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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곳에 있었던 한국인들, 조선 황족 이우李鍝

히로시마 원폭 그날, 이우

by 늘 담담하게

지금까지 히로시마의 원폭이 투하되기까지의 그 전후 역사적 사실, 원폭 투하 작전의 내용, 그리고 원폭 투하직후의 상황까지 이야기했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 끔찍한 재앙의 날, 그곳에 있었던 한국인들과 조선 황실의 후예, 이우(李鍝 1917-1945)에 대한 것이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된 그날, 그곳에는 일본인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수많은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억울하게 끌려와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원자폭탄의 투하로 인해 목숨을 잃어야 했고 살아남은 이들도 피폭자로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당시 히로시마에서 목숨을 잃은 한국인들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현재까지 파악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시 한국인 희생자수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원자폭탄 폭격으로 인하여 당시 히로시마시 인구 약 33만 명 중 14만 명과 나가사키시 인구 약 27만 명 중 7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86년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추정한 사망자 숫자는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피폭사망자 수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피폭자 통계가 불확실하고 일정하지 않다.


이 피해 통계 중 한국인의 인적 피해는 10%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5년 단편적인 추정이지만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 통계에 따르면, 히로시마 한국인 수를 8만 1,862명으로 집계하고 있고, 당시 추정 피해상황은 약 히로시마에서 총 피폭자 7만 명 중 사망자 3만 5,000명, 생존자 3만 5,000명으로 보았다. 그리고 나가사키에서는 총 피폭자 3만 명 중 사망자 1만 5,000명, 생존자 1만 5,000명으로 보았다. 즉 한국인은 두 도시에서 약 10만 명이 피폭되어, 그중 5만 명은 사망, 5만 명은 생존하였다는 수치이다. 이 통계는 또한 생존자 중 4만 3,000명이 고국으로 귀국하고 7,000명이 일본에 잔류했다고 제시하였다.


1972년 4월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원폭피해자 추정치로 총 피폭자 7만 명 중 사망자 4만 명, 생존자 3만 명(귀국자 2만 3,000명, 일본 잔류자 7,000명)이었다. 그리고 귀국자 가운데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은 2,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피폭자 7만여 명 가운데 1만여 명(1세 2,300여 명, 2세 7,500여 명, 1세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등록자 기준이며 2세는 추정치)이 현재 한국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수많은 한국인 희생자들 중에 우리가 비교적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일본 프로야구 전설 중의 한 명인 장훈(1940- 히로시마 출생) 선생이다. 당시 장훈선생은 다섯 살로 어머니와 다른 형제들과 함께 히로시마에 살고 있었다. 그가 살던 곳은 원폭의 폭심지에서 2km쯤 떨어진 곳이었는데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그가 살던 집이 작은 야산이었던 히지야마가 가려준 덕에 직접적인 열선의 피해는 피할 수 있었으나, 후폭풍으로 집이 무너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열한 살의 큰 누나가, 근로동원으로 히지야마 서쪽의 공장에서 일하다가 화상을 입고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히로시마에서 원폭을 겪은 장훈선생은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다녔었는데 일본 프로야구계에서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장훈선생과, 노닌 와타루 2명뿐이다.


그리고 나라를 잃어버린 이들의 한과 슬픔을 대변할 수 있는 이가 또 한 명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우(李鍝)이다.


이우.


한때 인터넷에서 얼짱왕자로 유명했던 그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둘째 아들로 1912년 11월 15일 오전 6시 경성부 중부 관인방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생모는 의친왕의 측실 수인당 김흥인(修仁堂 金興人)이었다. 1917년 3월 22일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하자, 그해 5월 28일에 당숙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재산과 칭호를 상속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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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용은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 체결 후에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의 방계혈족에 대해 규정한 신분인 공족으로 1912년에 사망한 아버지 이재면의 뒤를 이어 공의 칭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운현궁의 상속자로 결정되자 공 전하’(公 殿下)로 불렸다.


2007년도에 방영된 한국방송의 다큐에서는 이우공이 당시 황실의 명맥을 이어갈 후계자로 지목받았던 인물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당시 한일합방으로 깊은 좌절에 빠졌던 고종황제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이가 바로 어린 이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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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는 자라면서 재치 있고 영특한 면을 보여줬고 복잡한 서열관계로 한데 어울리기 힘들었던 황실가족들을 일일이 챙기며 그 구심적 역할까지 훌륭히 소화해 낸다." 2007년 한국방송 다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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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앞열 세 번째 남성이 이우이고, 바로 왼쪽의 서 있는 여성이 이우의 부인 박찬주여사이다. 지금은 없어진 의친왕 이강의 저택이었던 사동궁, 서양식 건물과 한옥들이 이어진 형태로 당시 규모는 1만 평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의 조계사 앞 큰 골목에서 인사동지역까지 이르렀다.

1917%B3%E2_%C0%CC%BF%EC_%C0%E5%B7%CA%BD%C4%C0%E5.jpg?type=w2 1917년 이준용의 장례식장에서 이우.



당시 운현궁의 일본인 사무관은 “새로이 결정된 이준공 전하의 계자는 지난번의 장의에서도 상주가 되셔서 태도가 훌륭하셨는데 나이는 금년 6세이시나 매우 침착하고 영리하신 성격이시다. 매우 활발하신 성격으로 어떠한 때에는 형님 되시는 공자보다도 더욱 기운이 차게 보인다.”라고 평하였다


이우는 1915년에 경성 유치원에 입학하여 1918년 3월 28일에 졸업했다. 그때 일본에서 일시 귀국한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이 1918년 1월 25일에 경성유치원을 방문하였을 때 이우는 영친왕 앞에서 ‘매화와 꾀꼬리’라는 창가를 불렀다.


이때의 이우에 대해 경성유치원의 보모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는 “어떻게 영민하신지 벌써 일본어도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의 반 정도는 아시고 창가도 매우 잘하신다. 재주와 위엄, 풍채 모두 나무랄 수 없는 훌륭한 귀공자이시다. 기운 차고 침착하시며 영리하시고 남에게는 결코 지지 아니하시려 하는 굳센 성미이시지만 어린아이들을 매우 잘 돌보아주신다.”라고 기억했다.


1918%B3%E2_%C0%CC%BF%EC.jpg?type=w2 1918년 당시의 사진이다. 왼쪽에 서 있는 이가 영친왕이고 오른쪽의 아이가 이우이다.

(고종황제는 세 명의 아들을 남겼다. 첫째 아들은 명성황후와의 사이에 태어난 순종황제이고, 그다음이 의친왕, 그리고 세 번째 아들이 영친왕이다. 순종황제는 후사를 두지 못했고, 서열상으로는 의친왕이 그 뒤를 이어야 하지만 당시 정치적인 문제로 영친왕을 황태자로 결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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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F8%C1%BE%C8%B2%C1%A6.jpg?type=w2 순종 황제



%C0%C7%C4%A3%BF%D5_%C0%CC%B0%AD.jpg?type=w2 이우의 생부, 의친왕 이강



%BF%B5%C4%A3%BF%D5_%C0%CC%C0%BA.jpg?type=w2 영친왕 이은



%C0%CC%C1%D8%BF%EB.jpg?type=w2 이우의 양부, 이준용


이우공의 양부인 이준용 그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가졌기에 고종과 순종을 대체할 재목이라고 평가받았으나, 끝내 좌절을 겪어야만 했고, 만년에는 일제에 일부 협력을 하여, 2006년 친일 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갑자기 승하하자, 이우는 150일 동안 복상을 했고 그해 4월에 경성종로공립심상고등소학교에 압학했다. 고종의 승하 이후 주목을 받았던 사람은 의친왕이었다. 순종황제는 후사가 없었고, 황태자였던 영친왕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세간의 관심은 의친왕에게 모여졌다.

의친왕에게는 큰 아들 이건이 있었으나 유약한 성격이었고 일제에 순종적이었다. 이우는 일제에 반항적이었고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기 때문에 의친왕이 총애했으며 일제는 이런 그를 두고 "호랑이 같은 조선 황족의 핵심"이라고까지 칭했다고 한다. 또한 운현궁의 가정교사 가네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 두려워했다.”라고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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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가 다녔던 경성종로공립심상고등소학교, 일반적으로 종로소학교라고 불렸다. 1922년 봄에 종로소학교에서 심상과 3학년 과정을 마치고 그해 7월 5일에 유학의 명분으로 일본으로 보내져 학습원 초등과 4학년으로 편입했다.

1921%B3%E2_%C0%CC%BF%EC.jpg?type=w2 1921년 이우



1921%B3%E2_%BD%C2%B8%B6_%BF%AC%BD%C0.jpg?type=w2 1921년 운현궁에서 승마연습을 하던 때의 모습



1922%B3%E2_%C0%CC%BF%EC.jpg?type=w2 1922년 일본 유학길에 오를 때의 모습



Prince_Yi_Wu_02.jpg 1922년 이우

1926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하자, 1926년 4월 26일에 장례식을 집행하는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임명되었고, 그해 5월 10일에 순종의 능을 천릉할 때에도 종척 집사로 임명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대한제국 황실을 규율하기 위하여 1926년 12월 1일에 일본 황실령 제17호로 제정·공포되었던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 제59조에 따르면 왕·왕세자·왕세손·공은 만 18세에 달한 후 육군이나 해군 무관으로 임관하여야 하는 의무가 강제되었다. 그래서 학습원을 졸업한 1926년에 육군 유년학교에 30기생으로 입교하여 1929년 3월에 졸업하였다. 이어서 이우는 영친왕과 그의 형 이건이 그랬던 것처럼 4월에 일본 육군 사관학교 제45기생으로 입학했다.


1990년에 사망한 이우의 형 이건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군인이 되는 일은 이미 정해진 일이었습니다. 메이지 천왕의 뜻에 따라 일본 황족이 군인이 되는 것처럼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군인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저항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다른 일을 찾으려는 노력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건은 1955년에 일본으로 귀화를 했다. 그의 일본 이름은 모모야마 겐이치)


Japan_Central_Military_Preparatory_School.jpg?type=w2 이우가 다녔던 일본 육군 유년학교

*주 -육군유년학교( 陸軍幼年学校)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사 학교이다. 청소년 시기부터 육군 장교 후보 양성을 준비하기 위한 학교로, 육군사관학교의 전 단계이다. 프로이센 왕국의 군사 교육 제도를 본떠 만들었다.


800px-Rikugun_Shikan_Gakko_1907.jpg?type=w2 일본 육군 사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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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이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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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의 육군사관학교 동기들은 이우에 대해 학교나 일상생활에서 늘 일본어 대신, 한국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학교와 황실에서 계속 지적을 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우는 계속 한국어를 사용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의 동기생 아사카 타카하코(1912-1994)는 이우를 이렇게 기억했다.


"이우 군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화가 나면 조선어를 사용했습니다. 글쓰기에도 능했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일본노래도 했고 조선 노래도 불렀습니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저는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우는 1931년 3월 18일에 육군사관학교 예과를 졸업하고 약 6개월간 도쿄 야포병 제1 연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근무하다가 그해 10월 본과에 입교했다. 1933년 7월 11일에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10월 25일에 포병 소위로 임관하면서 근위포병 제1 연대에 배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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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e_Yi_Wu_circa_1932.jpg?type=w2 1932년 이우



1938년에 일본 육군대학 제54기생으로 입교하여 1941년 7월에 졸업하는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이우를 포함하여 영친왕 이은, 이우의 형 이건, 홍사익뿐이었다.


이에 앞서 1930년대에 들어서부터 이우는 일제와 계속 마찰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바로 결혼 문제 때문이었다. 이우는 일본인과 결혼을 강요하던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친왕과 박영효(朴泳孝)의 지원을 받아 박영효의 둘째 서자 박일서(朴日緖)의 딸 박찬주(朴贊珠1914-1995)와 1935년에 결혼했다.


일본 궁내성과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 황실의 자녀를 일본 황족 또는 화족의 자녀와 결혼시켜 혼인 관계를 형성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왕공가궤범》 제119조에 따르면 왕공족의 혼인은 일본 천황의 칙허를 통해서만 인정되었다. 영친왕, 덕혜옹주, 이건의 혼인과 같이 일본인과의 정략결혼이 추진되어 궁내성에서는 백작 야나기사와 야스쯔구(柳沢保承)의 딸을 이우의 배우자로 내정해 놓고 있었다. 야나기사와는 이우의 이복형 이건의 장인 해군 대좌 마쓰다이라 아키라(松平胖)와 동서가 되었으며, 이우의 숙부 영친왕의 장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王)와도 동서 사이였다. 모두 옛 사가 번의 다이묘였던 후작 나베시마 나오히로(鍋島直大)의 사위들로 궁내성의 계획대로 된다면 왕공족 남자 전부는 나베시마의 외손주 사위가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의친왕은 아들이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이우도 조선인과의 결혼을 고집하였다. 일본인 신부를 거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에 의친왕과 긴밀한 관계였던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가 이우의 배우자로 물망에 오르고 혼약이 이루어졌다. 이우의 양모 광산 김 씨는 박영효가 내무대신으로 재임하던 1895년에 법무협판 김학우(金鶴羽) 암살과 모반 혐의로 양부 이준용을 죽이려 하였기 때문에 박찬주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우는 박찬주에게 사주단자와 약혼반지를 보낸 후에 당시 이왕직 장관 한창수(韓昌洙)에게는 혼약이 성립되었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왕공족의 사무를 관장하던 이왕직은 박찬주와의 혼약이 천황의 칙허 없이 진행되었다고 반발하며 일본 황족과 결혼하라는 압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이우의 조선인과 결혼하겠다는 저항과 박영효의 일본 정계를 상대로 벌인 로비의 결과로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은 이우와 박찬주의 혼약을 인정하게 된다. 박영효는 일단 혼약이 철회된 것처럼 해놓고, 직접 도쿄에 가서 귀족원칙선 의원이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라는 직책과 인맥을 활용하여 추밀원, 귀족원, 궁내성에 공작을 벌였다. 결국, 1934년 7월 11일에 궁내성 종질료(宗秩寮)에서 약혼을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1935년 4월 17일에 혼인을 인정하는 쇼와 일왕의 칙허가 발표되었다. 1935년 5월 3일에 이우와 박찬주는 도쿄 별저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같은 해 6월 28일에 경성으로 돌아와 종묘와 능원을 참배하고 조선호텔과 운현궁에서 피로연을 열었다.


당시 세간에는 박영효가 이우의 결혼식을 성사시키기 위해 50만 원의 돈을 뇌물로 뿌렸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 이 결혼은 어렵게 이루어졌고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과 결혼하지 않은 유일한 황손이 바로 이우였다.

406px-Yi_Wu__Park_Chan-ju.jpg?type=w2 1935년 결혼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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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7월 2일 홍유릉을 참배하는 이우와 박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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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매일신보에 보도된 이우와 박찬주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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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7월 3일 조선호텔의 피로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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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직후에 촬영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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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결혼식 직후에 촬영된 박찬주 여사의 사진.


이 결혼에 대해 이우의 일곱 살 아래 동생 이해원(李海瑗 1919-2020) 여사는 생전에 이렇게 증언했다.


"운현궁 오빠와 상대가 기타시 다카와라고 있어요 기타시 다카와라고 황족이지요 거기 딸이 있어요 근데 애네는 황족 사진이 있습니다. 황족 사진첩이 있어요 일 년에 한 번씩 이렇게 다와요.. 거기에 나왔는데 이쁘더라고.. 근데 개 하고 말했는데 싫다고 그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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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주와 결혼한 이우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1942년에 중국 산시성 태원으로 전출되어 북지나 방면군 제1사령부 정보 참모로 3년간 근무하였다. 태원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태항산에서 저항했던 팔로군과 조선인 의용대가 있었는데 조선인 의용대를 지원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현재 사료적 근거나 정황 증거는 완벽하게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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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이우는 공식적인 행사나 모임에 전혀 참여하지 않아 가택 연금 상태라는 소문도 돌았다. 평소 반일적인 그의 기질과 그의 아버지 의친왕의 항일 행적등을 비추어 볼 때 그는 요주의 인물이었으며 주요 감시 대상이기도 했다. 결국 일제는 그를 히로시마로 전출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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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6월의 필리핀 순시 때의 모습


일본의 군인이 된 순간부터, 아니 나라가 패망한 이후부터 그에게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히로시마행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히로시마로의 전출을 원하지 않았다. 1944년 이후의 전황을 보았을 때 머지않아 일본이 패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이우는 조선에 머물기를 원했다.


1945년 6월 10일에 중좌로 진급한 이우에게 본토 결전을 위하여 일본으로 전출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이우는 일본으로 가지 않고 운현궁에 머물며 전역을 신청하기도 하고 조선에 배속시켜 달라고 청원을 넣기도 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하였다. 운현궁에 머무는 한 달 동안 윤원선(尹源善), 김을한(金乙漢) 등을 만나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이며 한국이 독립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런데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 해방 후의 뒷수습이 큰 문제다”라고 걱정하면서 이제 군복을 벗고 운현궁에 있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향하게 된 그는 1945년 7월 16일에 일본 도쿄에서 영친왕 부부를 만나고, 며칠 후에 부임지인 히로시마로 이동하였다.


당시 이우와의 만남에 대해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그런 중에서 7월 16일에는 기쁜 일이 있었다. 중국 북경에서 근무하고 있던 이우공이 일본으로 무사히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걱정을 했는데 건강하게 살아 돌아오다니 우리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이우공은 서울을 들러서 오는 길이라며 가족과 친족들이 다 무사함을 전해주었다.


.. 도쿄는 계속 폭격이 있을 것입니다. 전쟁은 곧 끝납니다. 작은 아버님(영친왕)과 어머님께선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곧 다시 뵙겠습니다. 이 늠름한 젊은 장교는 며칠 후 히로시마의 부대에 근무하기 위해 도쿄를 떠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우공은 서울에 들렀을 때 히로시마에 가기 싫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한 달을 서울에 머물렀다고 한다. 처음에는 서울 용산에도 군대가 있으니 그곳에 근무하도록 해달라고 했다가 그것이 거절되자 꾀병을 앓아 출발을 연기하다가 더 핑계를 댈 수 없게 되자 아들에게 설사약을 먹여 공자가 병중이라는 이유로 며칠을 더 머물렀다고 한다. 이 한 달 동안 윤원선(윤보선 전 대통령의 동생), 김을한(언론인)씨 등을 몰래 만나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이며 한국이 독립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중략... 이우공은 그때 무슨 예감이 있어 그렇게 히로시마에 가기 싫어했던 것일까?"


이방자 여사의 또 다른 회고에 의하면....


"이우 공은 평소 성격이 활달하면서 명석한 데다 일본에 저항적이어서 일본인들에게 말썽꾸러기였다. 일본 것에 대하여 병적이라고 할 만큼 싫어하였고, 특히 일본 음식을 아주 싫어하였다. 일본의 간섭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반발하는 성격이었다.”라고 이야기했다.


앞서 언급한 김을한은 이우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이건 공은 온화한 분이라 문제가 없지만, 이우 공은 측근의 말을 도무지 듣지 않아서 곤란하다.”라는 이왕직 회계과장 사토의 말을 언급하며, 일본인 사무관이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은 이우가 그만큼 영특하다는 반증이므로 만만찮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토록 가기 싫었던 히로시마로 떠난 이우는 히로시마의 일본군 제2총군 참모본부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운명의 8월 6일 아침.


이우는 자동차가 있었지만 말을 타고 출근하겠다며 기마 헌병 2명의 호위를 받으며 숙소를 나섰다. 이 날은 그의 첫 출근일이었다. 그가 출근을 한 이후, 원폭이 터졌고, 그 뒤 점심때가 넘을 때까지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이우가 나타나지 않자 참모본부는 비상이 걸렸다.


당시 제2총군 사령부 참모였던 이모토 쿠마오는 생전에 이렇게 증언했다.


"전하가 발견되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부관인 요시나리가 아주 야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색대를 만들어서 평소에 다니던 길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는데 찾을 수가 없었지요.. 마침내 전하를 찾자마자 여기로 데려왔다고 그랬어요"


이우를 찾기 위한 온갖 노력이 계속되고 있을 때 이우가 혼가와 강 아이오이다리 밑에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헌병하사였던 모리타 다카시는 그때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는 당한 사람이 아니면 모릅니다. 저는 이우공을 찾기 위해 서쪽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데 다리 중앙 부분까지 오니까 서쪽에서 한 중학생이 외치더군요 헌병님 군인아저씨! 여기에 츠네미츠 참모가 넘어져 있습니다. 이런 애기였습니다. 모시고 본부로 오니까 당시 우리 헌병에게도 그 통지가 와 있더군요.. 제2 총군 쪽에 황족인 이우공 각하가 계신다고요."


발견 당시까지만 해도 의식불명 상태였지만 이우는 살아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피폭을 당한 곳은 폭심지로부터 겨우 710m밖에 떨어지지 않은 후쿠야 백화점 근처였다. 그는 즉각 히로시마시 근처의 니노시마 해군병원으로 옮겨졌다. 해군병원으로 옮겨진 뒤 이우는 얼마 가지 않아 의식을 회복했다. 그를 진찰한 해군 군의관은 외상이 없다고 진단했고 이우 본인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라고 기뻐했다. 하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극심한 피폭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그를 치료하던 군의관은 그에게 해열제와 진통제를 계속 투여했지만 그의 상태는 악화되기만 했고 결국 8월 7일 새벽 사망하고 만다. 조선황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이우는 그렇게 어이없이 생명을 잃고 말았다.


이우의 유해는 방부제 처리가 된 다음 8월 8일에 비행기로 서울의 운현궁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우의 유해가 운구된 날, 또 하나의 죽음이 있었다. 바로 그의 부관 요시나리 히로무(吉成弘)가 자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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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나리는 이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부관이었다. 그는 이우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필을 했었는데 하필 그날 아침 이우와 함께 하지 못했었고 그로 인해 자책으로 권총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그날 아침 요시나리의 엉덩에 부스럼이 생겨 이우는 요시나리를 자동차로 태워 보냈고 자신은 말을 타고 출근을 한 것이다. 만일 요시나리와 함께 자동차로 출근했더라면 이우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우의 죽음은 바로 경성(서울)으로 전해졌고 그의 유해는 운현궁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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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의 죽음을 전한 매일신보의 8월 9일 자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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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법도에 따라 그의 장례식은 9일 뒤인 8월 15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장소는 경성운동장(지금의 동대문 운동장)이었다.


그때의 일을 동생 이해원여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얼음관에 넣어서 가져왔더라고요 그때 신체 다 보라고 하더라고요 가서 들여다보니까 손은 하나 이렇게 꼬부라지고 눈이 시퍼렇게 아니 검었더라고요 눈알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도 검었더라고요 결혼반지 저거 했으니까 그거 빼더라고요. 찬주 그분 결혼 빼가지고 같이 넣더라고요 그리고 봉했어요"


그리고.. 8월 15일 그의 장례식이 있던 그날, 일본 일왕의 항복방송이 나왔다. 그렇게 일본은 패망하고 식민지 조선은 해방이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넷,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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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만 더 살아 있었다면 그는 조국의 해방을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우의 죽음에 대해 이방자 여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돼 십여만 명이 죽었다는 소식에 이어 이우공의 죽음이 전해지자 전하와 나는 전쟁 중 최대의 충격을 받았다. 조선왕족 중 가장 늠름하고 당당해서 전하가 제일 믿고 기대하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에 희생되어야 하는가? 운명의 신은 이다지도 철저히 조선왕실에 비극을 마련해 놓아야 했는가 전하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해서 차마 옆에서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

Prince_YungNasimoto_Masako.jpg?type=w2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여사



일제는 1945년 8월 13일에 그를 대좌로 진급 추서했다. 그의 장례식은 8월 15일 12시 12시에 경성운동장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방송 때문에 연기되어 오후 3시에 거행되었다. 그의 장례는 조선군사령부 주관의 육군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조선 신궁의 궁사가 제주(祭主)로 참여하였다. 장례식에는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제17방면군 사령관 고쓰키 요시오(上月良夫), 천황 대리로서 궁내부 식부 차장 호죠 토시 나가(坊城俊良)가 참석하였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창현리에 안장되었다. 이우의 묘는 개별적으로 조성되어 있던 운현궁가의 묘를 한 곳에 모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무덤인 흥원(興園) 주변에 현대식 가족 납골묘의 형태로 다시 조성하면서 개장되었고, 묘에 있던 비석을 비롯한 석물들은 2004년에 서울역사박물관 기증되어 박물관 경내에 전시되고 있다. 사망한 이후에 황족의 예에 따라 흥영 군(興永君)에 추봉 되었으나 정식 시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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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 광복 이후 제정된 《구황실재산법》에 따라 황실 재산이 국유화되지만 운현궁은 이우의 부인 박찬주가 흥선대원군의 사유 재산이었음을 호소하여 국유화에서 제외되었다. 이우의 장남 이청의 소유로 변경된 뒤에 운현궁의 대지는 분할되어 덕성학원등에 매각되었고, 1993년에 운현궁이 서울특별시에 매각되었다.


일본은 1959년 10월 17일에 이우의 위패를 가족의 동의 없이 군국주의의 상징적 장소인 야스쿠니 신사에 강제로 합사 하는 영치봉안제를 거행하였다. 최근에서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조선인 강제 합사에 대한 야스쿠니 신사의 공식적인 의견은 “사망 시점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지킨 신으로 모시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합사 자체가 부당한 일이지만 야스쿠니 신사의 논리를 따른다면 사망 당시에 일본 황족과 동등한 지위였던 이우는 일본 황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 신사에 합사 되었어야 하였지만 일반 군인으로 합사 되었다.


1970년 4월 10일에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히로시마 현 본부에 의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당시 히로시마시의 반대로 위령비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건립이 어려워지자 이우가 피폭을 당한 후 발견된 장소였던 히로시마 혼가와의 아이오이 교 근처에 세워졌다.


위령비의 전면에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와 함께 ‘이우공 전하 외 2만여 영위’라는 문구가 적혀있고, 뒷면의 비문에는 ‘나라 잃은 왕손이기에 남모를 설움과 고난이 한층 더 했던 이우공 전하를 비롯하여 … 이우공 전하 외 무고한 동포 2만여 위 …’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800px-Last_place_of_Yi_Wu.jpg?type=w2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 이우가 발견되었던 혼가와 아이오이다리 부근.

이 위령비는 당시 이효상국회의장의 글을 받아 서울대 한갑수 교수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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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이 위령비는 1999년에야 히로시마 평화 공원 내로 옮겨질 수 있었는데 그에 대한 오마이 뉴스의 기사를 보면..


"위령비를 둘러싼 논란이 시작된 것은 1988년이다. 평화공원 밖에 비가 있는 것은 “한국인·조선인에 대한 차별”이라는 운동이 시작됐다. 히로시마시, 민단, ‘재일본조선인 총 연합회’(총련) 3자의 협의 아래 남북통일 위령비를 공원 내에 만들자는 쪽으로 의견이 좁혀졌다. 일을 가로막은 것은 분단된 조선반도의 현실이었다. 민단 쪽에서 ‘한국’이라는 명칭을 고수했고, 총련 쪽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민단과 총련, 더 넓은 남북통일 위령비 건립 사업은 수포로 돌아갔다.


1990년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위령비를 평화공원 안으로 옮겨오자는 운동은 실마리를 찾는다.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한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 비를 공원 안으로 옮겨오는 데 동의했다. 비가 평화공원 안으로 안착한 것은 1999년 7월 21일이었고, 첫 위령제는 그해 8월 5일에 열렸다. 또 하나의 피폭지인 나가사키에는 일본인이 만든 ‘조선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


지금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가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희생에 대한 기록과 사진은 요란스럽게 펼쳐놓고 있다.


그들은 정말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이 논란은 매년 8월이 되면 반복이 되는데, 그에 대한 느낌은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가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위령비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유구한 역사를 두고 우리 배달민족은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고 다른 겨레를 해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먼저 깨고 남보다 잘 살던 자랑스러운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크고 강한 나라들 틈에 끼어서 그들의 침노로 말미암아 사직이 위태로워 지고 민생이 불안에 휩쓸렸던 허다했습니다. 왕손과 고관대작의 자제를 독노화(禿魯花)로 보내야 했던 한스러운 이야기와 수많은 미모의 처녀를 공녀로 바쳐야 했던 억울한 이야기가 그러했고 우리의 임금이 적왕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송파 수항단(受降壇)의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오천 년 기나긴 민족사를 통해서 여기 모신 이만 여 위의 생령이 겪으신 것 같은 슬프고 원통한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배달민족이 나라 없는 슬픔을 뼈저리게 맛본 것이 바로 태평양 전쟁을 통해서였고 그중에서도 고비를 이룬 것이 바로 원폭투하의 비극이었습니다. 나라 잃은 왕손이기에 남모를 설움과 고난이 한층 더 했던 이우 공 전하를 비롯하여 명분 없는 싸움에 명분 없이 죽음의 마당으로 향해야 동포 군인들 괭이와 낫을 들고 마소같이 부림을 받던 동포 징용자들 유리 언걸 삶을 찾아 여기로 모여든 동포 남녀들 아마도 도합 오만은 되리라고 믿어지는 가여운 군상들 그들이 광도(廣島) 시민과 함께 전쟁 막바지의 가쁜 숨을 몰아쉬던 1945년 8월 6일 인류 최대의 참극이 여기에 벌어졌습니다. 휘황한 섬광이 번쩍하는 순간 아비규환 모든 것은 수라장으로 화하고 말았습니다. 일본 국민에 주어진 이 거대한 파양마(破壤魔)는 한국민(韓國民)이라고 해서 조금도 관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참극으로 귀한 생명을 잃으신 이우 공 전하 외에 무재한 동포 이만 여 위 그 일이 있은지 이십유오년(二十有五年)에 아직 혼령의 쉬실 곳도 마련하지 못 한 채 임염(荏苒) 오늘이 되었으니 두려워 몸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이제 뜻있는 동포들 일동과 장태희 건립 위원장 외 위원들을 비롯한 일본인 유지 몇 사람의 정성의 결정(結晶)으로 뒤늦게나마 여기에 의지(依支) 없는 혼령의 쉬실 곳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비옵건대 이만 여 위의 혼령께서는 모든 원한과 증오를 다 잊으시고 길이 평안히 쉬시옵소서. 앞으로 모든 이러한 비극의 씨를 뿌리는 자도 이를 받는 자도 없게 하시고 침략의 죄를 범하는 자도 침략의 슬픔을 받는 자도 없게 하시며 먼 나라와 가까운 이웃이 길이길이 서로 도우며 화친하게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평화를 사랑하고 침략과 살육을 미워하는 모든 인류는 여기 모신 혼령의 희생을 마음 깊이 슬퍼하며 영원하신 명복을 충심(衷心)으로 빌 것입니다. 또 한국민의 뜨거운 사랑이 언제까지나 여러 영위(靈位)와 함께 할 것입니다."


위령비의 유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히로시마에는 약 10만 명의 한국인이 군인, 군속, 징용공, 동원학도, 일반시민으로서 살고 있었다. 1945년 8월 6일의 원폭투하로 인해 2만여 명의 한국인이 순식간에 소중한 목숨을 빼앗겼다. 히로시마시민 20만 희생자수의 1할에 달하는 한국인 희생자수는 묵과할 수 없는 숫자이다.


폭사한 이 희생자는 공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 영혼은 오랫동안 구중을 헤매고 있던 차 1970년 4월 10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히로시마현본부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강요당한 영혼들을 편히 잠들게 하고, 원폭의 참사를 두 번 다시 되풀이 않기를 희구하면서 평화의 땅 히로시마의 일각에 이 비를 건립했다.

고향산천을 그리면서 이국땅에서 폭사한 혼령들을 위로함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까지도 이해해 받지 못하고 있는 한국인 피폭자의 현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하루라도 빨리 양심 있는 지원이 실현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한국인 희생자위령제는 매년 8월 5일 이 장소에서 거행되고 있다.


재일한국청년상공인연합회 및 유지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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