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투하, 그 지옥의 아침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 45분, 홀연히 날라든 미군의 폭격기 에놀라게이에서 투하된 폭탄은 히로시마 중심부 상공 약 600m에서 폭발했다. 그 한 발의 폭탄은 한 여름의 히로시마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원폭 투하 시 촬영기는 컬러 필름으로 촬영하고 있었지만, 티니안 섬으로 귀환 후 현상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 기록은 분실되었다. 따라서 폭발에서 약 3 분 후에 그레이트 아티스트에 탑승 한 과학 조사 지도자, 해롤드 애그뉴가 8mm 카메라로 촬영한 버섯구름의 영상이 세계 최초의 원폭 투하를 기록한 영상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 운명의 8월 6일은 월요일이었다. 당시 아침 근무시간의 시작은 8시였다. 대부분의 노동자, 징용 공 · 여자 정신대 및 근로 동원된 중학교 상급생 (1 만 수천 명 추정)들은 미쓰비시 중공업과 동양 공업을 비롯한 수십 군데의 군수공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또한 건물 소개작업에는 중학교 하급생 (수천 명) 및 민간인 근로 봉사대 (엄마들)과 질병 등의 이유로 징병되지 않은 남자 등이 참석했다.
일본의 건물들이 대부분 목조 건물이었던 탓에 공습으로 인한 2차 화재의 피해가 심했다. 그래서 공습에 의한 불길의 번짐을 막기 위해 일정 지역의 건물을 철거하여 방화선을 만드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것이 바로 건물 소개작업이었다. 건물의 파괴는 군인들이 하고 잔해 처리를 봉사대가 했다. 그날도 그런 작업들이 히로시마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작업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은 원폭의 열선을 직접 대량으로 받게 된다.
초등학교 상급생 아동들은 1945 년 4 월에 행해진 집단 피난으로 도시를 떠나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하급생 아동은 시내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각 지역의 서당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취학 이전의 유아는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 전날 8월 5일 자정에 두 번 공습경보가 발령되고 그때마다 시민들은 방공호로 대피했기 때문에 수면 부족의 시민도 많았다. 그리고 이날 시내 중심에서 쌀 배급이 이루어져 시민들은 오랜만에 쌀밥을 지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8 월 6 일 아침의 기온은 26.7도, 습도 80 %, 기압 1,018 헥토 파스칼이었다. 북동풍이 약 1미터로 불고 있었고 구름의 양은 많았지만 시야는 양호했다. 7시 9분 공습경보에 시민들은 일단 방공호에 숨었지만 7시 31분에 경보가 해제되었기 때문에, 모두들 밖에 나와 하루의 활동을 시작했다. 리틀보이는 옆바람 때문에 처음에 조준했던 아이오이다리에서 240 미터 벗어난 시마외과병원의 상공에서 폭발했다.
리틀보이의 폭발력은 TNT 13 킬로톤에 상응하는 폭발을 일으켰다. 그 폭발로 반경 1.6 킬로미터 이내의 모든 것을 파괴했으며 11 제곱킬로미터에 해당하는 화재를 일으켰다. 원폭 투하 후 미국이 파악한 자료에 의하면 도시의 12 제곱 킬로미터가 파괴된 것으로 측정했으며, 일본은 히로시마의 69%의 건물들이 파괴됐고 그것을 제외한 31%의 건물들 중 6~7%가 손상을 입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인적피해는 당시 히로시마의 인구 중 약 70,000명에서 80,000 명, 약 30%가 원폭 투하 당시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으며 70,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도시의 90%의 의사들과 93%의 간호사가 사망하거나 다쳤다. 이들은 도시에서 가장 큰 피해를 받은 시내에 있었다. 폭심지 근처는 모든 것이 소멸해 버렸다. 계단에 앉아 있던 사람이 증발하면서 검은 흔적(아토믹 섀도)이 남은 자리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있다. 히로시마시 전체는 방사선과 열로 가득했고 잿빛 대기로 태양마저 가려져 사방이 밤처럼 어두웠다.
그것은 인류가 그동안 상상했던 불의 지옥 그 이상이었다. 온몸이 불타는 사람이 다리 밑으로 떨어지자 물에 떨어진 불덩이처럼 산산조각 나는 모습 등, 끔찍한 참상은 말로 다 전할 수가 없었다. 높은 열로 인해 기온이 치솟은 대기는 지극히 건조해져 도시 전체가 초고온의 건식 사우나 같은 상태로 되었다. 사방에 널려진 죽지 않은 부상자들로부터 신음소리, 비명소리와 함께 물을 달라는 절규가 끊이지 않았다. 몇 시간 뒤 증발한 수분이 모여 상공으로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검은 비였다.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남은 재가 방사성 분진으로 올라갔다가 비에 섞여 내려온 것이었다. 이 시커먼 빗물은 고농도의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었지만 타는 듯한 갈증에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빗물을 받아 마셨다. 이 희생자들은 검은 비에 노출된 만큼 더 일찍 죽었다. 다량의 방사선에 피폭된 부상자들은 갖가지 끔찍한 증상에 고통을 호소하며 며칠 만에 죽어갔다. 방사능에 대한 정보를 갖지 못했던 의사들은 화상과 방사능 피폭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투하된 원폭의 폭심지를 알리는 표지석. 리틀보이는 이 병원의 서남쪽 상공에서 폭발했다.
현재의 시마병원의 모습이다.
이 사진은 1943년경에 촬영된 시마병원의 모습이다. 원폭의 폭발로 발생한 폭풍과 고열로 인해 이 병원은 흔적도 없이 대파되었다. 당시 이 병원에는 80명의 직원과 환자가 있었으나, 거의 전원이 즉사했다. 이 병원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전날 다른 지역으로 출장진료로 나가 있던 의사 1명과 간호사 1명이었다. 이 두 사람이 병원으로 돌아온 것은 다음날 오후였다. 불길에 의해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건물 잔해를 뒤져 목조 기기 케이스 안에 있던 수술용 도구를 찾아냈고 당시 히로시마 상공회의소 앞 광장에서 피폭자 구호 활동을 시작했다.
이 사진은 원폭 투하가 있기 전의 아이오이 다리와 히로시마 시내의 모형도이고 아래 사진은 원폭 투하 이후의 모형도이다.
폭심지에서의 생존자는 극히 미미했다. 투하 직후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계였다고 한다. 폭발로 인한 대량의 먼지가 햇빛을 완전히 차단했기 때문이다. 그 어둠 속에서, 고온으로 가열된 목조 건축물 등의 발화가 시작되었다. 이 폭심지의 생존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은 히로시마현 연료 배급 통제 조합의 노무라 에이조(당시 47세)였다. 노무라는 핵폭발의 순간에 연료 회관(연료 회관은 폭발의 중심지 시마병원과 산업 장려관에 가까운 17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의 지하실에 서류를 찾아 들어갔기 때문에 화를 피했다. 노무라의 증언에 의하면 이 연료 회관에서 탈출에 성공한 것은 8명이었지만 다른 이들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노무라는 그 후 맹렬한 화재 속에서 나카지마 초로 북진하다 아이오이 다리를 거쳐 서쪽으로 탈출했고 그 뒤 고열, 설사, 잇몸에서 출혈 등의 방사선의 급성 증상에서 생사를 헤매지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후 폭심지의 상황을 아는 거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1982년 6월 사망하기까지 귀중한 증언을 남겼다.
후나이리 부근에서 동쪽 방향으로 촬영된 사진
사진 가운데의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길이 헤이와오도리(지금의 히로시마 중심부)이다. 왼쪽이 나카지마초 오른쪽이 카고마초이다. 폭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사람들 중 담장이나 건물 등의 차폐물의 그늘에 있던 사람은 열선의 직격은 피했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 사람은 열선을 받은 몸의 부위가 순식간에 중화상을 입었다. 야외에서 건물 소개 작업 중인 근로 봉사 시민이나 중학생과 여학생들은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대량의 열선을 그대로 받았다. 근로 봉사에 온 학생이 모두 사망한 학교도 많았다. 그들은 열선 직후의 폭풍(핵반응의 열로 급속히 팽창한 고온 고속의 공기가 만드는 충격파)에서 몇 m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으로 날아가 지면이나 구조물에 강하게 부딪친후 기절했다. 그리고 폭풍은 옥외의 피폭자의 옷을 대부분 벗겨내어 알몸을 만들었다. 기절상태에서 깨어난 피폭자들은 자신의 팔에 피부가 벗겨져 늘어지고 손톱 부분에서 겨우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건물 내부에 있던 사람은 열선의 직격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강력한 방사선은 피할 수 없었다. 다음 순간에 닥친 폭풍으로 폭심지보다 2킬로미터 권내의 목조 가옥은 순식간에 붕괴, 잔해 속에 갇혔다. 자력으로 탈출한 사람, 혹은 다른 사람에게 구해진 사람들 외에는 가옥의 화재에 휘말려 불에 타 죽었다. 화재는 동시 다발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쓰러진 건물 속에 생존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망쳤다. 피난하던 사람들 중 화상 이외 폭풍에 날아온 파편으로 상처를 입은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물과 안전한 곳을 찾아 시내를 흐르는 강으로 피난을 시작했다..
화재는 시내 중심부의 반경 2km에 집중되어 가옥 밀집지 전역에 퍼졌다. 화재로 인한 대량의 열기는 강한 상승기류를 생겨 그것은 주변부에서 중심에 강풍을 낳고, 화재 선풍을 일으켰다. 풍속은 점차 강해져 초속 18미터에 이르는 강풍이 북부를 내려쳤다. 화재는 반경 2킬로미터 이내의 모든 가옥, 반경 3km 이내의 9할의 가옥을 소실시켰다. 그중에서, 폭심지로부터 불과 700m 부근에서 탈선해서 검게 탄 상태로 피폭 전철도 있었다.
사진의 오른쪽 중심, 종단하는 길이 바로 히로시마 중심부, 아이오이도오리이다. 원폭 투하 직후 미군이 촬영한 사진이다.
1945년 7월에 촬영된 아이오이도오리의 번화가 핫쵸보리의 사진
8월 11일에 촬영된 같은 지역의 항공사진이다.
1988년에 촬영된 아이오이도오리의 사진이다.
현재의 아이오이도오리의 모습이다.
히로시마 적십자 병원에서 북서쪽방향의 모습이다.
폭심지 부근을 운행하다 원폭의 폭발로 인해 검게 타버린 전철, 이 전철은 그 뒤 수리를 해서 운행을 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전과 후의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항공사진이다.
공격 직후 도쿄 NHK는 히로시마 NHK의 방송이 갑작스럽게 중지하게 되자, 다른 전화선을 이용해 방송 연결을 다시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약 20분 후 도쿄 철도 전신 센터는 히로시마 북쪽으로 향해 있는 전신이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다. 히로시마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일부 철도역들에서 비공식적으로 엄청난 폭탄 투하가 있었다는 보고 했으며, 이 보고는 당시 일본 제국군 참모본부에 보고되었다. 일본 제국 참모 본부는 반복적으로 히로시마 군지휘부에 연락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답변이 오지 않았으며 이것은 곧 지휘부에 혼란을 일으켰다. 그것은 당시 히로시마성과 그 주변에 주둔해 있던 5사단이 궤멸되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공격직후 일본군 수뇌부는 단 3기의 비행기가 그렇게 큰 폭발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참모본부는 히로시마에 즉시 비행기를 보내 피해를 조사하고 도쿄에 보고할 것을 명령했다. 지휘부는 큰일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러한 폭탄투하는 없다며 그저 소문일 뿐이라고 단정 지었다. 비행기는 히로시마 남서쪽으로 향했다. 3시간 여 동안 비행을 한 끝에 비행기 조종사와 함께 파견된 참모 장교는 히로시마에서 약 1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원폭으로 인해 생긴 거대한 연기구름을 목격했다. 비행기는 곧 도시에 다다랐으며 히로시마에 있던 모든 것이 불타고 연기에 뒤덮여있는 광경을 목격하며 히로시마 상공을 비행했다. 참모 장교는 이 사실을 도쿄에 보고한 후 즉시 피해를 측정했다.
이 보다 앞선 8시 30분경, 히로시마에 가까운 구레의 해군진수부에서 대본영 해군부에 히로시마가 공습을 받아 괴멸되었음을 보고했다. 이어서 10시경에는 제2총군이 선박 사령부를 통해 대본영 육군부에 보고했다. 또한 오후에는 동맹 통신에서도 특수 폭탄의 히로시마가 전멸했다는 통지를 받은 대본영은 정부 수뇌에게 정보를 전하고 그날 오후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됐을 가능성이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하스 누마 반 시종무관장이 히로히토일왕에게 "히로시마시가 전멸"이라고 보고했다.
이 공격 이후, 일본은 재빨리 판단했어야 했고 옥쇄론 같은 허황한 주장에 휩쓸리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수뇌부는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매파와 평화협상을 하자는 비둘기파로 나누어 대립하고 있었고,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 어리석은 상황은 결국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라는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졌다.
적어도 그날 아침, 상상할 수 없는 지옥의 참상을 제대로 보았다면 더 이상의 항전은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의 종식은 9일이나 남아 있었고,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본의 항복과는 관계없이 하나 둘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죽지 못한 이들에게는 오랫동안 끝나지 않는 전쟁이 남아 있었다. 방사능과 폭발의 상흔이 그들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