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건 없다는 생각
내 다리를 물어뜯은 개가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묶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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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녀석을 나무에 매달아 불에 그슬리면서 두들겨패지 않을 거라고 했어.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대. 오토바이의 시동이 걸리고, 아버지는 달리기 시작해. 개도 함께 달려.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같은 길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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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바퀴째 나타날 녀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축 늘어진 녀석을 오토바이 뒤에 실은 아버지가 보여. 녀석의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을 나는 보고 있어. 그날 저녁 우리 집에선 잔치가 벌어졌어. 시장 골목의 알 만한 아저씨들이 다 모였어.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넣었지.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그릇을 다 먹었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ㅡ 한강/ 채식주의자 中
며칠 전 한 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란 책을 읽다가 어릴 적 마을 어귀를 돌던 개장수의 트럭이 떠올랐다. 독특한 높낮이로 '개 삽니다, 개'라는 멘트가 확성기를 타고 고요한 시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 낯선 이를 보고 짖던 개들도 조용해지던 순간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 가족이 자주 가던 보신탕 집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집을 지켜야 한다며 장에서 어린 개를 사 와 키웠고, 말을 듣지 않는 개들은 개장수에게 헐값에 넘기곤 했다. 그땐 아무렇지 않았다. 불쌍하긴 했어도, 지금처럼 눈물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몰랐다. 그 개들이 어떻게 죽어가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식당에 가서 단지 보글보글 끓는 전골 속 고기들을 먹어 왔으니까. 개들이, 소들이, 닭들이, 돼지들이 어디서 어떻게 죽어가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젠 안다.
*채식주의자는 채식 권장과는 거리가 먼 도서이다.
열다섯 살 때인가, 다니던 학원 뒤에 개소주를 만드는 집이 있었다. 집에 가기 위해 학원차를 기다리다가, 어디선가 '퍽, 퍽' 두드리는 소리에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비닐이 몇 겹이고 덮인 하우스에 어렴풋이 그림자가 보였다. 천장에서 줄이 길게 내려와 있었고 무언가 매달려 있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소리는 났지만 형체가 불분명했다. 그게 개를 때려죽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일 년 뒤였다. 개는 때려야 고기가 연해진다고들 한다. 그래서 산 채로 개의 목을 매달아 때린다. 이 야만적인 행위가 시골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행해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이번 추석을 맞아 본가에 다녀왔다. 근 일 년 반만의 귀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겹다 여겼던 시골의 풍경들이 더 이상 정겹지 않았다. 불편했다. 집집마다 하얗고 누런 개들이 마당에 묶여 있었다. 우리 집에도 '백구'가 살고 있다. 내가 중학교, 아니 고등학생 때였나 그때부터 쭉 마당에 묶여 살아왔으니 10년을 넘게 일 미터도 되지 않는 세계에서 산 것이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화풀이를 백구에게 하곤 했다. 그 뒤로 백구는 빗자루를 든 아버지를 무서워한다. 꼬리를 말고 벌벌 떤다. 이제 아버지도, 백구도 늙었다. 늙은 아버지는 뜨뜻한 거실에서 낮잠을 자는데, 늙은 백구는 허름한 개집이나 흙바닥에 널브러져 잔다. 늙어버린 백구는 어떻게 될까. 부산으로 돌아온 후에도 가끔, 아주 가끔 백구 걱정을 한다. 그 애가 죽으면 쓰레기봉투에 담길까 땅에 묻힐까. 나는 영영 그 애의 소식을 모르고 싶다. 그 애가 죽기 전까지 본가에 가고 싶지 않다. 집에 머무는 3박 4일 동안 나는 홀로 침대에서 자며 악몽을 꾸곤 했다. 그러다 깨면 밖으로 나가 자고 있는 백구를 보고 왔다. 그때마다 백구가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었다. 오랫동안 목욕을 하지 않아 까칠한 털을 쓰다듬었다. 미안했다. 내가 사람이라 미안했다. 우리 부모님만 그런 것인지 부모님 세대가 그런 것인지 몰라도 우리 부모님은 사람은 사람, 짐승은 짐승이란 인식이 강하다. 요즘에야 길을 지나다니면 작은 개들을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늘어서 그런지 집에서 키우는 개와 밖에서 키우는 개를 나눈다. 내가 고양이를 키운다고 했을 때도, 털 짐승과 어떻게 잠을 자느냐고 했다.
"걔는 어디서 자니? 화장실?"
그렇다. 엄마는 털 날리는 짐승과 내가 한 침대를 사용한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아 했다. 야행성인 고양이가 밤에는 난폭하게 나를 물지도 모른다고 했다. 예로부터 요물이라 칭하던 고양이를 키우면 나도 덩달아 재수가 없을 거라 했다. 엄마가 나를 설득하기 위해 했던 많은 뜬소문들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나는 고양이를 키운 뒤 악몽을 꾸지 않는다. 그 요물이 나를 지킨다. 내가 들은 바로는 예부터 고양이는 영물이라 하여 귀신을 쫓는다고 했다. 이러나저러나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면 이루어지는 듯하다. 내겐 고양이가 영물이고, 이집트의 신이고, 왕이고 뭐 그렇다.
생각나는 일화가 하나 더 있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 운동회 날 교문 앞에서 파는 500원짜리 병아리를 사 와 키운 적이 있다. 나와 동생은 그 병아리에게 '꼬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애지중지 마당 산책을 시키며 키웠다. 새벽에는 고양이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할까, 베란다에 박스를 마련해 잠을 재웠다. 꼬꼬는 털이 보송보송한 레몬빛 병아리에서 붉은 벼슬을 가진 장닭으로 자랐다. 하도 귀하게 키운 덕에 기세가 등등해져 마당에 묶인 강아지를 약 올리고 내가 슬리퍼를 신으면 발가락을 쪼아댔다.(그 뒤로 나는 치킨은 잘 먹지만 조류는 무서워하는 성인 여성으로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아마 복날이었을 것- 엄마가 커다란 솥에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다. 맞다. 부모님이 꼬꼬를 잡은 것이다. 나와 동생은 동네가 떠나가라 울었다. 아빠가 입 앞에 대준 꼬꼬의 다리 하나를 한 입 먹고 또 울었다. 맛이 없었다. 꼬꼬는 영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살이 질겼던 것이다. 그 후로 운동회 날에도 병아리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부모님은 모든 게 순리라고 했다. 가축은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사는 거라고. 정말 그럴까? 틀린 말도 아니다. 실제로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가축들이 강제로 교배를 당해 태어나고 강제로 촉진제를 맞으며 강제로 목구멍에 사료가 쑤셔 넣어지며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대단히 열정적인 환경운동가도 아니며 동물의 권리를 위해 거리에 나서 시위를 하는 사람도 아니다. 단지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이다. 나는 고양이를 키우기 전까지 동물은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털 달린 짐승들이 고통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며, 즐거움과 행복, 질투까지 느끼는 생명이라는 생각 같은 건 해본 적 없었다. 아니, 관심 없었다. 함께 살며 몸소 체험해보니 알겠다. 이들도 우리와 함께 보고 맡고 듣고 말할 줄 안다는 걸. 지구촌이 채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단지 그들의 마지막이 처절한 생존 욕구로 몸부림치다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먹는 단백질을 컨베이어 벨트에서 기계로 찍어내면 더없이 평화로울진대, 아마 그런 대체육이 만들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
고양이를 데리고 왔더니 온 세상 동물들 걱정을 다 하고 앉았다. 길에 사는 고양이, 묶여 사는 개, 공장에서 태어나 버려지는 동물들, 식용이라 일컫는 가축들. 동물권이 인권을 뛰어넘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다만 과정이 인도적이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개선되길, 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끔찍한 살육을 방지하고 싶은 것이다. 육식 자체가 생명의 존엄성을 뒤집는 행위일 테지만 유구한 육식의 역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올해 안에 개를 묶어 기르는 시골 어르신들이 개들의 목줄을 풀어주고 산책을 시켜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불법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개 농장들이 당장 내일 무너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동물을 반려하기 위해 펫샵이 아닌 보호소로 일제히 향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한 순간에 많은 것이 변화할 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을 되돌아보고 약한 생명의 시선에서 한 번이라도 사회를,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우리가 저지르는 과오들이 언젠가 우리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모든 생명은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걸 사람들이 잊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최소한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채소로 끼니를 때우는 건 어떨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불편한 게 늘어난다. 나는 이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여 바꾸고 나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