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당신에게
영에게
영아, 넌 여전히 발소리를 죽이며 걷곤 하니. 어릴 적 여자애들은 발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너와 네 언니, 동생들은 낡은 마루가 무게에 눌려 삐걱거리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었다고 했지. 지금은 남동생과 한 상을 쓰니. 여자는 겸상을 하면 안 된다던 아버지 말에 따라 너와 네 언니, 동생, 어머니는 작은 상에 둘러 모여 밥을 먹었다고 했지. 여자가 해서는 안 되는 건 없어, 영아. 너는 보폭을 넓게, 조금은 강하게 발을 내디뎌도 돼. 기울고 소란스러운 건 마루의 잘못이지 네 잘못이 아니야. 세상은 마루가 아니기 때문에 너는 더 넓은 곳에 나가 힘껏 걸어야 한다. 삐거덕거리는 마루가 아니라, 집 뒤편에 있는 작은 대나무 숲이 아니라 더 드넓고 반짝이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영이 넌 지금 서울 근교에 단칸방을 얻어 겨울이면 연탄불을 올려 방을 데우고, 작은 반상에 허리를 둥글게 말고 앉아 라면을 끓여 먹겠구나. 어렵사리 취직한 회사에서 너를 좋게 본 상사가 사무실로 부서를 이동해주었다고 했잖아. 그런데 넌 잘 알지도 못하는 꼬부랑글씨가 너무 많고 두려워 다시 되돌아가고 싶다고 했지. 무서운 게 많은 영아, 배움이란 얼마나 값지고 재미있는 것인지 너는 잘 알아. 넌 무언가를 깨달을 때마다 기뻐하는 아이야. 넌 지혜롭고 똑똑해. 네가 삶의 여러 행복과 가치를 알았으면 좋겠다. 너와, 너의 언니 동생들과, 너의 친구들과 말이야. 아버지가 겹겹이 씌워놓은 속박의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해. 가끔은 크게 입을 벌려 웃기도 하고 큰 소리로 말을 하기도 해야 해. 말은 하면 할수록, 목소리는 내면 낼수록 또렷하고 선명해져. 성대가 열리며 터져 나오는 음성이 너의 작은 방을 넘을 때까지 쉼 없이 말해야 한다.
너도 사랑을 하겠지. 호기심에 무작정 따라가면 안 돼.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에도 기꺼이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남자의 그늘에 가려져선 안 돼. 휘둘려선 안 돼. 너를 울리는 순간, 곧장 그 자리를 빠져나와. 어떤 동정도 갖지 마. 너보다 값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난 너를 지키고 싶어. 가끔 시간을 돌리는 상상을 해. 40년 전으로 돌아가면 좋을 듯한데 말이야. 넌 사람을 잘 믿지. 내가 스무 살 적에도 그랬어. 부질없는 희망은 늘 가까이 있었어. 내가 가졌다고 믿은 것들. 가령 사탕 같은 것들. 벗기지 않아도 알아서 껍질을 벗고 알맹이를 내놓더라. 까 보면 별거 없었어. 어떤 것들은 심하게 부패해 비린내가 났단다. 어떤 것들은 너무 끈적거려서 몇 날 며칠 손에 비누칠을 하기도 했어. 내가 너무 세게 쥐려 해서 녹아버린 건지, 애초부터 볼품없는 설탕 덩어리였는지 모르겠어. 나는 그 후로 단 걸 찾지 않아. 단맛을 느끼면 뱉고만 싶어져. 미뢰가 둔해지는 걸까. 난 원래부터 이러지 않았지만, 오히려 지금의 내가 덜 불행하다고 확신해. 그러니 단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마. 탈이 나고 말 거야. 그게 별 볼일 없는 남자의 선물 같은 거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믿어. 참, 요즘 어머니에게 연락은 자주 하니. 너는 어머니를 좋아하지. 어머니도 너를 좋아해. 많은 형제 중 너를 가장 아끼셔. 생의 뒤안길을 건너기 전 네 이름을 부르실 만큼. 그러니 곁에 계실 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도록 해. 내가 아는 너는 사랑을 말하는 데 인색하지. 지금부터라도 연습해. 사랑이란 말은 입안에서 굴려보기만 해도 따뜻해져. 단어가 만들어 내는 온기가 꼭 내 것만 같을 때가 있어. 그러고 보니 너는 꼭 어머니를 엄마도 아니고 엄니라고 하잖아. 엄니. 어금니라는 발음 같기도 하고 소 울음소리 같기도 하다. 네가 엄니 곁을 오래 지켰으면 좋겠어. 후회는 걸음이 늦어. 뒤를 바짝 쫓기도 하고 하루, 혹은 일주일, 어쩌면 일 년 뒤에 느긋하게 찾아와 태연히 노크를 하기도 한단다. 그럴 때마다 허물어지지 않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해. 돌아오지 않는 것을 그리워하는 일은 고단하고 슬픈 일이니까. 영아. 아주 먼 미래에, 엄니의 부름에 반드시 답을 할 수 있기를 빌어.
제법 가을 티가 나는 계절이다. 아프지 마.
16년 뒤 태어날 당신의 딸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