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시마에 도착하다.
본격적인 가고시마 여행에 앞서 이 여행기가 항상 그렇듯이 가고시마가 어떤 곳인지부터 살펴보고 가자. 메이지 유신의 두 주역, 사쓰마와 죠슈, 그 양대세력 중의 하나였던 사쓰마번薩摩藩이 바로 오늘날의 가고시마현鹿児島県이다.
이 가고시마라는 이름은 현재의 기리시마시에 있는 가고시마 신궁(鹿兒島神宮)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야생 사슴이 많이 살아서 (野生の 鹿 の子(鹿児)), 혹은 어부를 뜻하는 가고 (水夫(かこ))가 많이 살아서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어느 것이 정설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본 본토, 정확하게 따지자면 규슈의 서남단에 위치 한 가고시마현은 총면적 9,188㎢로 일본 전국에서 10번째로 넓은 현이며, 2,643㎞의 긴 해안선을 보유하고 있으며 남북으로는 약 600㎞에 달한다.
기후는 온대에서 아열대에 걸쳐 있으며, 평균기온이 높아 온난한 편이다. 그래서 오키나와와 더불어 한국 프로야구팀의 전지훈련장소가 되기도 했다. 동중국해와 태평양을 끼고 있는 만큼 다네가시마, 야쿠시마, 아마 미군도를 비롯, 섬이 많으며, 이 섬들의 합계면적이 가고시마현 총면적의 약 27%를 차지한다. 그리고 섬 인구 및 섬 면적으로는 일본 내에서 1위이다. (다네가시마는 초속 5센티미터 2화 코스모나우토의 배경이 되는 섬이고, 야쿠시마는 원령공주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가고시마현의 지도를 보면 왼쪽 돌출되어 나와 있는 것이 사쓰마반도薩摩半島, 오른쪽이 오스미 반도大隅半島, 이고 두 반도 사이에 있는 원형의 큰 섬이 바로 지금도 분화활동을 하고 있는 사쿠라지마이다. 본토는 기리시마 산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시라스 대지의 지질로 이루어져 배수가 잘 되는 편이고 화산 활동으로 인한 온천의 수가 많다. 현재 온천의 수는 약 2,730개 정도로 오이타현에 이어서 일본에서 2위이다.
이 지역은 4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야마토 정권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앞편에서 잠깐 언급한 하야토족의 근거지가 바로 이 가고시마현이다. 야마토 정권이 일본을 통일한 때는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반)
8세기에 들어서는 사츠마국(현재의 가고시마현 서부), 오스미국(현재의 가고시마현 동부, 오스미제도)이 설치되어 율령국가로 편입되었고 12세기 후반이 되면서 미나모토노요리모토(源賴朝)가 가마쿠라막부를 세울 때 시마즈가문이 그 당시부터 서서히 세력을 키워 16세기 후반에는 지금의 가고시마현에 해당되는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가고시마는 일본 남쪽의 현관에 해당되기 때문에 예부터 중국, 한국, 류큐 등을 비롯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국가들과의 교역이 활발했지만 16세기에 서양의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1543년에 중국배에 탔던 포르투갈인이 타네가시마에 표착하여 일본에 처음으로 조총을 전하고, 1549년에는 선교사인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가고시마에 와서 일본에 기독교를 소개했다. 일본의 쇄국체제가 붕괴되던 19세기 후반에는, 가고시마는 영주의 지도로 적극적으로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결국은 에도막부를 무너뜨리는 중심 세력이 되었다.
이 정도가 대략적으로 가고시마현을 소개하는 것이 될 텐데, 이제 현청 소재지인 가고시마시는 어떤 곳일까?
가고시마시의 인구는 약 58만 명(2025년 5월 1일 기준)으로 옛 90만 석 사츠마국의 성시로 번성했던 곳이다.
(시로야마에서 바라본 가고시마시의 전경)
동양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가고시마시는 후쿠오카에서 남쪽으로 280km, 구마모토시에서는 남으로 5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가고시마 현의 사쓰마반도 북동쪽 및 사쿠라지마 섬 전체를 차지한다. 가고시마 만을 바라보는 가고시마와 사쿠라지마 섬 등에 연간 약 9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관광 도시이기도 하다.
사쿠라지마편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시역 중심부에서 (직선거리 약 4km)에 위치하는 사쿠라지마 섬은 1980~90년대에 비하면 꽤 잠잠해졌지만, 2000년 이후에도 아직 활발한 화산활동을 계속하고 있어 시 중심부에도 자주 화산재가 내린다. 활화산을 포함하면서 이만큼의 인구 규모를 가지는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분화 중인 사쿠라지마)
(1914년 대분화 당시의 사진)
도시로서의 가고시마의 시작은 시마즈가문의 6대 당주 시마즈 우지히사(島津 氏久 1328-1387)가 도후쿠지 성(가고시마 시 시미즈 정)을 거성으로 했을 때(1340년 경)로 보인다. 1549년 프란치스코 자비에르가 현재의 시역에 해당되는 장소(기온노스 정)에 상륙해 일본 최초의 크리스트교 전래지가 된다.
19세기 중반에 유럽의 기계 문명을 도입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28대 당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하에서 집성관(현·쇼코 집성관) 사업으로서 반사로나 용광로가 만들어져 일본의 근대 공업화의 발상지가 되었고 메이지 유신 때의 정치가, 관료, 군인 등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해 근대 일본 건설의 주춧돌이 된다. 중심 시가지는 사쓰에이 전쟁에 의한 포격, 세이난 전쟁에 의한 전화, 태평양전쟁의 공습으로 괴멸적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조카마치로서의 모습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
1871년 8월 29일, 폐번치현에 의해 현청 소재지가 되었다. 1889년 가고시마 시가 성립하였고 1901년 6월 10일에 가고시마혼센이 개통하였다. 1914년 1월 12일에 사쿠라지마 섬이 대분화하고 동시에 진도 7의 지진이 발생해 58명이 사망하였다.
이 가고시마는 오늘날 일본이 사용하는 일장기(1853년), 일본 최초의 군함의 건조(1854년), 일본 최초의 가스등(1857년),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1865년)의 발상지로서 기록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6월 17일의 미군기의 공습으로 시가지의 90% 이상이 소멸되는 피해를 겪기도 했다.
이렇게 가고시마현과 가고시마시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봤다. 여기서 시마즈라는 가문의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영화 노량에서 백윤식 배우가 맡은 역할이 바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1535-1619)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시마즈 가문의 17대 당주로서 임진왜란에 참전하기도 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 군으로 참전했다. 그가 속한 서 군의 패배로 한때 위기에 몰렸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3년간의 협상을 통해 자신의 영지를 지켰다. 임진왜란 당시 가장 많은 조선의 도공(陶工)들을 끌고 간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특히 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린다. 당시 일본에서는 차를 즐기는 다도가 융성해 전투 이후 포상으로 다기]를 내려주기도 하는 등 좋은 다기에 대한 수요는 높았으나, 이에 비해서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낙후돼서 조선의 막사발조차 일본에서 예술품 대우를 받을 정도였다. 그런 조선 도자기는 다이묘들에게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시마즈는 일본으로 귀환하면서 전라도 남원성에서 박평의(朴平意)·심당길(沈當吉)을 비롯한 80여 명의 조선 도공들을 납치하여 끌고 갔으며, 심당길의 후손들은 일본 3대 도자기이자 세계 도자기의 명품으로 이름난 사쓰마 도자기를 굽는 심수관가(家)라고 불린다. 박평의 역시 도공으로서 심당길의 친구였으며 같이 일본에 끌려가 대대손손 도자기 산업에 전념하여 번창하였으나 1886년 12대손 박수승(朴壽勝)부터 도고(東鄕) 가문의 족보를 구매하여 개성 하였는데 그의 아들이 바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제58·63대 외무대신을 역임하였던 도고 시게노리(한국명 : 박무덕(朴茂德))이다.
명나라의 허의후에게서 배운 의술뿐 아니라 다도(茶道)와 학문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문화인이었고, 가신을 소중히 여겨 아랫사람이라고 하대하지 않고 때로는 병졸과 함께 불을 쬐기도 했다. 당시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겨울철이면 대부분의 병사들이 얼어 죽었는데, 시마즈 군에서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으며, 사후에 순사를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13명의 가신이 그를 위해 순사 하였다고 한다.
집에 새로 아이가 태어난 가신이 있으면, 아이가 생후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부모와 함께 저택으로 불러서 아이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아이는 보물이다"라며 그 탄생을 축하하기도 했다. 또 원복한 사람의 첫 알현 자리에서 그 사람의 아버지가 공훈이 있는 사람이면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겠지?", 공훈이 없는 사람에게도 "자네 아버지는 운이 안 좋아 공훈을 세우지 못했지만, 자네는 아버지보다 우수해 보이니 공훈을 세울 수 있을 게야."라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을 걸어 격려하였다.
《간양록》에서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무용이 다른 무장들 못지않으며, 당시 사람들이 "요시히로가 제 실력을 발휘한다면 일본 하나 집어삼키는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라고 평가하였다고 적고 있다. 또한 게이초 4년(1599년)에 시마즈 집안의 영지 8만 석의 가신 이쥬인(伊集院) 집안이 일으킨 쇼나이의 난에서 반란군이 장악한 12성 가운데 겨우 3 성만을 함락시킬 정도로 고전하는 와중에도 원병을 보내주겠다는 가토 기요마사 등의 제안에 "내 부하가 반기를 들었으니 마땅히 내 손으로 없애야지, 어찌 남의 구원병을 번거롭게 해서야 되겠는가?"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전쟁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굉장한 애처가로 가정적이고 인정미가 넘치는 성격이었으며, 조선에 주둔하는 와중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3년이나 조선의 진중에서 고생한 것도 시마즈의 집이나 아이들을 위해서였소. 하지만 만약 내가 죽으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눈물이 멈추지 않소. 당신에게는 많은 아이가 있으니까, 내가 죽더라도 아이들을 위해서도 강하게 살아주기 바라오. 그렇게 해주는 것이 불경 1만 부를 읊어 주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요."라고 적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