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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Sep 09. 2021

영에게

스무 살의 당신에게

영에게


영아,  여전히 발소리를 죽이며 걷곤 하니. 어릴  여자애들은 발소리를 내어서는  된다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너와  언니, 동생들은 낡은 마루가 무게에 눌려 삐걱거리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었다고 했지. 지금은 남동생과  상을 쓰니. 여자는 겸상을 하면  된다던 아버지 말에 따라 너와  언니, 동생, 어머니는 작은 상에 둘러 모여 밥을 먹었다고 했지. 여자가 해서는  되는  없어, 영아. 너는 보폭을 넓게, 조금은 강하게 발을 내디뎌도 . 기울고 소란스러운  마루의 잘못이지  잘못이 아니야. 세상은 마루가 아니기 때문에 너는  넓은 곳에 나가 힘껏 걸어야 한다. 삐거덕거리는 마루가 아니라,  뒤편에 있는 작은 대나무 숲이 아니라  드넓고 반짝이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영이  지금 서울 근교에 단칸방을 얻어 겨울이면 연탄불을 올려 방을 데우고, 작은 반상에 허리를 둥글게 말고 앉아 라면을 끓여 먹겠구나. 어렵사리 취직한 회사에서 너를 좋게  상사가 사무실로 부서를 이동해주었다고 했잖아.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꼬부랑글씨가 너무 많고 두려워 다시 되돌아가고 싶다고 했지. 무서운  많은 영아, 배움이란 얼마나 값지고 재미있는 것인지 너는  알아.  무언가를 깨달을 때마다 기뻐하는 아이야.  지혜롭고 똑똑해. 네가 삶의 여러 행복과 가치를 알았으면 좋겠다. 너와, 너의 언니 동생들과, 너의 친구들과 말이야. 아버지가 겹겹이 씌워놓은 속박의 껍질을 깨고 나와야 . 가끔은 크게 입을 벌려 웃기도 하고  소리로 말을 하기도 해야 . 말은 하면 할수록, 목소리는 내면 낼수록 또렷하고 선명해져. 성대가 열리며 터져 나오는 음성이 너의 작은 방을 넘을 때까지  없이 말해야 한다.


너도 사랑을 하겠지. 호기심에 무작정 따라가면 안 돼.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에도 기꺼이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남자의 그늘에 가려져선 안 돼. 휘둘려선 안 돼. 너를 울리는 순간, 곧장 그 자리를 빠져나와. 어떤 동정도 갖지 마. 너보다 값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난 너를 지키고 싶어. 가끔 시간을 돌리는 상상을 해. 40년 전으로 돌아가면 좋을 듯한데 말이야. 넌 사람을 잘 믿지. 내가 스무 살 적에도 그랬어. 부질없는 희망은 늘 가까이 있었어. 내가 가졌다고 믿은 것들. 가령 사탕 같은 것들. 벗기지 않아도 알아서 껍질을 벗고 알맹이를 내놓더라. 까 보면 별거 없었어. 어떤 것들은 심하게 부패해 비린내가 났단다. 어떤 것들은 너무 끈적거려서 몇 날 며칠 손에 비누칠을 하기도 했어. 내가 너무 세게 쥐려 해서 녹아버린 건지, 애초부터 볼품없는 설탕 덩어리였는지 모르겠어. 나는 그 후로 단 걸 찾지 않아. 단맛을 느끼면 뱉고만 싶어져. 미뢰가 둔해지는 걸까. 난 원래부터 이러지 않았지만, 오히려 지금의 내가 덜 불행하다고 확신해. 그러니 단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마. 탈이 나고 말 거야. 그게 별 볼일 없는 남자의 선물 같은 거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믿어. 참, 요즘 어머니에게 연락은 자주 하니. 너는 어머니를 좋아하지. 어머니도 너를 좋아해. 많은 형제 중 너를 가장 아끼셔. 생의 뒤안길을 건너기 전 네 이름을 부르실 만큼. 그러니 곁에 계실 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도록 해. 내가 아는 너는 사랑을 말하는 데 인색하지. 지금부터라도 연습해. 사랑이란 말은 입안에서 굴려보기만 해도 따뜻해져. 단어가 만들어 내는 온기가 꼭 내 것만 같을 때가 있어. 그러고 보니 너는 꼭 어머니를 엄마도 아니고 엄니라고 하잖아. 엄니. 어금니라는 발음 같기도 하고 소 울음소리 같기도 하다. 네가 엄니 곁을 오래 지켰으면 좋겠어. 후회는 걸음이 늦어. 뒤를 바짝 쫓기도 하고 하루, 혹은 일주일, 어쩌면 일 년 뒤에 느긋하게 찾아와 태연히 노크를 하기도 한단다. 그럴 때마다 허물어지지 않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해. 돌아오지 않는 것을 그리워하는 일은 고단하고 슬픈 일이니까. 영아. 아주 먼 미래에, 엄니의 부름에 반드시 답을 할 수 있기를 빌어.


제법 가을 티가 나는 계절이다. 아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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