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쿄 니콜라이 정교회 성당
니콜라이 성당을 찾아간 것은 한 여름, 낮 최고 기온이 36도에 이를 정도의 더운 날이었다.
이 성당의 ’ 정식 명칭은 도쿄 부활 대성당 교회東京復活大聖堂. 러시아에서 일본으로 정교를 전도하고자 방문한 사도대등자 성 니콜라이(사도대등자는 정교회 성인의 칭호)가 건립을 맡은 것에서 '니콜라이 당'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정교회는 각국에 정교회 조직을 두고 있으며, 일본에도 일본 정교회(일본 하리스토스 정교회)가 있어, 니콜라이 당은 일본 전국 약 60곳에 있는 교회의 중심이 되고 있다. 건축양식은 비잔틴 양식으로 벽이 두껍고, 창이 작고, 중앙에는 돔이 있다.
JR 소부선 오차노미즈역에서 내려서 도보 10분 정도 걸어가면 골목 안에 이렇게 성당이 나온다.
일본에 정교회가 뿌리를 박은 것은 에도 시대 말기인 1858년 홋카이도의 하코다테에 러시아 영사관이 들어서면서였다. 이 영사관 경내에 임시 기도소가 설치되고, 2년 후에는 부속 성당이 완공되었다. <주 부활 성당(主の復活聖堂)>라는 이름의 성당은 지역 인부들이 건설에 참여함으로써 일본인에 의해 지어진 최초의 정교회 성당이 되었다. 또한 그 독특한 종소리로 인해 오늘날까지 지역 주민들로부터 땡땡절(ガンガン寺)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아직 기독교를 사교(邪敎)로 여겨 금지하던 상황에서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을 위한 외인교회였을 뿐 일본인들을 상대로 하는 선교는 행해지지 않았다.
일본 정교화가 발전하게 된 것은 오늘날 일본의 정교신도들로부터 ‘일본의 광조자, 사도대등자 성 니콜라이( 日本の光照者、亜使徒 聖ニコライ)’라는 별칭으로 존경받는 니콜라이 카삿킨이 1861년 하코다테에 도착한 그때부터이다.
하코다테에서 니콜라이 신부의 임무는 러시아 영사관의 직원들과 현지 주재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사목 하는 것이었으나,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이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인을 상대로 선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을 읽으며 열심히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공부하였다. 또한 일본인을 대상으로 시행할 선교전략도 연구하였다.
당시 하코다테는 개항 직후 활기가 넘치던 도시로 막부 말기의 혼란과 함께 양이파, 개국파 등 다양한 파벌에 속하던 낭인들이 몰려들어 다소 혼란스러웠기에 북쪽의 나가사키라고 불렀다. 1868년 이곳에서 니콜라이 신부는 신이 보내준 사람 같은 한 인물을 만나는데 그의 이름은 사와베 다쿠마(澤邊琢磨; 1833~1913), 그 유명한 유신지사 사카모토 료마의 사촌동생이었다.
도사 번 출신의 존왕양이주의자였던 다쿠마는 막부에 쫓겨 하코다테로 도망쳐 그 지역 신관의 사위가 되어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러시아 영사가 자신의 아들들을 위한 검도사범으로 사와베 다쿠마를 고용하였고, 사와베는 러시아 영사관을 출입하게 되어 자연히 니콜라이 신부를 알게 되었다. 원래 양이파인 데다 신관의 딸과 결혼하여 기독교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던 사와베 다쿠마는 니콜라이 신부의 존재에 격분하여 신부를 살해할 작정으로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자신을 죽이러 온 사와베에게 니콜라이 신부는 대담하게도 정교에 대해 알고 난 후에 자신을 죽여도 늦지 않으니 먼저 정교의 교리를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 했고 사와베는 이를 허락했다. 그리하여 사와베는 신부가 말하는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주관하는 유일신에 매료되어 신부의 말을 받아 적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신부의 가르침에 완전히 탄복하여 그 열렬한 추종자가 되기에 이르렀고 자신이 받아들인 정교를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우국지사이자 양이주의자였던 그가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하고 무시하였으나 의사인 사카이 도쿠레이(酒井篤禮; 1834~1882), 우라노 다이조(浦野太藏)가 그를 따라 니콜라이 신부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868년 4월 이 세 사람은 세례를 받았다. 당시는 아직 기독교 금지령이 해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세례성사는 비밀리에 러시아 영사관 내 부속 성당이 아닌 니콜라이 신부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사와베는 파웨르(パウェル=바오로), 사카이는 이오안(イオアン=요한), 우라노는 야코후(ヤコフ=야곱 또는 야고보)라는 세례명을 받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일본 땅에서 이루어진 정교회의 첫 세례성사였으며, 니콜라이 신부의 열망이 첫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1869년 잠시 러시아로 되돌아갔던 니콜라이 신부는 1871년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고 그 해 12월에 일본선교를 보좌하기 위해서 러시아로부터 수도사제 아나톨리 신부가 하코다테에 도착하자 그에게 하코다테에서의 선교를 맡기고, 이듬해 1월 하코다테를 출항하여 2월 도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전도활동을 하는 동시에 러시아어 등을 가르치며 수도자로서의 청빈한 생활을 유지하였다.
또한 불교의 교리를 학승(學僧)들에게 청하여 연구하기도 하였다. 점차 그의 명성은 높아져 많은 명사등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1872년에 러시아의 황족 알렉산드르 공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메이지 천황과의 통역을 맡은 것을 기회로, 외국인 선교사로서 알현의 선례를 남기었다. 그 후로도 황족이나 정부 관계자 등과의 교류는 깊어져 갔다. 니콜라이 신부는 처음에는 시내에 나가 사람들의 집을 한 채 한 채 방문하여 전도하였다. 그러나 곧 선교사역을 체계화할 필요를 느껴 나중에 대성당이 세워질, 선교의 본거지부터 찾아 나섰다. 그리하여 지금의 부활 대성당(니콜라이 당)이 서있는 장소, 간다(神田) 스루가다이(駿河台)를 사들였는데 당시에는 외국인의 토지소유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 공사관의 부속지라는 형식으로 등기하였다.
본거지가 정해지는 무렵 도호쿠 각지로부터 교리연구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상경하였고, 도쿄에서도 신자들이 나왔다. 니콜라이 신부는 교역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전도학교를 열고 선교관 등의 건물들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1874년이 되자 도쿄에서의 선교활동도 큰 진보를 이루었다. 아사쿠사 등지에 강의소가 설치하고 교리교사를 배치했다.
이윽고 나고야 등의 도카이 지방, 또 교토와 오사카 등 간사이 지방에서의 전도도 시작되었다. 1874년 5월 니콜라이 신부는 최초로 포교 회의를 도쿄에서 열었다. 이때 전도규칙이 정해져 교리 교사의 의무, 유아의 교리 교육, 교리 교사 도우미(議友)의 역할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1875년 7월 12일 도쿄에서 교회회의(synod)가 열렸다. 출석 의원은 28명. 신도의 증가에 수반해 성직자의 필요가 제기되어 파웨르 사와베 다쿠마를 사제로, 이오안 사카이 도쿠레이를 보제로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사와베와 사카이는 일본인 최초로 정교회 성직자들이 되었다.
1884년 3월, 니콜라이 주교는 드디어 대성당 건립에 착수하였다. 신도수가 이미 1만 명을 넘었으며 매년 수세자(受洗者)도 1천 명을 넘어 발전하는 교회를 위한 심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대성당 건립에 착수했던 것이다. 이때 첫 신자이자 첫 성직자인 파웨르 사와베 신부가 대성당 건립에 반대하여 스승인 니콜라이 주교와 대립하였다. 사와베 신부는 대성당 건립에 들어갈 거금이 곤궁한 성직자와 교리교사들의 생활비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중에 니콜라이 주교와 사와베 신부는 화해하고, 대성당은 1891년 3월에 준공되어 부활 대성당이라는 이름으로 신에게 봉헌되고 축성되었다. 축성의 제전은 몇 일간에 걸쳐서 거행되어 각계 명사, 각국 대사와 공사, 타 교파 대표와 신도 그리고 일반 참배자들로 가득하였다. 또 이때에 임시 교회회의도 개최되어 사제 19명, 보제 6명, 교리교사 124명, 평신도 대표 66명이 출석하였다. 부활대성당은 성 니콜라이 카삿킨의 위대한 업적을 기려 언젠가부터 일반 사람들에 의해 ‘니콜라이 당(ニコライ堂)’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러일 전쟁이 터지고 반(反) 러시아 감정은 피할 길이 없었다. 히비야 방화 사건 때는 도쿄 부활대성당과 그 관련시설을 폭도에게 습격당하게 되어, 하마터면 폭도들이 지른 불에 전소될 뻔하였다.
니콜라이 카삿킨은 1911년 대주교로 승품 되었고, 여생 내내 수도자로서 검소한 삶을 살며 선교사역의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이듬해 숨을 거두었을 때 일본정교회의 신도수는 33,000명을 넘었으며, 266개의 교구가 조직되었고, 1명의 러시아인 주교, 35명의 일본인 사제, 22명의 일본인 보제, 116명의 교리교사 그리고 82명의 신학생들이 있었다. 이제 이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목자를 잃고 오랜 방황을 시작하게 될 것이었다. 이때 메이지 천황은 화환을 보내 애도를 표하였다. 외국인 선교사의 장례식 때 천황의 화환이 주어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도쿄 부활 대성당과 수도권 내의 몇 개의 성당도 손실되는 매우 큰 타격을 입었다. 지진으로 흩어졌거나 혹은 불타서 없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사료도 많았다. 이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1929년 대성당은 재건되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니콜라이당은 공습에 의한 피해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괴멸적인 도쿄 대공습 후에는 안치 장소가 없는 불타는 시신이 대량으로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시신에서 나오는 인이 불타는 빛으로 밤에는 대성당의 창문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고 한다. (네이팜탄의 인) 대부분의 관계자는 시신의 수와 참상을 두려워 대성당에 접근하지 않았지만 당시 세르게이 부주교의 후임으로 일본 정교회를 총괄하는 주교였던 니콜라이 오노귀이치가 대성당에 들어가 혼자 파니히다( 영면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 에 안주하기 위해 기도하며 영면한 사람의 믿음을 계승하여 함께 영원한 나라에 주어지도록 기원하는 것)를 바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때 나는 여행 일기에 이렇게 썼다.
"참배 시간이 맞지 않아 결국 성당옆에 있는 이곳에서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왼쪽에 보이는 제단에 촛불을 켰다. 여기에 가게 되면 촛불을 켜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왔으므로...
사실 나는 로마 가톨릭 신자이지 러시아 정교회 신자는 아니지만, 내가 믿는 그분은 한분이시므로 여기서 기도한다 한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촛불을 켜려면 100엔씩을 내야 했다. 동전주머니에서 200엔을 꺼내어서 헌금함에 넣고 촛불을 켰다. 한국에서도 내가 다니는 성당에서 성모상 앞에 초를 바치긴 했지만 이렇게 한국에서 멀리 떠나와 촛불을 켜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뜨거운 햇살이 내려 비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놓고 기도를 했다. 내 마음의 무겁고 힘든 것들을 거두어 가 주시라고... 그리고 새로움을 주시라고...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그의 앞날을 지켜주시라고...
그런 나를 가엾게 여기셨을까...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내 얼굴에 흘러내렸다.
삶의 길에서 어떤 것이 정답이고 어떤 것이 정답이 아닌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믿고 있는 분은 알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겪고 있는 이 혼란과 괴로움들에 대해서도 그분은 알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주신 것도 그분이고 거두어 가시는 것도 그분이시기에 그분의 뜻을 알 수 없는 일,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이곳에 다시 올 날이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다시 도쿄에 온다면 이곳에 반드시 한 번은 들러보리라. 그리고 내가 앞으로 어떤 곳을 또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또 다른 성당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가서 촛불을 켜리라. 이곳에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려 할 때 마음은 많이 가벼워졌다.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그분이 덜어가셨을 것이다."
*그 여행 이후 여러 번 도쿄를 갔었고, 도쿄 가이드북까지 썼다. 하지만 니콜라이 성당은 가지 못했다. 다음에 도쿄를 가게 되면 이번에는 꼭 가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