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수각이 남아 있는 고치현 고치성
지금까지 고치시를 여행한 것은 두 번이다. 홋카이도, 오사카, 도쿄를 제외한 일본의 중소 도시 중에서 2번씩 방문한 도시는 그리 많지 않은데 일본에서도 변방 혹은 시골이라고 여겨지는 고치까지 두 번이나 찾아갈 만큼 나름 매력을 갖춘 도시이다. 고치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고치시에 대해 알아보자. 고치시 관광가이드에서 설명하는 내용이다.
"고치시는 아름다운 산과 웅대한 태평양에 둘러싸인, 온난하고 일조시간이 긴 기후입니다. 도시 중심에는 맑은 가가미강이 흐르는, 산수의 경치가 아름다운 아담한 도시입니다.
도시 중심에는 400년 전 건축 당시의 천수각이 그대로 남아있는 고치성(일본에서 천수각이 현존하는 12개 성 중 하나), 3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일요시장(430개 이상의 점포가 약 1.3km에 걸쳐 늘어서 있음) 등 볼거리가 많이 있습니다.
고치에는 사계절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 그리고 가쓰오(가다랑어) 다타키와 회로 대표되는 해산물 등의 식재료가 풍부해서 일본에서 가장 먹거리가 맛있는 곳이라고도 불립니다. 또한 고치 사람들은 밝고 쾌활하며 술을 잘 마시는 것으로도 전국적으로 유명합니다. 중심가의 술집은 고치 사람들로 밤늦게까지 활기가 가득하므로, 맛있는 음식과 술과 함께 고치의 밤을 즐겨 주십시오. "
소개된 내용처럼 고치시는 태평양 연안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고치현의 중앙부에 위치한 고치시는 현내에서 가장 발전한 도시로서 고치현 인구의 40%가 모여사는 곳이다. 일본 내에서는 주류의 소비량이 많은 도시의 하나이고 일요시장을 비롯한 정기시장으로 유명하다. 또한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애니메이션 바다가 들린다의 배경 무대이기도 하며 인기 여배우 히로스에 료코의 고향이다. (고치시의 인구는 31만 7천 명 2024년 1월 1일 기준)
지리적으로 고치 평야의 서부에 위치하고 평야지대는 가가미강가의 시 중앙부에서 남동부 쪽으로 펼쳐져 있다. 시의 남서부는 구릉지이고 북부는 산림지대이다. 남부는 태평양에 면하고 시의 거의 중앙 부근까지 우라도 만이 들어와 있다. 강가의 평야지대에 있는 도시 중심부는 도사국 고치성의 성시였고 1601년 야마우치 카즈토요에 의해 성시로 지정되었다.
도시 이름인 고치高知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예부터 고치성 주변은 가가미강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었다. 그래서 고치성을 옛날에는 河中山城 (고치야마죠)라고 불렀고 이로부터 고치라는 지명이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고치현, 고치시, 그리고 고치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치 지방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가자. 그 세 사람은 쵸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 ,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 그리고 사카모토 료마이다.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전국시대에 시코쿠의 대부분을 정복했던 인물이고, 야마우치 가즈토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패권을 차지한 뒤 도사국의 영주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료마는 두말할 것도 없는 에도막부 말기의 유명인물이다. 료마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죠소카베 모토치카와 야마우치 가즈토요부터 알아보자.
1. 쵸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 1539 ~ 1599.07.11)
그는 쵸소카베 가문의 20대 당주로서 한때나마 시코쿠의 패자로 불렸고 임진, 정유왜란에 모두 참전했다.
모토치카는 1539년(덴분 8년), 쵸소카베 가문의 제19대 당주인 죠소카베 구니치카(長宗我部國親)와 그의 정실 미노(美濃) 사이토 씨(斎藤氏)의 장남으로 오코성(岡豊城)에서 태어났다. 1560년 5월 아버지를 따라 모토야마가문과의 전쟁에 종군, 나가하마전투(長浜の戦)에서는 최초의 출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전하여 그때까지의 나약하다는 인상을 단번에 떨쳐버렸다. 그 해 6월에 구니치카가 급사하자 가독을 승계하였다.
1567년 고노가문(河野氏)이 모리가문(毛利氏)과 연합해 이치조 가네사다(一条兼定)를 공격해 승리하자 세력이 무척 약화된 이치조 가문으로부터의 독립을 했다. 1568년에는 모토야마를, 이듬해에는 아키가문을 멸망시키고 서부를 제외한 도사국(오늘날의 고치 지방) 전역을 장악했다. 1574년에 와다리카와 강 전투(渡川の戦)에서 승리하고 도사를 통일한 모토치카는 당시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동맹을 맺고 시코쿠 전역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이후 1580년까지 아와(오늘날의 도쿠시마), 사누키(오늘날의 카가와)를 손에 넣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와의 관계가 틀어져, 노부나가 측에서 대규모 정벌군을 일으키려 했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음으로써 없던 일이 되어버렸고, 그 틈을 타서 1585년에 그토록 바랬던 시코쿠의 통일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 이후 권력을 차지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당시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전의 노부나가처럼 모토치카가 도사, 아와를 영유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나머지, 이요(오늘날의 에히메현)와 사누키는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반발한 모토치카는 히데요시와의 일전을 불사하지만 총 12만 명의 대규모 병력과 맞서 싸우기에는 부족하기만 했다. 결국 그해 7월 25일 항복했고 도사국 한 지역만 영유를 인정받고, 나머지는 빼앗기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3월에 모토치카는 후쿠시마 마사노리로 대표되는 5번대에 속하여 아들 모리치카와 치카타다, 치카야스의 아들 코소카베 치카우지(香宗我部親氏)와 함께 약 3천의 군사를 이끌고 우라도에서 출진하여 조선으로 건너갔다. 정유재란에서는 1만 3천 명의 군사를 동원했으나 대부분이 수군으로 종사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조선으로 파견 나갔던 다이묘들에게 귀국 명령이 떨어져 모토치카는 3월에 도사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모토치카의 나이는 딱 60세였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병을 얻어 향년 61세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임진왜란에서 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끌고 왔는데 그중에서 '박호인'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고치에 살면서 의료기술이나 두부제조법 등 많은 조선문화를 전래했다고 한다. 훗날 그의 자손은 아키츠키(秋月)라는 일본식 성으로 바꿔 자손 대대로 이 지역에서 두부를 만들어왔다고 한다. 또한 그의 영지였던 지금의 고치 지역에는 역시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 여인이 길쌈하는 법을 알려줬다고 하며 그녀의 무덤은 '조선여인의 묘'라 해서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한 마디로 쵸소카베 모토치카를 설명하자면, 성공을 눈앞에 두었다가 좌절한 비운의 영웅이라고 해야 할까. 일본의 변방이나 다름없는 시코쿠에서도 더 구석진 태평양 쪽의 난코쿠 지방에서 하나하나 주변 세력을 제압하고 시코쿠를 통일해 나가고 있었으나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좌절되었고 다시 한번 도전해 보니 이번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꺾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영지까지 몰수당하고 말았으니 이처럼 불운할 수가 있을까?
2.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1546-1605)
야마우치 가즈토요는 오와리국(尾張国)의 하구리 군 쿠로다에 있는 야마우치 가문의 성이었던 구로다 성에서 출생했다. 야마우치 가문은 대대로 이와쿠라 오다 가문을 따르고 있었고 카즈토요의 아버지인 모리토요는 그 가문의 중신이었으나, 이와쿠라 오다 일족이 동족인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하고 있었기에 카즈토요의 가문 역시 이 전란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카즈토요의 형인 주로는 1557년에 구로다성에 있다가 습격당해 전사했고, 1559년에는 이와쿠라 오다 가문의 거성이었던 이와쿠라 성이 함락당했기 때문에, 아버지 모리토요도 죽음을 맞게 된다. 이렇게 카즈토요는 아버지도, 형도 잃은 채 기댈 곳 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카즈토요 본인은 처음에 가리야스카 성의 성주인 아자이 신파치로 등을 섬겼으나, 1568년 경에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겨 키노시타 히데요시의 요리키가 되었다.(키노시타 히데요시는 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요리키- 직속 부하가 아닌 일종의 다른 사람에게 파견되는 형태로, 주군의 신하를 도와 군사 업무를 수행하는 계급이다.
1570년 9월에 있었던 아네가와 전투에서 첫 출진을 시작하여 1573년 8월 아사쿠라 가문과의 도네사카의 전투에서는 얼굴에 중상을 당했음에도 적장 미타자키 칸에몬을 죽이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아네가와 전투 - 아네가와 전투( 姉川の戦い)는 일본 전국 시대에 벌어진 전투로, 겐키 원년 6월 28일(1570년 8월 9일)에 오미국 아자이 군 아네가와 부근(현재의 시가현 나가하마 부근)에서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과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부인 치요와의 결혼은 1573년 경에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내조에 대한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있는데, 아즈치성 완공 후에 노부나가가 열병식을 열었는데, 명마가 있음에도 너무 비싸서 다들 아쉬워하는 가운데 양부모가 남겨준 금을 쓰지 않고 두었다가 이때 말을 사서 가즈토요가 돋보이게 해 줬다고 한다. 이런 내조로 오히려 남편보다 유명해서 가즈토요의 별명은 치요의 남편
한편,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무공을 세웠기 때문에 가즈토요는 오우미 국에서 400석을 받게 된다. 이때, 히데요시가 자신 직속의 가신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한 것인지 가즈토요는 히데요시의 직신이 되게 된다. 이후 1577년에는 하리마 국을 중심으로 약 2000석을 영유하게 된다. 그 후에도 히데요시의 주고쿠 공략에도 참여해, 하리마의 미키 성을 둘러싼 합전이나 이나바의 돗토리 성을 함락시키는 전투에도 참전했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목숨을 잃은 뒤에도 가즈토요는 계속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서 맹활약을 하였다. 1583년의 시즈카타케 전투에서 공적을 세웠으며, 다음 해 12월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위하기 위한 지성 건축을 담당했다. 그 뒤 히데요시의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숙로가 되어 1585년에는 다카하마 성, 나가하마 성 등의 성주가 되어 2만 석을 받아 처음으로 다이묘가 된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종 5위인 쓰시마노카미에 임명받는다. 1590년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여 야마나카성을 함락시키는 데에 일조하였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도토미 국의 카게가와성과 5만 1000석의 영지를 받게 되었다.
수백 석의 무사에서 5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으니 충분히 대단한 출세라고 할 수 있지만, 가즈토요가 400석 받을 때 100석 받던 아사노 나가마사, 호리오 요시하루, 나카무라 카즈우지 등이 가즈토요가 5만 석 받았을 때 8만 석, 12만 석, 14만 석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히데요시의 직신 중에서는 출세 속도가 순위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가즈토요가 개인의 용맹이 뛰어나서 수백석 단위에서는 빠르게 출세했지만 점차 수천 수만석 단위의 무사에게 필요한 전술적인 면이나 정치적인 면이 부족하여 출세속도가 둔화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임진왜란 때에는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숙로격이었기 때문에 출병을 면할 수 있었으나, 군선을 제조하는 데나 후시미 성의 보수 등을 담당하였다. 1595년, 히데츠구가 모반 혐의로 숙청되었을 때 함께 숙청당할 뻔하였으나 가즈토요가 모반 사건과 관련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부인했기 때문에 가까스로 할복을 면하고 오히려 8000석을 가증 받게 된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그는 1600년 고다이로 중 한 사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의 우에스키 카게카츠의 정벌에 나섰다. 그 후, 이시다 미츠나리가 반 도쿠가와의 기치를 들게 되자 곧바로 동군에 가담하게 된다. 이때 자신의 거성인 카게가와 성을 바치겠노라고 이에야스에게 말해서 오히려 환심을 샀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직접적으로 큰 공훈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전투 전의 공적을 인정받아 시코쿠의 도사국 9만 8천 석을 받고 옮겨 살게 된다. 이쯤 되면 처신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렇게 전국 시대 말기의 강력한 패권자를 주군으로, 때마다 유력한 편에 서면서 출세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도사국으로 옮기면서였다. 전 영주였던 쵸소카베 모리치카(앞서 설명했던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아들)를 섬겼던 가신들에게 강한 반발을 받아 가즈토요는 암살당할 것이 두려워 5명 정도의 카게무샤와 행동을 같이하여야만 했다고 전해진다.
*카게무샤- 그림자 무사, 원래 과거 일본에서 군주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가짜 군주'로, 군주와 닮은 사람을 선정하여 진짜 군주 대신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일종의 위장 대역이다.
가즈토요는 쵸소카베의 잔당을 숙청했고, 이후 도사번의 무사들은 죠시(上士)와 카시(下士) 계급으로 나누어진다. 죠시는 상급무사, 카시는 하급무사로 가즈토요를 따라 도사에 들어온 후다이 가신들은 죠시, 구 쵸소카베 가문 출신의 가신들은 카시로 나누어진 것이다. 이 두 계급 모두 무사였지만 계급 차이가 심해 카시들은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에도막부 말기 시대에 도사번사들인 고토 쇼지로,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은 죠시(上士), 도사근왕당(土佐勤王党)을 이끌었던 타케치 한페이타, 삿쵸동맹(薩長同盟)을 성사시킨 사카모토 료마, 한페이타의 명으로 많은 사람을 죽인 오카다 이조 등은 카시(下士)였다. 이 두 무사 사이의 대립관계가 아이러니하게도 에도막부를 무너뜨리는 한 원인으로 작용되었다. 그는 오늘날의 고치성을 축조했으며, 성 아래 마을을 조성했다. 식중독을 극도로 경계하여 가다랑어를 회로 먹지 말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에 반발했고, 결국 일종의 꼼수로 가다랑어를 겉껍질만 살짝 굽고는 "날것이 아니라 구운 거니 괜찮음!"이라고 우기며 생생한 속살을 회로 먹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가쓰오 타다키(가다랑어 겉구이)가 되었다.
*한 다큐에서는 짚불에 구워 먹는 가쓰오 타다키가 거제 지방에서 먹는 방식으로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들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부인 치요와의 사이에 친자식으로는 아들 없이 고명딸 요네가 있었으나, 텐쇼 대지진 때 죽었고 나중에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남자아이를 양자로 들여 키우다가 가즈토요의 명으로 집을 나와 출가를 했다(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다 보니 야마우치 가문 가신들의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가신에게 시집간 양녀도 한 명 있었다. 그러나 역시 야마우치 가문의 가독을 이을 아들이 없었기에, 친동생인 야마우치 야스토요의 장남 야마우치 타다요시를 데려와 양자로 삼고 가독을 잇게 했다.
이곳을 찾아갔던 여행은 다음 구조하치만 여행 때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 두 사람은 고치현의 역사에서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기에 이야기했다. 한 사람은 고치를 한때나마 역사의 중앙무대로 이끌어낸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처세술이 뛰어난 자로서 대영주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그가 만든 무사 계급은 훗날 에도막부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게 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고치성 이야기이다. 고치 성 ( 高知城,)은 고치시 마루노우치에 있는 성으로 국가 지정 사적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전국시대에는 오다카사카 산성(大高坂山城)으로 불렸다.
고치성의 성곽 형식은 제곽식 평산성이며, 고치 평야의 거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평산성 - 산성과 평지성의 절충식으로, 배후의 산등성이를 평지와 산기슭을 함께 싸면서 돌아가도록 축조한 것이다. 이러한 축성 형식은 우리나라 성곽의 특성을 이룬다.
*제곽식 - 내해자와 외해자로 둘러싸인 성
고치성은 주변의 가가미가와 강과 에노구치강을 바깥 해자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볼 수 있는 성은 에도시대 초기 도사번주 야마우치 가즈토요가 공사를 시작해서 2대 번주 야마우치 다다요시 때에 완성된 것이다. 4층 5개 천수는 가쓰토요가 도사 번으로 오기 전의 자신의 성이었던 가케가와성의 천수를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1873년의 폐성령과 태평양전쟁 때 다른 지역의 성들처럼 파괴될 위험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성은 파괴되지 않아, 천수 및 어진 오테 문 등 15개 동의 건물이 남아 있고 이 모두는 현재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 15개 동외에도 우시토라 망루의 일부라고 전해지는 부재가 도사 야마우치가 보물자료관에 수장되어 있다. 원래 전국시대에는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3년 동안 수해에 취약했던 오다카사카 산성을 버리고 가쓰라하마에 가까운 우라토에 우라토성을 건축하여 그의 아들인 죠소카베 모리치카까지 이어졌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영지가 몰수되어, 새롭게 도사국의 번주로 온 야마우치 가즈토요도 처음에는 우라토성에서 지냈다.
하지만 1601년 8월 우라토성이 성하 마을을 건설하기에는 너무 협소했기 때문에 9월부터 도도 쓰나이에를 책임자로 임명해서 오다카사카 산에 혼마루를 건축하고 성하마을 정비에 따른 주변 강의 치수공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도도 쓰나이에는 축성의 명수로 유명했다.) 1603년 혼마루와 니노마루가 완성되어 그해 9월에 가쓰토요가 새로운 성에 입성했고 , 이때 신뇨지의 승려 자이센으로부터 성의 이름을 받아 고치 산성(河中山城)으로 명명했다.
그 후 1610년 홍수가 계속되자 , 2대 번주 야마우치 다다요시는 고치(河中)이란 글자를 기피하였기 때문에 치쿠린지의 승려 구쿄에 의해 성의 이름을 고치 산성(高智山城)으로 개명한다. 이 시기부터 성의 이름을 간략하게 고치 성(高知城)이라고 불리게 된다. 덧붙여 이 지역의 명칭도 고치(高知)라고 불리게 되었다. 1611년에 산노마루가 준공되어 고치성의 모든 성곽이 완성되었다. 처음 공사를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뒤였다. 이후 백 년 여가 흐른 1727년 고치성 주변에서 대화재가 발생했고 그 때문에 오테문 이외 성의 대부분이 불에 타버렸다. 결국 1729년 8대 번주 야마우치 도요노부가 후카오 다테와키를 총책임자로 성을 재건하기 시작했고 1748년에야 천수 및 망루, 문 등이 완성되었다. 천수의 규모는 이전보다 작아졌지만 외관은 소실 전의 천수 그대로였다. 1753년 성의 재건이 완료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의 성을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정문이라고 하는 문도 항상 꺾여 있는 구조이다. 문위의 건물에서 침입하는 적을 향해 세 방향에서 공격할 수 있다.
츠메문(詰門), 2층 부분이 니노마루(二の丸)와 혼마루(本丸)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어 있으며 혼마루(本丸)를 지키는 무사들의 대기실도 있다. 가신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는 상태를 일본어로 츠메루(詰める)라고 하므로 츠메문(詰門)이라고 불러졌다. 고치성은 에도시대에 건축된 천수각과 혼마루어전(영주가 거주하는 곳)이 모두 남아 있는 유일한 성이며, 천수각과 오테몬이 남아 있는 3개 성 중의 하나이다.
천수는 전형적인 아즈치 모모야마시대(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기)의 양식이다. 꼭대기층의 난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허가를 받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건축되었던 천수는 1727년에 소실되었고, 1747년에 소실되기 이전의 양식을 충실하게 복원한 것으로, 난간을 설치하는 등의 다소 고풍스러운 형식(복고형)을 취하고 있다.
천수는 천수대(천수가 들어서는 기초 부분)가 없이 혼마루 위에, 직접 초석을 깔고 고텐(어전)에 인접하여 세워졌으며, 이러한 혼마루를 최후의 방위 거점으로 하는 양식은 자세는 게이초기(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서 에도시대 초기까지)의 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전체 높이는 18.5m.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혼마루는 천수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 고치성이 건축된 당시 니노마루 어전이 생기기 전까지는 도사번 초대 번주 카즈토요와 치요부인의 거처였다. 그러나, 18세기 초에 혼마루 고텐은 소실되어 에도 중기에 고텐의 재건이 이루어져 현재에 이른다. 이 시기의 고텐이 완전한 형태로 현존하고 있는 것은 고치성뿐이다
천수각에 안에 걸려 있는 초상화들, 왼쪽부터 야마우치 가즈토요의 아내였던 겐쇼인, 야마우치 카즈토요, 그리고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동생인 야마우치 야스토요, 겐쇼인은 내조의 여왕으로 유명한 인물이고 원래 이름은 네네였다. 야마우치 야스토요는 형을 도와 출세의 길에 이르게 했고 나중에 가즈토요가 자식이 없어 대를 이을수 없자, 자신의 아들을 입양시켜 대를 잇게 했다.
이외에 에도 막부 말기 시대에 중요한 인물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위의 사진은 야마우치 요도
야마우치 요도/도요시게(山内容堂/豊信 )는 제15대 도사번주로 번정 개혁에 성공해 막말사현후(賢侯)중의 하나로 꼽힌다.
*막말사현후-사쓰마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 후쿠이번의 마쓰다이라 슌가쿠, 우와지마번의 다테 무네나리, 그리고 도사번의 야마우치 요도
그는 메이지 유신 전부터 서양식 번정 개혁을 꾸준히 추진했고 원수였던 죠슈번과 사쓰마번 사이의 동맹을 이끌어내는 데 공이 있었으며, 대정봉환이라는 유신 최대 정치 개혁을 완수시켰다. 관위는 집안 대대로 종사위하 도사노카미 겸 시종이었는데, 통치능력과 메이지 유신의 공을 인정받아 종 2위 곤주나곤까지 승진했다.
그는 안세이 대옥 당시 막부 개항파 이이 나오스케에게 핍박을 받아 당시 존왕양이파 사무라이들에게 인망을 얻었고 다케츠 즈이잔을 통해 존양파 귀족들과도 줄을 대는 등 존양파로 생각됐으나, 존양파식 번정 개혁에 번번이 제동을 걸었으며 더욱이 이후 막부가 위압적으로 나오자 자기 번내 존양파를 일소하고 막부 편에 섰다. 당시 지사들은 그런 그를 시류에 편승하는 자로 조롱하면서 "취하면 근왕, 술 깨면 좌막(막부지지자)"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도막파(존양파)와 좌막파 사이의 모호한 태도가 오히려 삿초 동맹과 대정봉환을 완수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현재 야마우치 가의 위패를 모시는 야마우치 신사에 술대접을 든 요도의 좌상이 있는데, 좌대에 '대정봉환을 기뻐하는 야마우치 요도 공(大政奉還を慶ぶ山内容堂像)'이라 쓰여 있다. 1872년 다년간의 과음으로 인한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46세.
역시 에도시대 말기 도사번의 번사로서 그의 조상은 원래 쵸소카베 모토치카를 섬겼으나, 야마우치 가즈토요가 도사번으로 들어왔을 때 삼고초려의 형식으로 야마우치 카즈토요를 섬기게 되었다. 그는 한때 파면되어 은거를 당했지만 도사번의 참정(参政)으로 복귀해 문벌 타파, 식산흥업, 군제 개편, 개국 무역 등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한 여러 혁신적인 개혁을 수행하였다. 이는 도사 번에 적지 않은 동향을 주었으나, 보수세력과 존왕양이(尊王攘夷)론자들로 결성된 집단인 도사 근왕당(土佐勤王党)의 가치관과 맞지 않아 이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고, 결국 1862년 음력 4월 8일 도사 근왕당의 나스 신고(那須信吾), 다카미 야이치(高見弥市), 야스오카 가스케(安岡嘉助)에게 암살당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에도 막부 말기에 이르러 막부체제의 모순과 서양세력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나름 도사번을 개혁하고자 노력했으나, 어디까지나 막부체제아래서의 개혁을 추구했고, 이런 개혁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보수 세력과 막부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이들이 뭉쳐 그를 암살한 것이다.
그리고 다케치 즈이잔,武市瑞山 다케치 한페이타로 불리기도 하다. 다케치 즈이잔은 1829년 9월 27일 나가오카 군의 후케이무라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도사 번의 향사(鄕士)인 다케치 마사쓰네이며, 모친은 오오이 가문의 데쓰이다. 1849년 부모를 연이어 잃은 즈이잔은 조모의 부양을 위해서 향사인 시마무라 겐지로의 장녀 도미코와 결혼했다. 도미코는 남편을 잘 받들었지만,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도사근왕당의 후배 요시무라 도라타로는 도미코 부인을 친정으로 보낸 후 즈이잔에게 두 명의 여성을 소개했다. 그러나 즈이잔은 이들 모두를 거절했다. 도라타로가 세 번째로 여성을 소개하려고 하자 즈이잔은 크게 화를 냈다. 한편 도미코는 즈이잔이 근왕당 탄압으로 투옥되었을 때, 남편의 고통을 생각하며 여름인데도 마루 위에서 모기장도 없이 지낼 정도였다. 즈이잔이 옥중에서 보낸 서한에는 둘 사이의 애정이 얼마나 섬세하고 깊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다케치 즈이잔은 1854년 도사의 대지진으로 집을 잃었지만 이듬해 처가의 도움으로 새로 세운 자택에 도장을 열었다. 이 도장에서는 주로 창술과 검술을 가르쳤는데 120명의 문하생들이 모일 정도로 명성이 높았고 평판도 좋았다. 즈이잔은 사카모토 료마와 친척관계였는데 같은 향사임에도 즈이잔은 료마보다 신분이 높았다. 냉정하고 침착한 우등생이었던 즈이잔은 허풍쟁이로 불렸던 료마와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둘은 한때 같은 사상을 가졌지만 이후 다케치는 양이(서양세력을 배격하자는 사상)에 머물렀고 사카모토는 부국강병과 개국, 개항의 입장을 택하게 된다.
이밖에도 옛 도사번의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미니어처도 있다. 고치 사람들의 고래 사냥 모습이다. 일본 각지를 돌아보면서 그곳에 성이 있다면 꼭 들러보는데 일본의 성을 돌아보는 것은 단순하게 관광의 목적만 있는 게 아니라, 일본의 역사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한때는 영주의 위세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대부분의 성들은 파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현재 남아 있는 성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것이고, 성의 흔적만 남아 있는 게 대부분이다. 뒤늦게 성을 복원하려 해도, 막대한 비용에, 성의 설계도나 그림 등이 남아 있지 않아 복원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나마 복원을 했지만 오사카 성처럼 철근 콘크리트로 해서 역사적인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있다. 고치성은 비교적 작은 성에 해당되지만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고치성이 이렇게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변방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태평양전쟁의 끝무렵에는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성들이 많았다. 당장 히로시마성은 원폭으로 날아가버렸고, 오사카성도 마찬가지.. 비록 일본의 시골이라고 하는 시코쿠의 서남쪽 고치시에 있는 성이지만 일본을 여행한다면 돌아봐야 하는 성이다.
일본 성 여행 이야기의 첫번째는 고치성이다. 일본의 성에 대해 글을 쓸 때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익숙하지 않은 지명, 이름, 역사 때문일텐데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는 좀 더 쉽게 써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