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의 역사
홋카이도 요이치시에 있는 닛카 위스키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다음 이야기는 혼슈의 히로시마 편이다. 앞으로 몇 주 동안 연재할 히로시마 시리즈에서는 히로시마시의 역사, 히로시마성,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 원폭돔과 원자폭탄 이야기, 조선의 마지막 왕자 이우공, 그리고 야마토 뮤지엄과 전함 야마토의 비극을 다루게 될 것이다.
제일 먼저 히로시마현과 모리 가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자.
아야세 하루카(綾瀬 はるか1985년 3월 24일생,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출신 본명 타데마루 아야)의 고향, 히로시마시를 여행한 것은 역시 일본을 계절적으로 가장 여행하기 좋은 5월이었다. 히로시마를 가기로 한 것은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태평양 전쟁 시 원자폭탄이 투하된 2개의 도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꼭 가보고 싶었는데, 각기 다른 봄에 다녀왔다.
자. 히로시마를 여행하기 전에, 히로시마현의 역사는 어떠한지, 히로시마시는 또 어떤 역사를 가졌으며, 어떤 역사적 사실이 있었는지부터 살펴보자. 인구 270만 명의 히로시마현은 일본 서부 주고쿠 지방에 위치한 현으로, 서쪽으로 야마구치현과, 동쪽으로는 오카야마현 그리고 남쪽으로 세토내해와 맞닿아 있다.
히로시마현은 산, 바다, 섬, 강, 계곡, 펄, 고원 등 일본의 많은 자연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어, 일본의 축소된 지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 전체의 약 73%가 산지이기 때문에, 인구의 대부분은 해안선 쪽의 평야 지대에 집중되어 있다.
오카야마현과 같이 태풍 등의 자연재해의 피해가 별로 없고, 전체적으로 온난한 기후인 히로시마현의 역사는 6세기말에서 7세기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 지역은 아키安芸国 와 빈고 備後国, 이렇게 2개의 나라로 갈라져 있었다. 빈고국은 히로시마현의 동부 지역에 있었는데 현재 지도상의 후쿠야마시, 오노미치시, 미하라시, 세라정, 후추시, 진세키고겐정, 쇼바라시, 미요시 등이 이에 해당된다. 아키국은 히로시마현의 서부 지역에 있었는데 주코쿠와 시코쿠지방을 통틀어 최대의 도시인 히로시마와 그 주변지역이 이에 해당된다.
이 두 개의 지역은 현재에도 문화와 방언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아키와 빈고라는 두 개의 지역으로 나누고 있지만 히로시마현에는 좀 더 세부적으로 나눈 지방들이 있는데, 아래 지도를 보자.
이렇게 모두 4개의 지역으로 나누는데, 남서쪽이 아키, 남동쪽이 빈고, 북서쪽이 게이호쿠, 북동쪽이 비호쿠이다. 현 이름은 현청 소재지인 히로시마에서 유래된 것으로 1589년에 모리 데루모토가 이 지역에 성을 쌓기 시작한 뒤 1591년에 완성된 성의 이름을 히로시마성이라고 정한 데서 시작되었다. 에도 시대(1603-1867)에는 현재의 히로시마 현은 2개 영지(번)로 갈려 있었다. 동쪽은 후쿠야마 번이고, 서쪽은 히로시마 번이었다.
이제 현청 소재지인 히로시마시로 가보자. 히로시마시는 주고쿠 지방의 전통적인 중심도시로서,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까지는 모리씨의 근거지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기 이전의 전국 시대에 이 지역의 패자는 모리가문의 모리 모토나리毛利 元就(1497-1571)였다. 그는 전국시대의 최고의 지장知将이라는 명성 이외에, 이즈모의 아마고 쓰네히사, 비젠의 우키타 나오이에와 더불어 일본 전국 시대 3대 모장謀將으로 불리리만큼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아키의 호족으로 시작하여 주고쿠 지방 대부분을 지배하에 둔 전국 시대 최고의 명장 중의 한 명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항상 용의주도한 책략으로 자군의 승리를 이끌어 희대의 책략가로 명성이 높았다. 아키국 요시다 고리야마성(吉田郡山城)을 거점으로 한 모리 히로모토의 차남으로 태어난 모토나리는 장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문을 계승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인 모리 히로모토가 1506년 과음으로 죽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을 계승한 장남이자, 모토나리의 형인 오키모토마저 1516년에 사망한 뒤에 어린 조카인 모리 고마쓰마루의 후원자가 되어 가문을 이끌었다. 그러나 1523년 조카마저 9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그는 일약 가문의 중심이 되어 전국 시대의 험란한 역사 속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그가 걸었던 다사다난한 일생을 다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는 자신이 추종했던 오우치, 아마고 가문이 멸망하는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훗날 75세로 운명하기 전에 우리 모리 가문은 판도의 보존만 원하고 천하는 바라지 않는다 라는 다소 독특한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원래부터 뛰어난 군사적,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가문을 따랐던 신하들과 그의 자식들을 비롯한 그의 가족 모두가 유능했기에 그가 생존한 시대에는 주고쿠 지역을 대표하는 다이묘의 자리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의 장남 모리 다카모토가 41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등 개인적으로 쓰라린 상처도 많았다.
히로시마성을 축성하여 오늘날의 히로시마시의 기초를 다진 인물인 모리 데루모토 毛利輝元 1553-1625는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이다. 그는 도요토미 정권하에서 고다이로의 자리에 올라 한 축을 담당했으며, 일본 역사의 분수령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 군의 총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에도시대에는 죠슈번의 초대 번주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어정쩡한 그의 처신이 문제가 되어 죠슈번(지금의 야마구치현)으로 이봉되어 하기에서 생을 마감했다.
비록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전한 서군에 가담하여, 도쿠가와 가문으로부터 일부 탄압을 받았지만 훗날 그가 옮겨간 죠슈번이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세력이 되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전체를 아우르는 위치에 올라섰지만 먼 훗날, 그의 후손이 모리가 의 죠슈번으로부터 굴욕적인 항복을 강요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히로시마로 돌아가서.. 히로시마(広島 한문으로 해석하면 넓은 섬이라는 뜻)는 1589년 모리 데루모토에 의해 세토내해의 해안 삼각주에 세워졌다. 이미 앞서 설명한 대로 당시 데루모토는 이 성을 히로시마성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실상 당시 히로시마성이 건설된 삼각주의 섬의 크기는 두 번째로 큰 것이었다.
히로시마라는 이름에 대해 또 다른 설은 모리 데루모토가 모리 가문의 시조로 보는 오해 히로모토(大江広元)의 히로(広)와 모리 데루모토를 이곳으로 안내한 후쿠시마 모토나가(福島元長)의 시마(島)를 조합하여 이곳의 원래 지명인 고카(五箇)을 히로시마(広島)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데루모토는 1593년에 예전의 근거지였던 고리야마성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전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로시마성을 비롯한 데루모토의 영지 대부분을 몰수해 자신을 지지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주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正則 1561-1624, 오와리(현재의 아이치현 서부) 출신, 1578년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 장수로 들어가 용맹을 떨쳤다. 1592년 임진왜란에 일본군 제5진으로 참전한 바 있다. 가토 기요마사와 더불어 무단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문치파인 이시다 이시다 미쓰나리와는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다. 그리하여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1599년 윤 3월 중립을 지키던 마에다 도시이에가 죽고 난 뒤 가토 기요마사,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함께 이시다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나이 어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대신하여 정권을 독차지할 것이라고 오판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德川家康)에게 가담하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으며, 결과적으로 도요토미를 쇠망의 길로 몰아가는 어리석은 충신이라고 할 수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히로시마의 영주로 임명되었고, 상공업을 육성하여 히로시마를 발전시키는데 이바지하였으나, 1619년 금령을 어겨 시나노의 소영주로 쫓겨나 병사했다)
그러나 홍수로 인해 성을 수리한 것을 막부에 보고하지 않았던 것을 문제 삼아 그는 다른 곳으로 이봉되었고, 1619년에 아사노 나가아키라가 이곳의 영주로 옮겨왔다. 그 후 이 지역은 아사노가문의 지배하에 번영 발전해 갔으며 그 지배는 19세기의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이어졌다. 1871년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 이후, 히로시마현의 현청 소재가 된 히로시마는 그 후 일본의 주요 도시로 성장해 갔다.
1870년대에 정부의 후원을 받는 7개의 영어 학교 중 하나가 히로시마에 세워졌고 1880년대에는 히로시마 현령이었던 센다 사다아키의 노력으로 우지나 항(현재의 히로시마항)이 건설되어 히로시마는 중요한 항구 도시가 되었다. 1894년에는 산요철도가 히로시마까지 연장되었고 청일전쟁 때에는 군사 수송을 위해 항구에 철도역이 건설되었다. 전쟁 기간에 일본 정부는 일시적으로 히로시마로 옮겨왔고 천황 은 1894년 9월 15일부터 1895년 4월 27일까지 히로시마 성을 본부로 삼았다. 히로시마의 중요성은 청일 전쟁이 끝난 후 1895년 2월 1일부터 1895년 2월 4일까지 양국 대표 간의 첫 번째 회담이 열렸던 데에서도 알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방적 공장을 포함한 새로운 공장들이 히로시마에 세워졌는데 히로시마의 산업화를 더욱 자극한 것은 1904년의 러일 전쟁이었다. 러일 전쟁 이후 군사도시로서 히로시마는 발전을 거듭하게 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히로시마는 구 일본육군의 근거지가 되었고 우지나 항은 구 일본 제국 해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도시에는 또한 커다란 병창이 있어 수송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이것이 이 도시에게 쓰라린 상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인 리틀보이가 히로시마의 중심부에 투하된 것이다. 히로시마의 원폭에 대해서 따로 자세하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테니 뒤로 미루고 이렇게 해서 히로시마현과 히로시마시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JR히로시마역의 모습이다. 1894년에 개업한, 오랜 역사를 가진 이 역은 당시 개통된 산요철도의 종점이었다.
처음 개업당시에는 목조역사였지만 그 뒤 철도승객이 증가함에 따라 시설 확장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22년에 당시 교토역을 본뜬 철근 콘크리트역이 건축되었다.
바로 이 사진의 역이 당시 철근 콘크리트로 건축된 히로시마역의 모습이다. 그 뒤 1941년 역의 확장이 있었으나, 1945년의 원폭 투하로 이해 이 건물은 대파되고 말았다.
1945년 10월의 히로시마역 사진이다. 원폭으로 인해 대파된 모습이다. 이렇게 원폭의 흔적은 히로시마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다음 편부터 히로시마성이 어떻게 세웠졌는지, 히로시마의 원폭이 어떻게 투하되었으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하나하나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