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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횡단 철도 여행- 센간엔

시마즈 가문의 별장, 센간엔

by 늘 담담하게


시로야마에서 내려온 버스는 가고시마 시내의 해안선을 따라 달려갔다. 가고시마시 북동쪽에 있는 센간엔仙巌園이 다음 여행지였다.

센간엔은 1658년에 시마즈 가문의 19대 가주인 시마즈 미츠히사島津 光久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이후 그의 후계자들이 계속 개축을 해왔다. 차경기법을 이용하여 사쿠라지마를 산으로 그리고 가고시마만을 연못으로 보이게 하는 센간엔은 잘 가꾸어진 정원과 아름다운 풍경이 뛰어나 1958년에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2015년 7월에는 구 집성관 반사로터旧集成館反射炉跡가 '메이지 시기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제철·제강, 조선, 석탄산업'의 구성자산의 하나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에도시대 말기에는 번주 시마즈 나리아카라가 이 부지의 일부를 이용하여 유럽식 제철소와 유리공장을 건설하는 등의 현대화사업(집성관 사업集成館事業)을 일으켰다. 1857년에는 원내의 석등롱에 가스관을 연결하여 점화시켜 등불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일본의 가스등의 발상지로 꼽히고 있다. 주차장에 버스가 서면 안내원이 사람들을 이끌고 정문을 통해 원내로 입장하게 되는데 워낙 명승지다 보니 수학여행, 일반 여행자들이 뒤섞여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정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보이는 신사가 하나 있는데 바로 쓰루가네 신사鶴嶺神社이다.



쓰루가네 신사

쓰루가네 신사는 시마즈 가문의 역대 당주와 그 가족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 중에 가메주 공주(1571-1630)라는 16대 당주 시마즈 요시히사의 딸이 있는데 그 딸이 매우 미인인 데다 마음씨가 착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신사에는 여성들이 참배하고 가메주처럼 몸과 마음이 이쁜 미인이 되기를 기원한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정문을 통해 원내로 들어서면 약간 경사진 잔디밭이 있는데 그곳에는 반사로(용광로)의 자취와 철제 150 파운포가 전시되어 있다.

이 대포는 가고시마만 연안에 배치되어 있던 포를 다시 복원한 것으로 약 68KG의 철제 원형 포탄을 약 3KM까지 날려 보냈다고 한다.

이 사진의 장소가 옛날 반사로(용광로)가 있던 자리의 흔적이다. 대포를 주조하기 위해 철을 녹인 서양식 시설의 흔적인 것이다. 현재는 기초 부분만 남아 있다.

예전에는 이 기초 위에 약 20M 높이의 화로가 서 있었다고 한다. 사쓰마번 사람들은 네덜란드인들이 쓴 책을 기초로 해서 자신들의 기술을 더해 1857년에 이 반사로 건물을 완성시켰다. (이 시기에 조선은 어땠을까? 1857년은 조선의 철종이 통치하던 시기였고 세도 정치의 폐허로 국가의 기강이 무너져 내리던 시기였다.)


처음 반사로 건물이 서 있던 모습을 그린 상상도.


축소 모형


이곳을 지나서 직진하다 보면 센간엔의 원래 정문이 나온다.


1895년에 만들어진 이 문의 재료는 인근 산에서 자라는 녹나무였다..


바깥쪽에서 본 정문이다. 이 정문 앞은 도로이고 그 옆이 바로 가고시마만이다. 이 정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ㄱ 자 모양으로 꺾어 들어가는데 거기에 다시 문이 있다. 그 문의 이름은 주석문.


주석문

주석문은 19세기말까지 정문으로 사용된 것으로 사쓰마번에서는 양질의 주석이 채굴되었고 그 주석으로 만든 문이다. 27대 번주 시마즈 나리오키가 확장하면서 이곳이 중문으로 바뀌었다. 일본에는 주홍색의 문은 지위가 높은 사람만이 이용할 수 있는데 이 문은 가주와 적남(큰 아들)만이 이용했다고 한다. 이 문을 지나면 저택(고텐御殿)이 나온다.



이 앞에 정원이 있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사쿠라지마의 풍경이 좋았다. 이곳은 원래 영주의 별장이었다. 그런데 폐번치현으로 가고시마성을 정부에 반환하게 된 이후 시마즈 가문의 가주와 가족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옛 건물의 1/3 정도이다.


(이 저택의 옛 사진)


(사진의 오른쪽에 나와 있는 것이 정자望獄楼인데, 시마즈 가문의 마지막 번주인 시마즈 타다요시는 이 정자에서 사쿠라지마를 보았다고 한다. 니콜라이 2세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도 이곳에서 시마즈 타다요시와 면담을 했다고 한다. )

좌우 등에 새겨진 문장이 바로 시마즈 가문의 문장이다.

저택 쪽에서 본 사쿠라지마의 풍경이다. 이 센간엔의 자리는 사쿠라지마를 보기에 가장 적당한 위치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웅대한 사쿠라지마와 긴코만을 각각 쓰키야마(築山, 연못에 있는 작은 섬)와 연못으로 사용한 것이고 그런 장대한 스케일의 차경(借景)이 아름다워, 천하의 명원(名園)이라 한 것이다.


센간엔을 여행하고 돌아온 뒤 가장 기억에 남은 풍경이 바로 이 저택에서 바라본 사쿠라지마이다.


(옛날의 석등룡, 이 안에 불을 켜서 주변을 밝혔다고 한다.)


센간엔의 저택내부는 유료로 신청자에 한해서 돌아볼 수 있다. 이곳에는 조금 특이한 곳이 있는데 바로 고양이 사당이다.

일본에는 별의별 신사나 사당이 많이 있지만, 세상에 고양이 사당이라니... 이 사당이 만들어진 사연은 이렇다. 임진왜란 당시의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히토요시의 명으로 조선으로 출전했는데 그때 데리고 간 7마리의 고양이 중에서 살아 돌아온 2마리의 고양이를 위해 사당을 만들었다. 당시 그가 고양이를 데리고 간 것은 고양이 눈을 시계 대신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고양이 사당을 보고 난 후 간 곳은 쇼코 슈세이칸 尚古集成館,

이곳은 1865년에 준공된 현존하는 일본의 가장 오래된 기계공장이다. 1923년부터 시마즈 가문의 근대화 사업을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다.


이쯤에서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심혈을 기울였던 집성관 사업集成館事業(일본어 슈세이칸)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가자. 집성관 사업을 정의한다면 사쓰마번주 시마즈 나리아카라에 의해 시작된 일본 최초의 서양식 산업군의 총칭을 말한다.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집성관 사업을 시작하기까지의 시대 배경으로 그 당시 중국에서 아편전쟁 (1840 ~ 1842 년) 등으로 영국 프랑스 미국등의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 각지에서 식민지를 늘려가는 것을 들 수 있다.

아편 전쟁은 위원이 저술한 해국도지 (海國圖志1843 년 초판) 등의 서적이 일본에 수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그 실정은 꽤 정확하게 알려져 있었다. 동양 제일의 강국이었던 청나라가 패배하고 식민지화되어 가는 것을 본 일본인은 상당한 충격을 함께 다음 표적이 일본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뭔가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그 아편 전쟁 전후에서 당시 사쓰마의 지배하에 있던 류큐(오키나와)에 서양 함선들이 종종 내항하고 있었고 그 상황들은 일일이 류큐에서 사쓰마에 보고되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영주에 오른 1851 년에는 더욱 잦은 서양 배들이 류큐에 내항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하에 1851년 사쓰마 번주에 취임한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번주에 취임하자마자 집성관 사업 계획에 착수하여 현재의 가고시마시 이소 지구를 중심으로 아시아 최초의 현대 서양식 공장 군의 건설에 착수했다.


*해국도지

《해국도지》(海國圖志)는 중국 청대 후기의 학자인 위원(魏源)의 저서이다. 1842년에 50권본으로서 간행되었다가 1847년에 60권본, 1852년에 100권본으로 확충되었다. 본서(本書)는 19세기 전반까지의 세계 정세를 논술한 지리서(地理書)로서 임칙서(林則徐)가 광둥 재임중에 편찬한 세계지리 역서(譯書)인 <사주지(四洲志)>를 근본으로 하여 내외(內外)의 지리자료를 참조하면서 내용을 증보한 것이다. 내용은 도(圖)와 지(志)로 나누어 꾸며졌는데, 아편전쟁의 경험에 의거한 해방론(海防論)과 세계의 지리, 각국의 연혁을 기술하고 있다. 위원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민족적 위기를 자각하고, 서양의 장점을 취하여 서양에 대항하는 도(道)를 강구하기 위하여 본서를 만든 것이다. 본서는 중국인의 세계 인식에 획기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872년경, 집성관 사업 관련 건물들의 사진)


특히 철강, 조선, 방적에 주력하여 대포 제조에서 서양식 범선 건조, 무기 탄약에서 식품 제조, 가스등의 실험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이 당시 사가번 등 일본 각지에서 근대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집성관 사업은 군사력의 증대뿐만 아니라, 사회기반 시설의 정비등 폭넓은 분야까지 확산되고 있는 점이 다른 번과 분명하게 구별되었다. 1858 년 나리아키라가 죽은 뒤에도, 재정 문제 등으로 집성관 사업은 일시 축소되었으나 1863 년 사쓰에이 전쟁에서 영국 해군과 싸운 사쓰마는 집성관 사업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집성관 기계 공장 (현재의 쇼코 슈세이칸), 일본 최초의 방직 공장 인 가고시마 방적공장을 건설하는 등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고, 당시 일본은 나가사키를 통해서 오래전부터 유입되었던 난학등을 통해 어느 정도 근대화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스스로 자각을 하고 근대화를 위해 동분 서주 할 때, 우리는 청나라가 서구 열강들에 의해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도 스스로 개혁하지 못하고 문을 잠그기에만 급급했으니...


일본 최초의 방직공장이었던 가고시마 방적공장鹿児島紡績所은 JR센간엔역 부근에 있었다.

가고시마 방적공장이 있던 자리
가고시마 방적소 옛 사진


가고시마 방적소는 사카이(현재의 오사카부)에 세워진 사카이 방적소, 에도 막부에 의해 세워진 가시마방적소(현재의 도쿄 기타구)와 함께 3대 방적소라고 불렀다.


1865년 영국으로의 유학생을 인솔한 고다이 도모야쓰(五代友厚1836-1885)와 니이로 나카조(新納 中三 1832-1889), 프랫·브라더스사로부터 방적 기계를 구입과, 동시에 공장 건설이나 기사의 파견도 의뢰했다. 방적기계는 개면기·소면기, 추정방기·역직기 등 150여 대가 있었다. 그 밖에 증기기관도 도입, 이듬해 3월에는 4명의 영국인 기사들이 가고시마에 들어가 공장 건설이 시작되었다.


1867년에는, 공장장 존·테트로가 기계와 함께 도착, 수행한 2명의 기사도 더해져 총 7명의 외국인 직원들이 있었고 같은 해 5월에 일본 최초의 서양식 기계 방적소가 준공되었다. 원료인 면화는 주로 간사이 방면에서 사들여 직공 200여 명이 하루 10시간의 작업으로 180㎏을 생산했다고 한다. 1897년에 폐쇄되었다.


그리고 이 영국인들이 머물렀던 숙소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정식명칭은 구 가고시마 방적소기술사관 旧鹿児島紡績所技師館(통칭 이진칸異人館)


이 건물은 1867년에 건설되었다. 1959년 2월 25일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62년 6월 21일에 국가 중요 문화재(건조물)로 지정되었다]. 2015년에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제철·제강, 조선, 석탄산업'의 구성자산 중 하나인 구 집성관을 구성하는 시설로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에도시대 말기인 1867년에 건설된 이진칸은 목조 2층 건물, 지붕은 방형 구조, 기와집, 벽은 흰색 페인트칠이었다. 1881년에 가고시마 학교가 이 건물을 이용해 개설되었지만, 교통이 불편해서 1882년에 가고시마성 혼마루 터에 이축되어 교실용으로 일부 개조되었다. 그러다 1884년에 가고시마 학교가 가고시마 현립 중학교 조사관으로 바뀐 뒤에는 교사의 일부로서 이용되었지만, 1936년 조사관 교사 개축 시에, 기념 건조물로서 보존하기 위해, 현재 위치로 재이축되었다.


당초, 긴자거리 설계등에도 관계된 토마스·워틀스의 설계라고 보이고 있었지만, 워틀스는 1866년부터 아마미 오시마에서 제당 공장의 건설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는 방적소에 관계한 영국인이 설계·지도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서양 건축 수입 초기에 일본 각지에 건설된 유사한 건축물 중 현존하는 2층 주거지로는 최초기의 것으로, 에도막부 말기 서양식 건축을 보여주는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 근처에 스타벅스 센간엔점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돌아볼 것은 JR센간엔 역 JR仙巌園駅이다.( 이 역은 2025년 3월 15일에 개업했다)


이제 마지막 여행지는 사쿠라지마이다. 사쿠라지마 여행 이야기는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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