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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Dec 03. 2021

읽어주시는 분들께

12월의 편지


뼛속까지 한기가 들어 자꾸만 덜 굳어진 진흙처럼 늘어지고 옹송그리게 되는 계절입니다. 부산의 겨울은 따뜻하다 생각했는데, 적응을 하다 보니 어느새 이런 추위에도 몸이 약해져 잎이 빠진 나무 흉내를 내고 다닙니다. 이 글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흘겨보아 주세요. 너무 꿰뚫어 보려 하지 말아 주세요. 틈이 많아 작은 시선에도 금세 간파당하고야 마는 게 제 글입니다.


한낱 바람처럼 스쳐가는 생각들을 버릴 수 없어 짧거나 장황하게 늘어놓은 지는 꽤 됐습니다. 때로는 고독하고 때로는 즐거우며 때로는 서글퍼서. 이렇게 시시각각 돌변하는 감정을 기록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 건 이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박학한 시네필도 아닌 제가 영화를 보고 글을 적는 것 또한 기록하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단순히 시간을 죽이기 위해 틀었던 영화라 할지라도 짧게 몇 줄 적고 나면 흔적 없이 날아갔던 시간의 꼬리가 눈에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타인에게 나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제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 생각하는 인간으로 나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걸 실감하기 위한 나름의 방안입니다. 언어의 세계를 확장하려는 욕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비슷한 단어로 문장을 이뤄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자주 발음하는 것들만이 입에 익기 마련입니다. 새 신발을 길들이는 것처럼 언어도 길들여야지요. 쉽게 도태되는 언어의 길을 끊임없이 갈고닦아야 합니다. 어릴 적에는 말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유창하게 말을 뱉는 행위는 저 같은 사람에게 큰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어서, 마음 한 구석에 입 밖으로 튀어나가지 못하고 실컷 팽창한 이야기들이 축적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려는 걸지도 모릅니다.


원대한 목표가 없어도 삶은 허무하게 흘렀습니다. 가끔은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하염없이. 그렇게 서른이 되니 작은 동기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활달하게 순환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매년 다이어리를 구입했습니다. 끝마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요. 색색의 펜들로 하루 있었던 일들을 메시지처럼 남기고 나면 후련하게 잠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원체 끈기가 없고 매일 처음 겪는 하루를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거든요. 어떤 날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어떤 날은 생각이란 걸 하고 싶지 않다는 핑계로 종이를 낭비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낭비는 자기 만족감을 충족시켜준다고 하지만 최후에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습니다. 제가 짤막하게 적어두었던 매년 1월의 일과들은 어느 소각장으로 흘러 들어가 영영 재가 되었을 겁니다. 지금은 태우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글을 적음으로써 나와 시간을 기록하고 기억하려 합니다. 생각의 궤적을 오래 보관하고 싶습니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볼 때마다 손발이 불에 덴 오징어처럼 쪼그라듭니다. 과분합니다. 저는 적는 게 취미인 사람일 뿐이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작가’란 글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 사람입니다. 설령 작은 감정이라 할 지라도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제가 적는 이것을 ‘글’이라 부르는 것도, ‘작가’라 불리는 것도 제게는 자격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처음 올린 글이 운 좋게 많은 사람들 눈에 띄었습니다. 밑에 달린 댓글들을 읽으며 신기했습니다. 하나하나 답글을 달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그냥 두었습니다. 아무런 공통점 없는 누군가와의 소통이 어색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만 덜렁 달아두자니 성의가 없어 보일까 싶었고, 이것저것 물어보자니 괜한 오지랖으로 비출까 싶어 조용히 보기만 했습니다. 핑계처럼 들릴까요. 뒤엉킨 내면을 소문내고 싶어 하면서도 끝내 숨고 싶어 하는 제가 모순일까요. 제가 쓰는 글들은 방향이 없습니다. 혼잣말처럼, 편지처럼, 딱딱한 설명서처럼 휘어진 가지들이 이리저리 뻗어 나갈 겁니다. 그러면서 쓰레기 같은 초고에 살을 붙이고 가시를 빼가며 그나마 글처럼 보이기 위해 애쓸 겁니다. 이건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자 공간에 대한 예고입니다.


당신이 어떤 경로로 흘러 들어와 지금 이것을 보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현재는 밤입니까, 낮입니까. 당신은 쓰는 사람인가요, 읽는 사람인가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당신이든 간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를, 혹은 몹시 치졸하고 모자란 이야기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우리 오래오래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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