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여행(데루쿠니 진자, 시로야마 전망대)
내가 예약해 놓은 관광버스는 가고시마의 주요 여행지를 3시간 50분 동안 돌아볼 수 있다. 관광버스의 이름은 가고시마 사쿠라지마 정기 관광버스. 이 버스가 가고시마역을 출발해서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은 데루쿠니진자 照国神社.
데루쿠니 진자는 1862년에 창건된 신사로서 이곳에 모셔진 신은 이 지역의 영주였던 시마즈 가문의 28대 가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島津 斉彬 (1809-1858)이다. 특정인물을 신으로 삼아 숭배하는 것이 드물지 않은 일본이지만 이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이 신사의 주신이 된 것은 그가 사쓰마번을 일약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올려놓은 것 때문이었다. 기울어져가는 에도 막부체제하에서 그나마 부국강병의 눈을 뜬 몇몇 안 되는 지도자로서, 사쓰마에서는 명군으로 그를 칭송했다.
그는 1809년 3월 14일, 시마즈 나리오키(島津斉興 1791-1859)의 장남으로 사쓰마 번주의 에도 저택에서 태어났다. 현명한 부인으로 유명했던 어머니 가네코(周子)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나리아키라를 비롯한 3명의 아이를 유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양육하였다. 또, 증조부이자 제8대 번주인 시마즈 시게히데의 영향을 받아 난학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주위의 눈에는 서양문물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여 얄궂게도 사쓰마번의 내분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사진, 그는 에도 막부 말기의 영주로는 드물게 사진을 찍은 사람이었다.)
나리아키라가 영주가 되면 시게히데처럼 사치를 하여 번재정이 더욱 곤궁하게 될 것이 염려된 나리오키는 나리아키라가 40살이 넘도록 후계자로 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가신(家臣)의 우두머리였던 즈쇼 히로사토(調所広郷 1776-1849)와 나리오키의 측실인 오유라 등은 오유라가 낳은 나리아키라의 이복동생 시마즈 히사미쓰( 島津久光 1817-1887)의 옹립을 도모했다. 이에 대해 나리아키라의 측근들은 히사미쓰와 유라의 암살계획을 세웠지만, 정보가 사전에 누설되어 주모자 13명은 할복자살, 그들과 연좌된 약 50명이 낙향 및 근신에 처해졌고, 그중 4명이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시게히데의 아들이자 후쿠오카번의 번주로 있던 구로다 나가히로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구로다 나가히로는 나리아키라에게는 삼촌뻘이었지만 두 살 차이로 형제처럼 지냈다고 한다.)
나가히로의 중재로 나리아키라와 친분이 있던 막부의 로주(老中)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 1819-1957 빈고 후쿠야마번주), 우와지마번주인 다테 무네나리(伊達 宗城 1818-1892), 후쿠이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松平春嶽 1828-1890) 등이 사태수습에 노력했다. 이렇게 하여 1851년 2월에 나리오키가 물러나고, 나리아키라가 제11대 번주로 취임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마즈 가문의 내분을 오유라 소동으로 부르고 있다.
영주로 취임하자마자, 번의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식 조선(造船), 반사로 및 용광로의 건설, 지뢰, 수뢰, 유리, 가스등의 제조를 비롯한 서양식 공업을 일으켰다. 도사번(고치현)) 출신으로 미국으로 표류했다가 귀국한 나카하마 만지로(존 만지로)를 불러들여 1854년에 서양식 군함인 쇼헤이마루(昇平丸)를 건조해 도쿠가와막부에 헌상하였다. 그때 일장기를 일본배에 걸어야 한다고 막부에 제안하여 그 해에 막부에서 이를 정식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일장기는 일본의 국기가 된다. 범선용 범포를 자급하기 위해 면포 방직 사업을 일으켰다. 또, 하급무사 출신의 의사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를 등용하여 그들을 통해 막부의 정치에 관여하기도 한다.
나리아키라는 마쓰다이라 요시나가(松平春嶽후쿠이 번주), 다테 무네나리(伊達 宗城 우와지마 번주), 야마노우치 요도(山内容堂 1827-1872 토사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 斉昭 1800-1860 미토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쓰(徳川慶勝 1824-1883 오와리 번주) 등과 함께 영주가 되기 전부터 교류를 하고 있었다. 나리아키라는 그들과 함께 막부의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로주인 아베 마사히로에게 막부에 의한 정치개혁을 호소했다. 특히 미국의 페리 함대가 나타난 이후의 난국을 타개하려면 공무합체의 길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1857년 아베 마사히로의 사망 이후 1858년에 다이로가 된 이이 나오스케와 쇼군의 후계자 문제로 정면대립하였다. 제1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병약하고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무네나리 외 4명의 영주와 前 미토번주인 도쿠가와 나리아키 등은 차기 쇼군에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옹립하기 위해 덴쇼인을 고노에(近衛) 가문의 양녀로 보낸 후 이에사다의 정실부인으로 시집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이 나오스케는 이에 대항하여 기슈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내세웠고 다이로의 지위를 이용해 강권을 발동해 반대파를 탄압한 안세이 대옥 사건을 일으킨다. 그 결과,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로 등극하여 나리아키라 등은 후계자 다툼에서 패배하게 된다
나리아키라는 이에모치의 승계에 항의하기 위해 병사 5,000명와 함께 상경(교토로 가는 것을 상경이라고 한다)할 예정이었으나 1858년 7월 8일, 가고시마성에서 출병을 위한 연병 관람 중 발병하여, 7월 16일에 사망했다. 향년 50세.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적자가 모두 요절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아버지인 나리오키나 동생 히사미쓰 , 또는 그들의 지지자들의 음모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공식 사인은 콜레라로 알려졌지만 전후 상황은 매우 미심쩍었다.) 나리아키라가 죽은 후 그의 유언에 따라 히사미쓰의 장남인 시마즈 다다요시가 뒤를 이었다.(그의 뒤를 이을 적자가 없어서 동생의 아들에게 가주를 계승하게 한 것인데, 그는 자신의 정적이었던 동생이나 히사미쓰의 어머니인 유라를 매우 싫어했지만 번주가 된 이후 그들을 제거하지는 않았다. 동생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기에 나중에 후계자를 물려준 것이다.)
(1857년에 촬영된 사진, 그는 직접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의 사진 기술은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도 꽤 괜찮은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사망했을 때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유신지사들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서 뒤이어 함께 죽으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는 이화학을 기반으로 한 공업이 서양 열강의 힘의 기본임을 일찍이 간파해서 그 스스로 알파벳을 먼저 배울 정도로 시대에 앞서 나갔고 군주는 애증을 기반으로 해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와 같은 자신만의 통치 철학을 가진 이였다. 그가 없었다면 사쓰마는 막부 말기의 강력한 힘을 가진 유항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사이고 다카모리와 같은 메이지 유신을 만든 이들도 없었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보고 부국강병의 길을 닦은 그와 같은 인물이 당시 조선에게도 있었다면 오죽 좋았을까... 데루쿠니 신사를 지나치는 한국인 여행자의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데루쿠니신사에서 출발한 관광버스가 두 번째로 스쳐 지나치는 곳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郷 隆盛의 동상이다.
(1927년 사이고 다카모리 사후 5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이 계획되었고 1937년에 완성된 동상, 육군 대장의 복장을 하고 있는 이 사이고의 동상은 전체 높이 14M에 이른다.)
가고시마의 역사와 여행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이가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이다. 앞서 구마모토성과 세이난 전쟁 편에서 전쟁의 주역인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해서는 가고시마 여행 때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이제 그때가 되었다. 또 역사이야기냐고 하겠지만, 사이고 다카모리를 빼고 가고시마를 이야기할 수가 없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년-1877년))는 일본의 사쓰마번의 하급무사 사이고 기치베 다카모리西郷吉兵衛隆盛 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고키치(小吉 )이며, 통칭은 기치노스케(吉之介), 젠베에(善兵衛 ), 기치노스케(吉之助 ) 순으로 바뀌었다. 호는 난슈(南洲)이다. 원래 이름은 다카나가(隆永 )였으나, 나중에 다케오(武雄 ), 다카모리로 바꾸었다. 다카모리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과 같은데, 이는 왕정복고의 식전에서 위계를 수여받을 때, 친구인 요시이 도모자네가 실수로 아버지의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이후 아버지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 성인이 될 무렵에 그의 신장은 179 cm였으며, 몸무게는 90 kg였다고 한다.
( 흔히 사이고 다카모리를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 이것은 에두와드르 키요소네(메이지 시대에 일본에서 활약한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판화이다. 오쿠보 도시미치 등 동시대의 유신 지사들의 사진은 남아 있지만 사이고의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사진이 없다고 메이지 일왕에게 말했을 정도. 그가 죽은 뒤 사이고의 초상화는 다수 그려졌지만 모든 초상화와 동상의 기반이 된 것은 바로 위의 판화이다. 비교적 사이고와 비슷하다고 여겨지던 친동생 사이고 쓰구미치의 얼굴 상반부에 사촌동생 오야마 이와오의 얼굴 아래쪽을 합성해서 그리고 친척들의 고증을 받아 완성시킨 것이다. 키요소네 자신은 사이고와 전혀 안면이 없었지만 당시 키요소네의 상사였던 도쿠노 료스케를 통해 많은 사쓰마번 사람들과 알게 되었으며 도쿠노 료스케의 사위였던 사이고 쓰구미치와도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비교적 만족스러운 초상화가 그려진 것 같다고 전해진다.)
(동생 사이고 쓰구미치의 사진, 그는 형과 달리 세이난 전쟁에 가담하지 않고 당시 메이지 정부에 머물렀다.)
(사촌 동생 이와오 오야마의 사진, 체형이 사이고와 비슷했다고 한다. 그 역시 세이난전쟁에서 정부군 측에 남았다.)
어린 시절 친구들의 싸움을 말리다 칼에 의해 오른쪽 팔꿈치를 다쳐 완전히 오른쪽 팔꿈치를 굽힐 수가 없게 된 사이고는 이때부터 무술을 포기하고 학문에 빠져 들었다. 이후 16세가 되던 해 사이고는 사쓰마번의 군방 서역조에 임명된다. 사쓰마 번에서는, 무사집안의 아들이 어느 정도의 연령에 이르면, 가계의 도움이 되도록 작은 역할을 맡게 되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무사 인구가 많은 사쓰마 번만이 가능한 관습이었다. 사이고는 군방서역조(즉 농정을 주관하는 관공서의 서기관 보조)라고 하는 역할에 임명되었다. 군방은 연공(세)의 징수 등도 행하고 있었으므로, 모든 곳에 출장을 가야만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농정에 대한 여러 지식을 배우게 된다. 그 5년 후 앞서 시마즈 나리아키라 편에서 설명했던 오유라 사건이 일어나고 1851년에 사쓰마번의 번주에 오른 시마즈 나리아키라에게 나라의 근본은 농민이라고 하는 애농사상에 근거한 건의서를 제출하게 된다. 이 일로 인해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눈에 뜨인 사이고는 영주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게 된다. 그렇게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손발이 되어 활동하던 중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는 주군의 죽음에 슬퍼하며 자결을 하려 할 정도였다.
40세가 되기 전, 사이고는 교토 주둔 사쓰마번군대의 사령관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 후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1866년 철천지 원수 지간이었던 죠슈번과 연합을 결성하여 1867년 11월 8일 쇼군을 무력으로 물러나게 했다. 사이고는 이 사건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타카요시와 함께 메이지 유신을 일으켰다. 이후 에도 막부와 전쟁이 일어나자, 사이고는 참모 총장으로 자신에게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 완수해 냈다.
1871년에 메이지 신정부로 들어가서 10,000명의 군인들을 포함한 일왕 정부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여러 번들에서 봉건 제도를 폐지시켰다. 정부의 힘을 강화하는데, 사이고는 다조칸(국가 회의)에 임명되어 키도 타카요시와 함께 새로운 프로그램을 세우는 책임을 함께 맡았다. 그러다 메이지 6년의 정변, 즉 당시 조선에 대한 정한론때문에 반대론자들과 치열한 논의 끝에 패배한 후 사쓰마로 낙향하게 된다. 사실 지금까지도 이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쟁이 있는데 일부에는 이런 주장이 있다.
당시 메이지 정부 내에서 대조선 정책에 있어 거의 유일한, 그리고 매우 온건한 외교주의자였다는 것. 오히려 '우리가 외무성 하급 관리를 보내는 등 대조선 외교를 성의 없이 처리했는데 저쪽이 하급 지방관으로 대응하고 우리의 요구를 수용 안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 조선의 요구대로 외교관에게 전통 복장을 입히고 조선에 공손히 응대하여 그들의 진중한 반응을 끌어내자. 내가 사절로 가서 조선에서 죽임을 당하면 쳐들어가도 늦지 않다.'라고 발언했고 그나마 마지막 문장은 공식발언도 아닌 편지에서 외교론을 거부하는 정한론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타협책이었다.
낙향 이후 그는 농사를 짓거나 낚시와 사냥을 하러 가는 등 세상과 단절된 삶을 이어가지만 당시의 시대는 메이지 정부의 조치에 대한 반발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은아의 빠른 변화가 조금은 의외였지만 말이다.
가고시마로 돌아온 몇 달 후, 사이고는 군사학과 육체적 훈련을 중요시하는 자신의 개인적 학교를 열었다. 그곳이 바로 세이난 전쟁의 주역이 된 사학 교이다. 전국에서 몰려온 무사들이 그의 아래에서 공부하였으며, 1877년에 학생수는 20,000명으로 늘었다. 사이고에게는 이것이 공직에서 일할 젊은이들을 훈련시키는 단순한 학교였으나, 도쿄에 있는 신정부에게는 큰 근심거리가 되고 말았다. 모든 번들의 행정이 번지사들의 통치로부터 사이고의 후원자들의 손으로 들어갈 위협 때문이었다. 1876년 일본의 다른 지역들에서 사무라이들의 반란들이 시작되었을 때, 가고시마는 그 논란의 중심지라는 위협이 느껴졌다. 1877년 1월 29일 사이고의 제자들이 가고시마의 군수공장과 해군 기지를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세이난 전쟁의 시작이었다.
1877년 9월 24일 오전 4시 시로야마를 포위한 정부군이 총공격을 퍼붓자, 사이고는 휘하의 부하들과 함께 싸웠으나 부상을 입고 말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면서 옷깃을 바로 여민 다음 동쪽을 향해 절을 올리고 난 뒤 할복하였고, 그의 부하 벳부 신스케는 그의 목을 치게 된다. 시대의 풍운아였고 강직한 성품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그렇게 사무라이로서의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내가 탄 관광버스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을 지나서 시로야마 전망대로 올라섰다. 이곳의 높이는 107M로서 결코 높은 산은 아니지만, 가고시마 시내에서 가고시마만과 사꾸라지마를 바라보는 좋은 위치에 있고, 야경 포인트로 인기 있는 장소가 바로 시로야마이다.
(시로야마 전망대에서 바라본 가고시마 시가지, 그리고 사쿠라지마)
오래전 사이고와 사쓰마번의 병사들이 정부군과 치열하게 싸운 그 현장은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들이 들러보는 장소가 되었다. 세월의 무상함이라고 해야 하나..
사이고가 죽음을 맞이한 곳에 세워진 비석.
한국은 강추위가 몰아닥치고 있었지만 가고시마는 선선한 날씨였고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는 이는 나뿐이었다. 뭔가 좀 창피했다고 할까.. 이제 관광버스는 다음 여행지인 센간엔을 향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죽지 않았다는 설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뜻하지 않은 해프닝이 벌어졌다. 소위 오쓰 사건이라는 것이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워낙 인기가 많아서 실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생존설이 러일전쟁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그중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 훗날 니콜라이 2세가 되는 니콜라이 황태자가 일본에 방문할 때 전국적으로 퍼진 <사이고 생환설>이었는데, 쿠로다 키요타카가 유럽 각지를 순방할 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키리노 토시아키를 만나 훗날 일본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결의했고, 실제로는 사이고와 키리노, 무라타 벳푸 같은 세이난 전쟁의 수뇌가 시로야마산에서 탈출해 러시아 군함을 타고 도주해서 살아 있었으며 니콜라이 황태자와 함께 일본으로 귀환하여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일본 전역에서는 난리가 났고 환호와 의심이 뒤범벅이 된 가운데 신문사들은 검증도 안된 소문을 사실인 양 마구 남발하여 혼란을 가중시켰다. 사이고의 출신지인 가고시마와 규슈에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환영무드가 조성될 정도였다.. 여기에 메이지 일왕이 시중에게 "만일 사이고가 돌아온다면 메이지 10년의 전투(서남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들의 훈장을 박탈하고 맞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미확인 소문도 있어 경관인 츠다 산조가 이를 두려워하여 당시 방일 중인 니콜라이 황태자를 칼로 베는 황태자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좀 더 자세하세 알아보면.. 1891년, 니콜라이 황태자는 시베리아 철도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러시아 해군 함대를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던 길에 일본에 들리게 된다. 나가사키와 가고시마를 들른 다음 고베에 상륙, 사건 당시에는 교토를 향해 가고 있었으며 요코하마와 도쿄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당시 서구화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약소국이었던 일본은 서구 열강 대국 러시아의 황태자를 극진한 예우로 환영했다. 황족인 아리스가와미야 다케히토 친왕(有栖川宮威仁親王)이 방일 접대원을 맡아 황태자를 환대하였다. 니콜라이 황태자의 일정은 비교적 느긋하게 일본 관광을 즐기는 것이었는데, 교토에서는 시기가 아닌대도 황태자 환영 행사로서 교토의 명물인 큰 대(大) 자 태우기를 벌였다. 5월 11일 오후 비와호를 구경하는 일정을 마친 니콜라이 황태자는 역시 일본에 와 있던 그리스 왕자 요르요스(요르요스 1세의 삼남이자 니콜라이 황태자의 외사촌), 다케히토 친왕과 함께 인력거를 타고 오쓰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당시 나가사키를 여행 중이던 니콜라이 황태자의 사진)
(오쓰 사건이 벌어진 곳에 남아 있는 표지석)
그때 일행이 통과하는 길에서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쓰다 산조가 갑자기 경찰도를 뽑아 들어서는 니콜라이에게 중상을 입혔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인력거에서 뛰어내려 골목으로 숨었는데, 쓰다는 니콜라이를 쫓아가 칼로 베려고 했다. 게오르기우스 왕자는 대나무 지팡이를 휘둘러 쓰다의 등을 때리고, 니콜라이의 인력거를 끌던 인력거꾼 무카이하다 지사부로(向畑治三郞)는 쓰다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게오르기우스 왕자의 인력거꾼 기타가이치 이치타로(北賀市市太郞)는 쓰다가 떨어뜨린 샤벨을 휘둘러 쓰다의 목에 상처를 입혔다.
결국 쓰다는 경비 중이던 다른 순사에게 붙잡혔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오른쪽 머리에 9cm 정도의 상처를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케히토 친왕은 현장에 있었지만 구경꾼들이 몰려들어서 가까이 갈 수 없었고, 쓰다가 잡힌 뒤에야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케히토 친왕은 이 사건이 자기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는 중대한 외교 문제라고 파악하여 메이지 일왕에게 전보를 보내 일왕이 직접 교토로 와서 러시아 측에 성의를 보여줄 것을 부탁했다. 메이지 일왕은 이 사건이 중대한 문제라고 파악하였고, 바로 다음날인 5월 12일 아침에 기차를 타고 저녁에 교토에 도착, 13일 니콜라이 황태자가 머물고 있던 토키와 호텔에서 황태자를 문병했다. 메이지 덴노는 세 명의 친왕과 함께 니콜라이를 고베까지 배웅했으며, 고베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군함에까지 문병을 갔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일정을 중지하여 도쿄 방문은 하지 않고 함대를 이끌고 5월 20일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일본은 이전부터 러시아와 영토 문제로 대립을 하고 있었으며, 시베리아 철도도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상징하는 것이라 일본 내에서는 반발이 있었다. 쓰다는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이전부터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또 이 무렵에 세이난 전쟁에서 전사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사실은 죽지 않고 러시아에 망명해 있다가 돌아온다는 헛소문이 퍼져 있었는데, 세이난 전쟁에서 훈장을 수여받은 쓰다는 사이고가 돌아오면 자신의 훈장이 박탈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은 대단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 사건에 분노한 러시아가 자신들을 공격해서 식민지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그야말로 '공러증(恐露病)' 상태가 되었다. 실제로 당시 일본은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이 당시 근대화가 덜 된 일본의 국력은 러시아와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명분으로 전쟁이 터진다면 절망적이었다. 일본인들은 민·관을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러시아에 사죄와 배상을 했는데, 당시 빌고 또 빌어대는 비참한 모습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학교는 휴교를 하고 신사와 절, 교회에서는 황태자의 회복을 비는 기도를 했다. 황태자 앞으로 보내진 문안 전보는 1만 통을 넘었고, 야마가타현 모가미 군 가네야마 촌(山形縣 最上郡 金山村, 현재의 가네야마 정)에서는 '쓰다'와 '산조'라는 이름을 금지하기로 결의했다. 5월 20일에는 하타케야마 유코(畠山勇子)라는 여성이 교토에 가서 면도기로 목숨을 끊어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사죄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물론 일본 언론에서는 이 여성을 매우 찬양했다.
오쓰 사건의 재판은 또 다른 논쟁거리가 되었다. 당시 일본은 '덴노나 황족에게 위해를 입힌 범죄'를 대역죄로 규정하여 사형까지 가능하게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일본의 황족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외국의 황족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즉 일반 살인죄를 적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경우 니콜라이 황태자가 사망했다면 사형이 가능하지만 부상만 입은 상황이라 사형 선고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일본 정부는 쓰다를 사형에 처하고 싶었지만 대심원(大審院) 원장 고지마 고레가타(兒島惟謙)는 이에 반발하였다. 쓰다를 사형시키라는 압력이 내려왔지만 고지마는 근대적인 독립된 사법 체계를 열망했고, 만약 서구열강이 일본의 법제도의 미숙함을 트집 잡아 불평등 조약을 계속 강요하고 경멸한다면 서양 열강의 경멸을 영원히 떨쳐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고지마의 고집에 의해 사법부의 독립은 지켜지고 압력에 굴하지 않는 판결을 내린다. 쓰다는 사건 발생 16일 뒤인 5월 27일 살인미수로 무기징역의 형벌을 받았다. 러시아 정부는 황태자가 살해당하지 않은 이상 무기징역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는지 별다른 반발 없이 사건을 마무리했다.
쓰다는 면직되고, 훈장을 박탈당했으며 홋카이도에 있는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9월 29일 급성 폐렴으로 감옥에서 병사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일찍 사망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가혹하게 대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음모론도 존재하지만 증거는 없다. 러시아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무기징역으로도 만족했고, 따라서 일본이 우려하고 있던 배상금 요구나 무력 보복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애당초 누가 봐도 특정 개인이 비상식적인 사고방식으로 저지른 범죄였을 뿐 일본 정부와 연관성이 전혀 없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 있어서 앞서의 미 대사에 대한 습격 사건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나 미국의 인식과도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이것을 필사적으로 종북이라는 연결고리를 만들려는 일부 언론과 정치세력이 있어서 문제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일본의 신속한 사건 해결에 비교적 우호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로 대했으며, 니콜라이 2세의 일기에서 이후로도 일본에 혐오감을 품는 일은 없었다고 확인되고 있다. 이때 쓰다를 제압하는데 도움을 줬던 무카이하다와 기타가이치는 러시아로부터 상금을 받아한 살림 차렸으나 그리 행복하게 살지는 못했다. 당초에는 큰 사건을 막은 영웅으로 여겨졌으나,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상황이 뒤집혀서 '러시아를 도운 매국노'로 취급받아 주변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고지마와 그의 사법권 독립에 관한 신념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쓰다 사건을 통해 일본이 전근대적인 체계에서 벗어나 계속 근대적이며 독립적인 사법체계를 가지게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일본 사법부는 정부와 군부의 미움을 받게 되고, 이후 이홍장 저격사건의 범인에 대해서는 일왕의 이름을 내세운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사형을 선고, 집행하게 된다.
(사진 왼쪽이 기타가이치 이치로 오른쪽이 무카이하다 지사부로, 이들은 인력거 복장 그대로 18일밤에 러시아 군함으로 초청되었고 여기에서 세인트 앤 훈장을 니콜라이 황태자에게서 받았다. 또한 상금으로 당시 금액 2500엔(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1000만엔 전후)을 받았다. 무카이하다는 러일전쟁이후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고 1928년에 죽었다. 기타가이치는 고향인 이시카와현에 논밭을 구입하여 지주가 되었고 공부를 해서 군의회의 의원까지 지냈다. 1914년에 죽었다. )
여담으로 당시 니콜라이 2세가 입고 있던 티셔츠는 훗날 그의 신원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줬다. 러시아 혁명이후 피살되어 암매장되었다가 발굴된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의 신원을 확인하는데 도움이 됐던 것이다. 현재도 니콜라이 2세가 당시 입었던 티셔츠가 있는데 당시 입은 상처에서 나온 혈흔이 남아 있다. 여기서 추출한 유전자와 유해의 유전자를 대조했더니 일치했던 것이다. 거기다 로마노프 왕조의 방계 인물들과 대조해도 일치했으니 이 유해들은 니콜라이 2세의 가족으로 밝혀졌다.
오늘 이야기는 이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