화려함과 성시의 번영을 지켜보았고 그때 자신의 가문이 거주하고 있던 고리야마성이 시대에 맞지 않는 성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1589년 그는 새로운 성을 건축할 곳으로 그의 조부 모토나리가 중요시했던 히로시마만의 주변으로 정하고 오타강 삼각주 주변의 산을 돌아보며 성을 건축할 곳을 찾았다. 또 다른 전승에는 이미 모토나리 시대에 이 지역에 성을 쌓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히로시마라고 하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 바로 이때인데, 오타강의 삼각주 일대는 옛날에는 고카무라라고 불렸다.


히로시마성 축성 공사가 시작한 1589년 4월 15일 성이 자리 잡은 지역에 어울리는 이름을 짓자는 의미에서 모리가의 선조인 오헤 히로모토(大江広元)의 히로(広)와 모리 데루모토를 이곳으로 안내한 후쿠시마 모토나가(福島元長)의 시마(島)를 조합하여 이곳의 원래 지명인 고카(五箇) 무라를 히로시마(広島)로 명명했다.


히로시마성은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리조(鯉城: 잉어 성)이다. 헤이안 시대에 편찬된《연희식》에 히로시마의 고이(己斐 현재의 히로시마시 서구)라는 지역을 리(鯉) 자로 가차(假借)하여 표기하였다. 이것에 기인하여 리조(鯉城: 잉어성)라는 별명이 붙어졌다고 한다. 일본어에서 리(鯉)의 훈독은 고이(こい)이고 잉어를 의미한다. 또는 히로시마성 해자에 잉어가 많고, 천수도 검은색이어서 잉어성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는 이설도 있다. 현재 히로시마를 연고로 하는 야구팀〈히로시마 도요 카프〉팀명은 히로시마성의 별칭인 잉어성에서 따온 것이다. 카프는 영어로 잉어를 뜻한다.


히로시마 성의 축성은 삼각주의 모래톱 위에 지어지는 난공사였다.. 성의 구조는 오사카성을 기본 참고 하였고, 성의 주요 배치는 주라쿠 다이(주 1)의 예를 따랐다고 한다. 연약한 삼각주 지반에 축성되었기 때문에 석벽의 중량 분산에 많은 연구를 하게 된다. 히로시마 성의 축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추진하는 조선침략과 맞물려 후방기지로서의 기대도 있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히로시마 성의 축성을 지원하기 위해 그의 측근 구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를 파견했으며, 자신도 건설 중 히로시마 성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완성될 당시에는 오사카 성에 필적할 만한 규모의 성이었다고 한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초상화. 주 2)

축성 공사 2년 뒤인 1591년에 데루모토는 입성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혼마루 등의 주요 부분이 완성되었을 뿐, 외곽의 돌담이나 해자는 아직 미완성이었고 그 후에도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1592년에 히데요시가 히로시마에 들러 성을 돌아봤을 때도 미완성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1593년에 돌담이 완성되었고 1599년에서야 완전한 공사가 끝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고 그 전투에서 패전한 데루모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스오 나가토(지금의 야마구치현)로 전봉 되고 만다. 그는 자신이 건축한 이 성에서 10년을 채 못살고 쫓겨나가게 되었다.


히로시마성이 건설된 초기의 모습이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남아 있는 자료가 없다. 대부분이 에도시대에 작성된 것들이어서 히로시마성의 초기 모습은 확인할 수가 없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자료 중에 가장 신뢰성이 높은 자료는 1644년에 그려진 히로시마성의 지도이다. 하지만 이 시기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시대 이후이기 때문에 건축 초기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히로시마성의 복원 모형도)

앞편에서 설명한 대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데루모토는 조슈번으로 이봉되고, 이를 대신하여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성주로 부임한 것은 1601년 3월이었다.


그는 성을 정비하고 육로와 해로의 교통망을 적극적으로 확충했으며, 성의 발전을 위해 성의 북쪽을 지나가던 서국 가도를 성의 남쪽으로 지나도록 도로를 정비해 성하 마을을 확장했다. 하지만 소위 후쿠시마의 개역이라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 역시 히로시마성을 떠나야 했다. 1617년 대홍수가 발생해 히로시마성이 파손된다. 이해 이듬해 4월 파손된 부분에 대해 보수 공사가 있었고, 10월 말에는 혼마루와 니노, 산노마루지역의 보수 공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1615년에 에도막부가 제정한 법에 의하면 다이묘의 거성 공사는 막부에 사전 신고가 필요했다. 그에 따라 히로시마성의 보수 공사도 사전에 신고가 있어야 했지만 마사노리는 이 절차를 무시하고 사후보고로 끝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1619년 4월 사전보고 없이 무단으로 공사를 한 사실이 당시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다타에게 전해졌고, 이 사실에 노발대발한 히데다 타는 마사노리를 개역에 처하려고 했지만 다른 다이묘에 영향을 고려하여 새로 복원한 석축과, 노를 다시 파괴하고 그의 아들인 다다카쓰를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죄를 용서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막부의 요구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자,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쓰가루(아오모리현 서부)로의 전봉 칩거를 결정하고 히로시마성의 인도를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때 당시 마사노리의 가신들은 주군의 안부가 확인되지 못했기에 히로시마성과 미하라성등에서 농성을 했다. 이에 마사노리가 가신들에게 지시를 내고 , 농성을 풀자, 마사노리의 전봉은 시나노가와 나카지마(현재의 나가노현 나가노시)로 변경하고 그해 10월에 이봉을 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하여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 長晟 1586-1632)가 새 번주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가 1619년 8월 8일의 일이다.


나가아키라 아사노浅野 長晟 1586-1632의 초상화

아사노 가문이 통치하던 시대의 히로시마성은 내측해자, 중간해자, 외측해자가 있고, 사방 약 1km에 이르는 넓은 성이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1911년에 외측해자가 매립되어고, 원폭의 영향으로 중간해자도 메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히로시마 시내에는 해자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있다. 또, 시내에 있는 정원인 슛케이엔은 원래 성안에 있었던 정원으로 성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후 히로시마는 평화롭게 발전해 갔다.

메이지시대의 히로시마성 천수

이 도시에 비극의 씨앗이 잉태되기 시작한 것은 1864년 제1차 조슈 정벌에서 도쿠가와 요시카쓰가 이끄는 막부군의 본영이 되었던 때부터이다. 모리의 후손과 도쿠가와의 후손이 맞붙는 싸움의 중심에 히로시마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1871년에 실시된 폐번치현 이후 히로시마현청이 혼마루에 자리 잡았고,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병 11 연대와 히로시마 육군 유년학교등이 성내에 설치되었으며 청일전쟁 때에는 대본영이 도쿄로부터 히로시마로 옮겨왔다. 히로시마에 대본영이 들어신 이유는 전장인 한반도가 비교적 가깝고, 산요철도(현재의 산요본선)가 1894년 6월 히로시마까지 연장되었으며 우지나항(현재의 히로시마항)이 1889년 대형선박이 정박할 수 있게 정비되어 육로와 해로의 교통이 편리했다는 이유에서이다.


메이지 시대에 히로시마 성내에 있던 대본영의 사진 왼쪽으로 천수각이 보인다.


역시 메이지시대에 히로시마성내에 있던 5사단 사령부의 모습, 왼쪽에 천수각의 모습이 보인다.

1930년대의 히로시마의 지도, 당시 히로시마 성 주변부에 군사 시설이 흩어져 있다.


원자폭탄 투하가 있기 수년 전 그러니까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초반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천수각의 모습이다. 벚꽃이 피어 있는 것으로 보아 촬영시기는 초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봄날의 벚꽃이 흩날리던 천수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 성에 끔찍한 비극이 닥친 것은 1945년 8월 6일 아침이었다.


미군 폭격기에서 투하된 원자폭탄에 의해 1931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던 화려한 천수각은 무너지고 성의 건물들 대부분이 소실되고 말았다. 당시 이 지역에는 본토 결전이라는 미명하에 약 1만 명의 군인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원자폭탄에 의해 대부분 목숨을 잃고 말았다. 폭탄이 투하된 시간이 아침 조회시간이었기 때문에 피해는 더 컸다. 폭발 이후의 후폭풍에 현장에서 즉사하거나, 무너진 건물에 압사했고, 살아남은 이들도 피폭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사진 속의 천수각은 피폭 당시,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모리가문에서 시작하여, 후쿠시마, 아사노가문으로 이어지던 히로시마성의 화려한 시절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1945년 7월 25일에 미군이 촬영한 히로시마성의 혼마루 항공사진이다. 중앙의 혼마루의 왼쪽아래에 부분에 나란히 3개의 건물이 보이는데 그 건물이 앞서 사진과 함께 설명했던 5사단 사령부 건물이다. 혼마루를 둘러싸고 검은색 부분은 물이 들어 있던 해자이다.



그리고 다시 같은 위치에서 촬영된 항공사진, 원폭이 투하된 지 5일 후인 1945년 8월 11일에 촬영된 것이다. 앞의 사진과 비교해 볼 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전성기 시절에는 오사카성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았던, 그리고 사방 길이가 1km에 달했던 이 거대한 성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본토 결전이라는 구 일본 제국의 허황된 망상이 결국 이 성을 파국으로 몰아간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1958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한 천수각과 옛 성의 일부 흔적뿐이다.

소천수각이 있던 자리이다. 기초 석단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외곽망루가 있던 흔적.


CG로 복원한 혼마루의 모습.



히로시마 성의 천수각은 탄화 삼나무와 회반죽의 대비가 아름다운 것이 특징으로 5층 건물이다. 높이는 약 40m이다. 내부는 박물관이 되어 있으며, 최상층은 전망대가 되어 있다. 1층부터 4층까지의 전시에서는 당시의 무가 문화를 재현한 전시물이나, 사무라이의 칼과 갑옷이 전시되어 있으며, 히로시마 성 부흥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오모테고몬은 히로시마 성의 정면 현관으로 기능했던 중요한 문으로, 니노마루에서 혼마루로 들어갈 때의 주요 출입구이다. 목조 이층 건물의 웅장한 망루 문으로, 한때 번영했던 히로시마 성의 흔적을 보여주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니노마루는 오모테고몬을 지나 바로 앞에 있는 구역으로 여기에는 히라야구라, 타이코야구라, 타몬야구라가 있다. 이러한 망루들은 1945년 원폭 투하로 인해 석벽만 남기고 소멸했지만, 1991년에 복원되었다.

1945년 원폭 투하 때 사라진 히로시마 대본영 건물이 있었던 자리

히로시마 대본영 건물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일본의 성을 돌아보는 것은 씁쓸하다. 그래도 한때는 작은 나라의 성이었고, 크던 작던 번영했던 시기가 있었을 텐데, 오늘날의 일본 성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제 모습을 갖고 있는 성이 드물다.



대부분이 흔적만 남아 있고,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성이라고 해도 전쟁 이후에 콘크리트로 복원한 성들이다.


원래의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히로시마성을 돌아보았다. 다음 편에서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1945년 8월 6일의 그날로 가보자...


주라쿠다이의 모습

주 1. 주라쿠 다이 . 聚楽第, 아즈치 모모야마시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의 나이야에 지은 대저택이다. 주라쿠 정(聚楽亭)이라고도 불린다. 일종의 해자가 있는 성으로 볼 수 있어, 주라쿠 성(聚楽城)으로도 불린다.


주라쿠 다이는 관백 히데요시가 정무를 보던 정청 겸 저택으로 1586년 2월에 착공하여 다음 해 9월에 완성했다. 규슈 정벌을 마친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에서 이곳으로 와 정무을 집행하였다. 금박을 입힌 기와를 사용하는 등 모습이 호화로웠다. 다이(第)는 원래 저택이라는 의미지만, 여기에는 천수가 중심에 있는 혼마루와 니노마루 등이 있었고, 주위를 해자로 둘러서 방어하는 일본 성의 특징도 갖추고 있었다. 저택 내에는 일본의 다조(茶祖)로 불리는 히데요시의 다도 스승인 센노 리큐의 집도 지어졌으며 1587년 10월에는 기타노 신사 앞에서 다도회인 기타노 오챠노유가 열렸다.



1591년 12월 히데요시가 간파쿠 직을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쓰구에게 물려주면서 주라쿠 다이도 히데쓰구의 거처가 되었다. 이후 고요제이 천황이 디시 여기에 들러 머물렀다. 158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후시미 축성을 착수했는데 다음 해에 간파쿠 히데쓰구에게 할복을 명하고 주라쿠 다이는 철거시켜 버린다. 히데요시는 주라쿠 다이의 건물 대부분을 후시미 성에 옮겨 쓰도록 하였다.



주 2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 1546-1604)는 일본 전국의 무장이자 다이묘. 부젠국 나카쓰 성주였다.. 간베에(官兵衛)란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출가 후에는 조스이(如水)란 호(號)를 사용하여 유명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측근으로 조랴쿠(調略)과 다른 다이묘 등과의 교섭에서 활약했다. 돈 시메온(Don Simeon)이란 세례명을 갖고 있는 크리스천 다이묘이기도 하다.



*평성 (平城): 평평한 곳에 쌓은 성. 산성이나 평산성은 축성할 때 천혜의 요새를 이용한 데 반해 평성은 대규모 토목 공사가 필수적이다. 산지에 기대어 방어할 수 없는 만큼 해자와 망루, 성문 등의 방어 시설도 튼튼하게 갖추어야 했다. 조카마치(城下町)와 밀접하게 교류할 수 있었으며, 통치에 용이하고 바깥으로 출병하기에도 쉬운 장점이 있다. 근세에는 거대한 평성이 많이 세워졌는데, 도쿄도의 에도 성, 나가노현의 마츠모토 성, 아이치현의 나고야 성, 오사카부의 오사카 성, 히로시마현의 히로시마 성 등이 있다.


*현재의 천수는 2026년 3월 22일에 폐성 예정이다. 현재의 천수는 1958년에 건축되어 60년이 흐르는 동안 노후화 되었고, 6-7의 지진에 취약하기 때문에 일단 폐성을 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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