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은 원폭 공격을 알고 있었을까?
전편에 이어 히로시마 원폭 이야기, 두 번째를 시작하자. 첫 번째 이야기는 히로시마 원폭이 결행되기까지의 시대적인 배경과 상황, 그리고 어떻게 히로시마가 원폭 공격의 폭표지가 되었는지와 원폭 투하가 있기 직전의 히로시마의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
이제 두 번째 이야기는 원폭 투하 공격의 본격적인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할 텐데, 먼저 8월 6일 아침에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부터 살펴보자. 이번편부터는 몇 개의 소제목과 단락을 구분 지어 이야기할 생각이다.
1.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은 어떤 것인가?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의 이름은 리틀보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폭탄은 팻 맨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막대 모양의 'little boy(꼬맹이)'와 공 모양의 'fat man(뚱뚱이)'은 각각 루스벨트와 처칠의 별명이었다.)
이 두 개의 폭탄은 제조 방식이 다른데, 리틀보이는 우라늄 235를 이용해서 만들어졌고 팻 맨은 플루토늄을 이용해서 만들어졌다. 양자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외형 역시 달랐다. 리틀 보이는 두 개의 우라늄 덩어리를 충돌시키는 포신형 구조를 갖고 있었지만, 팻 맨은 텅 빈 공간 바깥에 플루토늄을 배치한 후 기폭과 동시에 이 조각들이 안쪽으로 날아가서 공 모양으로 합쳐지고, 그것이 폭발을 일으키도록 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총 3개의 핵폭탄 설계 프로젝트의 명칭("Fat Man", "Thin Man", 그리고 "Little Boy")은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로스 알라모스의 디렉터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학생이었던 로버트 서버가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의 기억에 의하면, 그는 그 폭탄의 모양에 따라 이름을 선택했다고 한다. ‘날씬한 남자’(Thin Man)은 똑같은 이름의 대쉘 해밋의 탐정소설과 영화로부터 따왔으며, 뚱뚱이(Fat Man)는 둥글고, 뚱뚱했으며, 시드니 그린스트리트의 몰타의 매에 등장하는 인물인 캐스퍼 것맨(Kasper Gutman)이라는 등장인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리틀보이는 맨 마지막에 제조되었으며, 씬 맨 폭탄과 대조시키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원래 씬 맨은 17피트 길이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U-235이 더 느린 추진 속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을 때, 특별한 조치가 필요해졌다. 리틀보이의 길이는 약 3m이고 지름이 71cm, 무게가 4톤이며, 이 리틀보이의 폭발력은 TNT로 약 2만 톤(20 kt)이다. 최저 13 kt 최대 18 kt 정도로 보는데, 보통은 20 kt급 핵폭탄을 히로시마급이라고 말하며, 핵폭탄 위력의 표준 도량형으로 국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2. 리틀 보이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가?
리틀 보이를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과학자는 현재의 기록의 확인해 볼 때 모두 8명이다.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사람은 아인슈타인이 아닌 질라드였으며, 아인슈타인은 그 편지에 서명을 해준 것뿐으로 실제로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1939년 8월, 질라드와 유진 위그너는 아인슈타인 편지의 초안을 작성했다. 그들은 아인슈타인에게 서명을 받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루스벨트는 국립 표준 연구소의 리먼 브리그스를 우라늄 고문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해 그 편지의 내용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브리그스는 1939년 10월 21일 위원회를 열였으며, 여기에는 질라드, 위그너, 에드워드 텔러가 참석했다. 1939년 11월 위원회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우라늄이 현존하는 어떤 폭탄보다도 더 강력한 폭발력을 낼 수 있다"는 보고를 하였다. 그래서 1942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맨해튼 계획을 지시했다. 그런데 4선에 성공한 루스벨트 대통령이 4번째 임기 초반인 1945년 4월 12일 조깅 중에 급사하고, 강경파인 트루먼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었다. 1945년 7월 세계 최초의 핵실험인 트리니티 핵실험이 성공했다.
리틀보이를 만든 8명의 과학자는 아래와 같다.
-오펜 하이머 (1904-1967) 미국
-노이만 (1903-1957) 미국 - 원자폭탄이 지상 몇 미터에서 떨어져야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지 계산.
-위그너 (1902-1995) 미국 - 원자로 건설에 종사
-콤프턴 (1892-1962) 미국 -핵분열 원자로 개발과 핸퍼드의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 건설을 총괄지도
-질라드 (1898-1964) 미국
-로런스(1901-1958) 미국 -우라늄 235의 전자기적 분리 방식을 이용하여 원자폭탄 리틀보이 제조에 중요한 역할을 함.
-보어 (1885-1962) 덴마크
-페르미(1901-1954) 이탈리아 - 위그너와 함께 리틀보이를 만듦.
리틀보이의 내부 구성도.
3.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 공격의 진행
원자폭탄의 제조 작업과 동시에 이를 목표지에 옮겨가서 투하해야 할 임무에 대한 계획도 진행되고 있었다.
1943년 11월 오하이오주의 라이트 필드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항공 군수사령부에서 원폭을 위한 B-29 폭격기 부대가 창립되었다. 폭격부대의 작전명은 실버플레이트( Silverplate)였다. 폭격 시험은 캘리포니아주 에드워드 공군기지와 해군 항공 무기 시험소에서 실시되었다.
1944년 3월, 맨해튼 계획의 군사책임자인 그로브스는 미국 공군의 전신인 미육군 항공대의 대장 헨리 H. 아널드를 만나 목표까지 폭탄을 운반하여 폭격을 완수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였다. 5.2m 길이의 틴 맨이나 직경이 150cm인 팻 맨을 운반할 수 있는 폭격기로는 영국의 아브로 랭커스터가 유일했지만, 그로브스의 요청으로 B-29 폭격기를 개조하여 폭격에 사용하기로 하였다.
실버플레이트 소속의 B-29 폭격기 스트레이트 플러쉬, 보안을 위해 꼬리에는 제444 폭격대의 문장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1944년 12월 17일, 유타주 원도버 육군항공기지에서 제509 혼성대가 편성되었다. 이곳은 네바다주 접경에 있었고 작전명은 킹맨, 또는 W-47이라 불렸다. 이 부대에서 폭탄의 수송과 투하 준비가 이루어졌고 1945년 7월 준비가 완료되었다. 리틀보이를 구성하는 부품들은 1945년 7월 16일 대부분 샌프란시스코에서 순양함 USS 인디애너폴리스(CA-35)에 실린 후, 7월 26일 티니안으로 운반되었다. 인디애너폴리스는 운송을 마친 지 나흘 뒤에 일본군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었다. 이 때문에 우라늄-235를 포함한 나머지 부품들은 더글러스 DC-4 수송기를 통해 운반되었다.
4. 운명의 그날, 원폭 투하의 임무를 수행한 이들은 누구인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있어서 항상 거론되는 이름이 있다. 바로 그날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B-29 폭격기, 에놀라게이 Enola Gay이다. 에놀라 게이는 네브레스카주에 있는 글렌 L. 마틴 사 (현 오퍼트 공군 기지) 벨뷰 공장에서 제조되었다. 그 후, 폴 티베트 대령이 개인적으로 골라 1945년 5월 18일에 미육군항공대 509 혼성 부대에 배속되었다. 그 후 1945년 7월 6일, 미국 본토로부터 티니안섬에 도착해 그날 바로 원자 폭탄을 탑재하기 위해 폭탄창의 개조가 이루어졌다.
배속되던 당시, 번호가「12」로 지정했지만, 소속 부대를 나타내는 수직꼬리날개의 마킹을 특수 작전 기라는 것을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일반 폭격 전대인「제6 폭격대」 표시인 대형 원 중심의 R로 변경했기 때문에, 오인 방지를 위해 「82」로 변경되었다. 초기는 특수 임무기 표시인 대형 원 중심의 좌향의 화살표이다.
원폭 투하 후에 귀환한 에놀라게이의 모습이다. 수직 꼬리 마킹을 변경한 것이 보인다.
에놀라 게이는 8회의 훈련임무와 2회의 산업 목표를 파괴하는 고베 나고야에 펌킨 폭탄(모의 원자 폭탄)을 사용한 폭격 임무를 실시했고 1945년 7월 31일에는 원폭 투하 임무 리허설을 위해 모의 원자폭탄을 탑재해 티니안 섬 인근 바다에서 훈련 투하했다. 이것으로 에놀라게이에게는 가장 중요한 목표의 공격임무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기체 명칭인 에놀라 게이는, 기장인 폴 티베트 대령의 모친인 에놀라 게이 티베트(Enola Gay Tibbets)로부터 따온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44-86292호기 조종사였던 로버트 A 루이스 대위(원폭 투하 임무시는 부기장을 맡았다)는 운명적인 이 작전에 모친의 이름을 붙이는 일에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여기에는 개운치 않은 뒷 이야기가 있다.
폴 티베츠는 부대장이었고 원래 이 기체 담당도 아니었다. 그러나 임무 직전에 지휘관으로서 독단을 부려 원래 기장이었던 로버트 루이스를 빼버리고 히로시마 작전만 자신이 맡는 것으로 바꾸었다. 전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로버트 루이스는 불쾌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아침에 루이스는 계류장에서 자신의 애기에 커다랗게 '에놀라 게이'라는 페인팅이 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는데, 티베츠 스스로도 뒤가 켕겼던지 야음을 틈타 하룻밤 사이에 칠해놓은 것이었다. 이 일만큼은 루이스도 격분하여 티베츠에게 달려가 극력 항의했으나 묵살당했다. 티베츠가 이런 무리한 일을 저지른 이유는 물론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기체로써 자신과 어머니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놀라게이와 승무원들의 모습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위해 출격하기 직전에 손을 흔들고 있던 기장 폴 티베츠 대령의 모습
좌로부터 폭격수 토마스 피어비, 기장 폴 티베츠, 항법사 테어도어 판 커크 대위,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 대위
8월 6일의 원폭 투하 시, 에놀라게이에는 모두 12명의 대원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당시 탑승자들의 명단이다.
기장 - 폴 티베츠 대령
부기장 - 로버트 A 루이스 대위
폭격수- 토마스 피어피 소령
항법사 - 테어도어 판 커크 대위
전자전 담당- 제이콥 베서 중위(나가사키 공격에도 참여했다.)
무기 및 폭탄 담당 - 월리엄 스털링 패스 해군 대위
무기 부담당 - 모리스 R 젭슨 소위
레이더 담당 - 조지 S 스티보릭 중사
후미기총수 - 조지 R 밥 캐론 기술 하사관
부항법사 - 로버트 H 서머드 하사
레이더 운용사 - 리처드 M 넬슨 일등병
항공 기관사 - 와드 E 덴젠베리 기술하사관
현재 에놀라게이는 복원되어 스미소니언 항공 우주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5. 일본군은 이 공격을 알고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뭔가 수상한 조짐이 있다는 것은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그것이 원폭이라는 가공할만한 무기의 공격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이다.
당시 일본 대본영과 제국 육군 중앙 특종 정보부(특정부)는 사이판의 B-29부대에 대해 주로 전파 감청에 의해 그 동향을 24시간 체제로 감시하고 있었다. 대본영 육군 군부 제2부 제6과(정보부 미영과)에 소속해 있던 호리 에이조가 나중에 회상한 바에 따르면 제509 혼성 부대가 티니안 섬에 진출한 것이나, 진출한 B-29중 한대가 장문의 전보를 워싱턴을 향해서 타전한 것, 그리고 그 이전부터 사이판 쪽으로 존재하고 있던 다른 B-29부대가 기본적으로 V400카운터, V500카운터, V700카운터의 콜 사인을 이용했던 것과 다른 제509 혼성 부대가 V600카운터의 콜 사인을 사용한 것으로부터, 도쿄도 스기나미 구에 있던 육군 특수 정보부는 새로운 폭격 부대의 진출을 알고 있었다.
이후 6월 말경부터 이"V600카운터"의 B-29가 티니안섬 근해를 비행하다가 7월 중순이 되면 일본 근해까지 1기 혹은 2~3대의 소편대로 진출했다가, 귀환하는 행동을 반복하게 되면서 이러한 기체를 특정부는 "특수 임무기"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이 B-29들이 원폭 투하 임무를 위한 부대인 것은 원자 폭탄 투하 후의 트루먼 대통령의 연설에 따라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일본군은 이"특수 임무기"의 목적을 사전에 감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일본군은 당시 미국의 원자 폭탄 개발의 진척 상황을 거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정부에서는 "7월 16일 뉴 멕시코 주에서 새로운 실험이 행해진 "것에 대해 외국 통신사 기사를 본 것뿐이었다. 물론 이것은 트리니티 실험을 가리킨 보도였다. 실험 직후 시점에서는 내용은 공개되지 않아 당시 일본군은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그것을 토대로 호리 에이조는 "원폭이라는 단어는 그 당시 조각 정도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또 특정부는 당시 스웨덴을 통해 입수한 미국 해군의 M-209 암호 장치를 이용한 암호 해독도 진행시키고 있었지만, 이 암호 해독 작업에서 "nuclear"문자열이 나타난 것이 원폭 투하 이후인 8월 11일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원폭투하 당일, 에놀라 게이가 출격한 사실도 알고 있었고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 접근하기 1시간 전에 기상정찰을 위한 또 다른 B-29가 히로시마 상공을 정찰한 것도 알고 있었으나 확실한 대피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결국 히로시마는 거대한 재앙이 몰아닥치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8월 6일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펌킨 폭탄(호박 폭탄에 대해)
정식 명칭은 "1만 파운드 경통폭탄 "이다. "팻맨"과 거의 동일한 모양을 가지고 있었고 무게도 팻맨과 거의 동일하도록 조정된 모의 원폭이었다.
이 폭탄은 원폭 투하에 대비 한 폭격기 승무원의 훈련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때까지 유례가 없는 특수한 형상을 한 팻맨이 폭격기 ( 원폭이 탑재 가능하도록 특별히 개조된 B-29)에서 투하된 폭발 때까지의 탄도 특성 · 관성 능률 등의 다양한 사전 데이터 채취를 위해 이른바 '모의 원폭'으로 제작되었다.
(사진 속의 폭탄이 펌킨 폭탄이다)
팻맨과 펌킨폭탄의 내용물을 제외한 주요 차이점은 폭탄 정면에 설치된 촉발 신관수 (팻맨은 4 개, 호박 폭탄 3 개)와 팻맨을 기폭 시키기 위한 레이더 · 무선 장비 유무와 폭탄 외피 조립 방식 (팻맨은 볼트 결합, 호박 폭탄은 용접 결합)의 3 개다.
펌킨 폭탄은 내용물에 따라 2 종류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TNT를 주성분으로 한 고성능 폭약을 충전 한 유형, 다른 하나는 시멘트와 석고를 이용한 콘크리트 혼합물이 충진 된 유형이었다. 전체적으로 팻맨 원폭의 내용물과 거의 동일한 형상 · 비중 · 중량이 배분되도록 조정되어 폭탄 내부의 코어 배치 위치도 완전히 똑같이 되었다. 이렇게 하면 원폭 투하 행동에 대한 효과적인 사전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펌킨의 총중량은 약 4,800 kg 내부의 폭발물 또는 콘크리트가 약 2,900 kg 폭탄 외피 ( 강철제) 등의 기타 구조물이 나머지 무게를 차지한다.
이 폭판이 투하 목표로 한 것은 원폭 투하 후보지였다 교토, 히로시마, 니가타, 고쿠라의 각 도시를 4 개의 영역으로 나눈 인근 도시 (히로시마라면 우베와 니하마시, 니가타 시라면 도야마, 나가오카 등)에 있던 군수 · 민간의 대규모 공장, 철도조차장 등이었다. 원폭 투하 후보 도시는 원폭의 위력을 정확하게 관찰하기 위해 사전 공습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변 도시가 목표였다. 1945 년 7월 20일, 도야마 · 나가오카 · 후쿠시마, 도쿄 에 총 10 발이 투하된 것을 시작으로 30 개 도시에 50 발 (중 1 발은 임무 포기 폭탄 해상 투기 된) 가량이 투하되고 전체 사망자 400 명 · 부상자 1200 명 이상의 피해가 나온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투하는 육안 폭격으로, 날씨 등의 제약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위치에 투하된 것은 아니다. 당시 미군 측의 자료에 따르면, 전술 목표에 투하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떤 도시라도 좋기 때문에 도시의 한가운데에 떨어 뜨리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 때문에, 7월 26일 훈련에서는 날씨 악화로 도야마의 군수 공장 폭격에 실패, 시즈오카, 나고야, 오사카 등 군수공장과 전혀 관계없는 곳에까지 투하된 예도 있다.
탑재기는 원폭 투하 임무시뿐만 아니라 폭탄을 육안으로 투하 후, 신속하게 155 ゜의 급선회 · 급 가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원폭 투하 후 탑재기를 포함한 공격 부대가 폭발에 말려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전후 미국 전략 폭격 조사단은 펌킨 폭탄에 대해 "해당 폭탄이 목표에 직격 및 지근탄이 되었을 경우, 목표에 상당량의 구조적 피해를 주는 매우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무기였다 "라는 평가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