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번째 이야기
사유리의 독백은 계속된다.
사유리-난 왜 이런 곳에 있지? 누가, 제발 누구든 히로키 "
꿈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세계에 갇혀 있는 사유리,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구해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말하는데, 여기서 그녀가 부른 이름은 히로키였다. 왜 히로키였을까? 본편 애니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몇 번을 봐도, 히로키와 사유리, 두 사람 사이에 연정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사유리가 사라지기 직전 여름날에 낡은 폐역사에서 떨어지는 사유리의 손을 잡은 사람이 바로 히로키이다.
그래서였을까? 깊은 꿈의 세계에 홀로 남은 사유리는 애타게 히로키를 찾는다.
같은 시간, 도쿄의 고등학교 교실, 히로키가 꿈을 꾸다가 눈을 뜬다. 그리고 말한다.
히로키 -또 그 꿈이야"
히로키의 독백이 다시 이어진다.
히로키 -우린 결국 벨라실러를 날리지 못했다."
도쿄에서 새로 사귄 듯한 여학생과 함께 걷고 있는 히로키...
히로키- 3년 전. 사유리가 우리한테 한마디도 없이 사라진 게 나름대로 충격이었는 데다 그걸 이유로 비행기 제작을 그만둔 자신들에게도 화가 났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타쿠야는 아오모리의 어느 고교에 진학했고 난 도쿄의 고등학교로 왔다. 도쿄에 오면 유니온의 탑이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어쩌다 날이 맑을 때면 도쿄에서도 탑은 어렴풋이 보였다. 그런 날은 난 하루 종일 어두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 이 부분에서 타쿠야와 히로키가 비행기 제작을 그만둔 이유가 간략하게 설명되고 있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유니온의 탑을 향한 비행기 제작을 그만둘 정도로 사유리가 중요한 존재였을까 싶지만, 어찌 되었던 그 여름날 세 사람이 함께 했던 그 시절이 어느 날 갑자기 깨어져 버리고 난 뒤의 상실감 때문에 비행기 제작을 그만두고 단단한 우정의 관계였던 히로키와 타쿠야는 각자 다른 길로 멀어져 버렸다.
다음 장면, 화물 기차가 지나가는 건널목에서 두 사람이 서 있다. 화물열차에는 탱크등이 실려 있다.
자 이 장면도 이미 본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별의 목소리에서 이와 같은 구도의 장면이 나왔다. 별의 목소리에서도 언급했지만 신카이 마코토의 초기 3부작에서는 철도, 열차등이 빠짐없이 등장하며,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장면에서 여학생이 말한다.
"이 전차들 후지사와네 고향에 간댔지?"
"어.. 그래"
"있지. 이런 거 간단하게 탈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아오모리까지 밀항해 볼래?"
일본에서 상대의 호칭을 부를 때 보통은 성을 부른다. 친한 친구이거나 연인 정도 되었을 때만 이름을 부르는데 사유리는 앞서 히로키라고 불렀고 이 여학생은 후지사와라고 불렀다. 호칭으로 볼 때 히로키를 대하는 사유리가 더 가까운 사이로 설명된다.
새들이 날아가는 장면이 이어진다. 새들이 날아가는 장면 또한 초기 3부작에 자주 등장한다.
앞서 사유리가 텅 빈 교실 문을 열었을 때도 저렇게 새들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이것을 잘 기억해 두자. 또 해설할 때가 있을 거니까...
히로키 -"어쩌다 가끔. 오카베 아저씨한테서 근황을 알리는 편지가 왔다. 답장은 한 번도 보낸 적이 없다"
자, 앞 장면에서 오카베가 그렇게 말했다.
"또 한 녀석, 걱정되는 녀석이 도쿄에 와 있을 텐데.. 연락이 안돼. 그 애들 둘이서 비행기를 만들고 있었어"
바로 신경 쓰이는 자식이 히로키였고, 가끔씩 오카베는 히로키에게 편지를 보냈다.
히로키 -방에 도착해 문을 닫을 때마다 마치 온몸의 뼈가 살을 찢는 듯한 격심한 통증을 느낀다.
히로키-내가 언제부터 이런 고통을 떠안게 된 것일까?
고독한 히로키의 모습이 절절하게 독백으로 묘사된다.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온다.
-다음은 긴장이 고조되는 국제 관계에 관한 뉴스입니다. 19일 열린 국제연합 안전 보장 기자회에서 미국은 유니온에게 에조에 있는 당 시설에 대한 국제연합 사찰을 허가토록 재차 요구했습니다.
히로키 -홀로 맞는 밤은 길게 느껴졌다. 시간이 잘 가지 않을 땐 난 근처역까지 걸어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하며 시간을 때우고 그것도 질리면 방까지 가능한 천천히 돌아가곤 했다.
히로키 -고등학교에 친구는 있었지만 교복을 입고 있을 때 말고는 어째선지 그다지 같이 있고 싶질 않았다. 사람이 3천만 명 이상 사는 이 도시에서 생각해 보면 내가 보고 싶은 사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작 별의 목소리에서도 미카코와 헤어진 노보루가 어떻게 고독한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묘사가 있었지만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 히로키는 더 깊은 외로움에 잠겨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히로키의 도쿄행이 그가 처한 현실에서 도피로 묘사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본적으로
히로키가 도쿄로 진학한 것을 도피로 볼 수밖에 없다.
첫째 히로키는 사유리와의 약속을 감당하지 못했다. 히로키는 사유리와의 약속, 자신들의 비밀 공간, ‘탑을 향해 가겠다’는 꿈을 버릴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그 약속의 무게와 감정적 상처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사유리가 갑자기 사라지자 그는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기억과 감정을 피해 도시로 도망치는 쪽을 선택한다.
둘째 결국 히로키는 탑을 향한 동경에서 스스로 멀어지려 했다. 어쩌면 탑과 사유리는 히로키에게 지나치게 큰 의미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 의미가 무거워질수록 그는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어렵고, 도쿄에서 새로운 일상과 거리감을 만들며 자신을 보호하려 한 것이 아닐까...
셋째 이 작품 전반의 흐르는 상실과 회피, 그러니까 신카이 마코토 작품 특유의 정서처럼 히로키의 행동도 상실을 인정할 수 없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정서와 맞닿아 있다. 즉 부재를 견딜 수 없어 ‘물리적 거리’를 통해 감정을 억누르려는 회피 행동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도피로 볼 수 없다는 주장 또한 있다. 먼저 사유리의 행방불명에 대해서 아직은 어린 히로키가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신카이 마코토 작품 특유의 성장 서사적인 면에서 상처를 견디기 위한 잠정적인 후퇴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쿄에서 방황하던 시기는 히로키가 감정적으로 미숙한 상태에서 겪는 통과의례에 가깝고 이후 그는 결국 사유리와 약속이 남긴 의미를 다시 직시하고 행동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이는 도피라기보다는 성장 과정에서의 일시적 후퇴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신카이 감독은 인물들이 서로 멀어졌다가 다시 연결되는 구조를 자주 사용한다. 이 거리는 심리적 거리이기도 하기에, 히로키의 도쿄행은 서사적으로 필요한 ‘간극’을 만드는 장치라는 것이다.
히로키 -그런 나날 속에서 가끔씩 사유리의 꿈을 꿨다. 그 꿈은 어딘지 차가운 곳에서 외톨이가 된 사유리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는 꿈으로 결국 매번 사유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히로키 또한 사유리와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사유리가 꿈속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것처럼 히로키 또한 꿈에서 사유리를 찾아 헤맨다. 특히 그들이 함께 했던 옛 중학교의 건물 속으로 사유리처럼 똑같이 찾아가지만 사유리를 찾아내지 못한다.
히로키-다만 마음을 울리는 사유리의 기척만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내 몸에 남아 있었다. 생각해 보니 도쿄에 온 이래로 세 번째 겨울이다. 마치 깊고 차가운 물속에서 하염없이 숨을 멈추고 있는 듯한 그런 나날이었다. 나 혼자만이
사유리 -나 혼자만.. 이 세상에 홀로 남겨져 있는 그런 기분이 든다.
화면이 바뀌어, 다음 해 3월.
유니온 영토 남단 시라카미 미사키 바다
*시라카미 미사키
시라카미 미사키(白神岬)는 홋카이도 마츠마에(松前) 지역의 최남단에 위치한 곶(岬)으로, 츠가루 해협을 사이에 두고 혼슈의 탓피미사키(Tappi Misaki)와 마주보며 홋카이도의 끝자락을 상징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홋카이도 최남단임을 알리는 비석이 있으며, 날씨가 좋으면 혼슈의 아오모리현을 볼 수 있다.
시라카미미사키에서 보이는 츠가루 반도
월터해방전선 대원들을 태운 작은 배가 유니온령 해역으로 접근해 가고 있었다. 그중에 놀랍게도 타쿠야가 있었다.
타쿠야-전 언젠가 에조에 가는 게 꿈이었어요. 너무 쉽게 이루어졌네요.
대원 -여긴 제일 남쪽 끝이지만 유니온에 가족이라도 있어?
타쿠야- 그런 건 아니지만요.
대원 - 넌 분단 이후 세대니까 가고 싶어 하는 기분도 이해해. 사장님은 남북분단으로 가족과 생이별했거든
그런 사람들도 있어.
타쿠야-네? 그랬어요?
앞서 설명했던 대로 오카베는 남북 분단으로 가족과 이별을 했고, 아내가 유니온에 있다는 배경 서사가 나오며, 타쿠야는 이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대원-하지만 뜻밖이야. 사장님이 널 끌어들일 줄은
타쿠야- 제가 억지로 부탁했어요, 안 데려가면 공안국에 고발하겠다고요.
대원 -너도 참 위험한 소릴 하는군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항구에서는 오카베가 누군가와 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운전석에 있는 군인과 뒷 좌석의 남자의 옷차림으로 봐서는 소련(지금의 러시아)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 순간 갑자기 차를 향해 총격이 있고 오카베는 차에서 내려 배를 향해 달려갔다. 그때 오카베가 탔던 그 차는 피격으로 폭발한다.
오카베 - 나참 저런 얼빠진 공무원들을 봤나. 내통한 게 들통났어. 어서 출발해
그들은 서둘러 항구를 벗어나지만 잠시 후 오카베 일행이 탄 배에도 총알이 날라든다.
대원 -이번엔 좀 위험했어요
오카베 - 뭐 덕분에 공격목표를 잡았다고. 여기까지 온 보람은 있다는 거지
순시선이 오카베 일행을 탄 배에게 정선을 명령하는데 오카베는 따돌리라고 말한다. 배가 국경선을 향해 달려가자 순시선에서 함포가 발사된다. 순식간에 오카베 일행의 탄 배는 피격되고 그 총탄에 타쿠야가 쓰러진다.
타쿠야의 시선이 희미해지다가 뭔가 선명해진다. 그때 타쿠야의 시선이 아닌 사유리의 시점으로 바뀐다.
낯선 탑에 갇혀 있던 사유리가 본 것은 그 여름날에 보았던 벨라실러였다.
사유리 -저 날개. 본 적이 있어
그 순간 배경이 탑이 아니라 폐역으로 바뀐다. 그리고 같은 시각 히로키도 뭔가에 놀라 꿈을 깬다.
히로키- 잠에서 깨면 한순간 여기가 어딘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난 와야 할 장소를 잘못 안게 아닐까 하고 가끔씩 생각한다. 요즘은 사유리의 꿈이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느껴진다.
그때 누워있던 히로키의 눈에 내팽개쳐 있던 편지가 보인다.
히로키- 입원 장소?
봉투를 찢었을때 종이 한 장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 거기에는 국철 종합병원, 입원 완료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리고 드러난 또 다른 편지 한통, 수신인은 오카베라고 적여 있고 뒷면의 발신은 사와타리 사유리라고 발신자가 쓰여 있다.
그렇다, 이것은 사유리가 병원에 입원했던 3년 전 오카베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 편지가 전해지지 못하고 츠네오에게 건네졌고 그것을 전해 받은 오카베가 다시 히로키에게 전달한 것이다. 무려 3년이나 지난 뒤인데...
히로키와 타쿠야가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사유리가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고 있었던 오카베는 사유리의 현재 상황을 전해 듣고는 당분간 비밀로 해달라는 츠네오의 말을 무시하고 히로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오카베는 그 편지를 뜯어보지 않았지만 편지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3년 만에 전해진 사유리의 편지, 이것은 전작 별의 목소리에서 먼 우주로부터 메일을 보내는 미카코와 똑같다고 할 수밖에 없다. 미카코가 쓴 편지는 우주라는 공간을 통과하면서 몇 년만에 노보루에게 전해졌다. 미카코는 여전히 어린 중학생이지만 지구의 노보루는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데 3년 만에 전해진 사유리의 편지 또한 그 편지를 쓴 시점이 3년전이었고 그 사이 히로키와 타쿠야는 각기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성장해가고 있지만 사유리는 여진히 3년전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같다. 과거로부터 온 편지...애틋하지 않은가?
자. 사유리가 사라진 이후 상실감에 도쿄로 갔던 히로키는 이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걸까?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