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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Jan 16. 2022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4.4> 

     

“나는 어디에서 죽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딘가에서 전시를 준비하다 죽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주 먼 나라에 있을 것 같군요. 울란바토르에서 회고전을 준비한다거나요. 늙은 광대처럼, 언제나 여행하다 길 위에서 죽는 거예요.” - 2018년 히로시 스키모토와의 대화 중에서        


  

지난 주말, 삼월과 부산 시립미술관에 다녀왔다. 뜬금없이 미술관에 간 이유는 따로 없었다. 업무 차 외출을 할 일이 생겨 나간 김에 그냥 들어오긴 아쉬우니 어디라도 들리자는 생각에서였고, 그 전날 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를 살펴보던 중 흥미로운 주제의 전시가 있어 그곳으로 목적지를 정한 것이다. 부산 시립미술관은 무료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더없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내가 궁금했던 전시는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라는 작가의 전시였다. 타이틀 ‘4.4’는 그가 태어난 해 1944년을 의미한다. 그는 한국 전시를 준비하며 한국에서 숫자 4가 死(죽을 사)와 발음이 같아 죽음을 상징하는 숫자라는 것을 흥미로워했다고 한다. 그는 전시 디자인을 마치고 2021년 7월 14일 7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부산에서의 전시가 첫 유고전이 된 셈이다. 그는 쇼아 작가다. 쇼아란 유태인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다. 1944년 9월 6일 태어난 그는 쇼아(Shoah)라는 트라우마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접하게 된다. 나라는 전쟁과 학살의 상흔으로 가득했을 것이며 평화를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는 수많은 죽음 사이에서 탄생한 것이다. 죽음이란 뭘까. 나는 종종 잠들기를 망설이곤 한다. 지금 눈을 감았다가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사소한 불안이 생각을 잠식하곤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어릴 때는 몰랐던,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죽음들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으며 생긴 두려움일 것이라 예상만 할 뿐. 지켜야 할 것,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긴 탓일까. 피로하지만 눈이 감기지 않는 어느 새벽, 그런 생각을 하며 뒤척이다 곁을 찾아온 고양이의 등을 만지며 잠이 든다. 잃고 싶지 않은 것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는 새벽이란 참으로 안온하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것. 불현듯 곁에 도착해 어깨를 잡아 돌리는 것. 사람들 모두 이 불청객의 방문을 두려워하리라 믿는다.      



전시장 입구에는 그가 디자인 한 ‘출발’이라는 작품이 걸려있었다. 한글로 ‘출발’이란 단어 획에 전구가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 관객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하기 위한 이정표였다. 그리 걸어 들어가면 컴컴한 내부에 ‘기념비’라는 작품이 장식하고 있었다. 누군지 모르는 어린아이들의 웃는 얼굴이 액자에 담겨 있었으며 그 아래로 백열등이 빛나고 있었다. 그를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라는 해설을 읽었다. 일반적으로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어린이의 사진들로 알려져 있으나 이 시리즈의 주제는 ‘어린 시절의 죽음’이라고 한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어린이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꼭 어린이가 죽어야만 하는 걸까.”

 “그렇다면 난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아.”

 “어른이 되면 우리 안의 순수성이 사라진다는 뜻 같지. 마치 어른의 성숙과 어린이의 순수를 맞바꾸는 것처럼.”     


살짝 음울하기까지 한 이 전시로 인해 우리 사이에 흔하지 않은 대화가 흐르는 게 좋았다. 죽음에 관하여. 소멸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이 되었는지에 대하여. 어쩌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 번이나 죽음을 맞이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영영 어른이 되지 못하고, 영영 불완전한 어른으로 살다 완벽한 죽음의 강으로 발을 헛디디는 건 아닐까.      


기념비

그의 전시는 어린아이들의 사진이 많이 활용되었다. 기념비 시리즈를 비롯해 ‘저장소: 퓨림 축제’, ‘함부르크 거리 제단’, ‘커다란 저장소’ 등 치아가 훤히 보일 정도로 크게 입을 벌린, 광대가 봉긋 솟아오른 아이들의 사진이 흑백으로 처리되어 영정 사진을 연상케 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도처에 죽음을 두고 살았을 것이다. 채 어른이 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어린아이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의 유년기를 생각하면 그의 작품 세계를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 장소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거친 기침 소리가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기도를 칼로 베여 숨구멍을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 짧은 단편 영화 ‘핥는 남자’와 ‘기침하는 남자’를 지나면 ‘유령의 복도’가 나타난다. 양쪽이 하얀 커튼으로 가려져 있고 기괴한 형상을 한 조형물들이 바람에 흔들거린다. 그것들은 악마 같기도, 사자 같기도 했다. 어느 지점을 지나느냐에 따라 그들이 고개를 돌리고, 팔을 흔들었다. 작가는 관객을 영원의 세계로 인도하려 했다. 우리가 요단 강을 건너며 마주칠지도 모를 죽음의 신을 흉내 낸 유령의 형상들. 그들을 지나 ‘황금바다’를 목격했다. 사실 어떤 해석도 내놓지 못하겠으나, 천장에 달린 전구가 슬렁슬렁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빛의 각도에 따라 금박의 산이 바다가 출렁이는 모양새를 했다.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공간에서, 나는 잠시 윤슬에 둘러싸인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면 어디선가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컴컴한 공간 안에 희미한 전구 하나가 박동에 맞춰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빛은 흐릿했고 심장 소리는 빠르고 아슬아슬했다. 생동하는 것이 아니라 곧 죽어갈 것처럼. 숨이 끊어질 것처럼. 벽면은 까만 거울로 이루어져 있었고 전구가 번쩍일 때마다 그 안에 있는 우리의 그림자가 보였다 사라졌다. 곧 꺼질 듯 가쁘게 빛났다 사라지는 빛과 심장 소리. 심장 박동은 작가의 것이라 했다. 분명 생명을 뜻하는 소리였으나 우리의 귀에는 곧 숨이 멎을 사람의 소리 같았다.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의 것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목덜미가 차가웠다. 

     

유령의 복도
황금바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저장소: 카나다’였다. 카나다는 억류된 유대인의 개인 소지품을 남겨 둔 창고에 나치가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광활한 벽 한쪽을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옷들이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카나다. 곰팡이도 아닌, 쿰쿰한 방부제 냄새가 가득했다. 1988년 작품을 한국에서 다시 제작했다고 하였으나 무수한 옷들을 실제로 소지품을 빼앗기고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의 물건들이라 생각하면 기분이 묘했다. 발가벗겨져 내던져진 시신이 투영되어 보였다. 곧 이름 없이 화장터에 처박힐 시신들. 학살의 일부가 우리 눈앞에 있었다. 독재자 앞에 무참히 스러져 간 죄 없는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다. 주렁주렁. 그들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존재하기만 했다. 옷으로. 기억으로. 볼탕스키는 계속해서 우리를 죽음 앞에 데려다 놓았다. 색이 바랜 죽음들 앞에서 우리는 겸허해지고 숙연해진다. 설령 그것이 창조된 조형일뿐이라 해도, 우리는 그것을 통해 현실을 보았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가면 ‘탄광’과 ‘인간’이란 작품이 한자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사람들의 흑백 사진이 옅게 프린트된 천들이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바람을 따라 하늘하늘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제목 그대로 탄광처럼 새까만 더미가 있었다. 700kg가량의 검은 옷들을 사용해 이번 전시를 위해 부산에서 재제작되었다고 한다. 개성이라곤 없는 옷들이 산처럼 쌓여 공간의 채도를 낮춘다. 그 위로 90여 명의 이미지가 영혼처럼 부유한다.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나는 그것이 학살된 이들의 시체와 그 위를 떠도는 혼령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고개를 들어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들의 흑백 사진들을 올려다보는 사이 끊임없는 방울 소리에 이끌려 ‘아니미타스’ 앞에 섰다. 아니미타스는 러닝타임 13시간의 비디오 화면으로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을 담고 있다. 사막에는 수백 개의 방울이 바람에 흔들려 미약한 울음을 내고 있었다. 이곳은 아우쿠스토 피노체트의 독재 하에 살해된 수천 명의 정치범이 묻혔으며 많은 사람들의 유해가 오늘날까지 행방불명 상태라고 한다. 작품의 이름인 ‘아니미타스’는 스페인어로 ‘작은 영혼’을 의미하지만 칠레에서는 사막 고속도로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게 헌정된 이름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그 앞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방울 소리와 사막의 전경을 보다 가곤 했다. 우리도 자리에 앉았다. 영상 속 사막은 바람이 쉼 없이 불었다. 따라서 방울 소리도 멈추지 않았다. 그곳에 매몰된 영혼들의 소리라고 해야 할까. 아니, 너무 장황하다. 소리는 영혼의 밀집을, 영혼의 존재만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뿐이다.      


카나다
인간/ 탄광
아니미타스


마스크를 쓰기 시작한 지 2년이 넘어간다. 코로나가 발생하고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던 사망자들. 그 당시 뉴스 기사를 통해 시신을 둘 장소가 없어 무작위로 화장하는 인도의 사진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 죽음은 우리 도처에 있다. 간접적이지만 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나와서인지  죽음이 어디까지 왔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죽음의 냄새, 모습. 사람들은 죽기 전 지난 인생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들 하던데. 과연 그럴까. 내가 4.4에서 본 죽음의 모습은 쓸쓸하고 허무하다. 아마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한 탓일 터다. 뜻하고 원하는 바를 채 이루지 못하고 떠나야 했기에 그 죽음들은 외로운 거라고. 일상생활을 살면서 ‘죽음’이란 단어를 불길하다는 이유로 꺼내거나 탐구해보지 않았는데, 이번 전시 덕분에 깊게 사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기억은 언젠가 나의 영감으로 발현할 것이다. 해당 전시는 부산 시립미술관에서 3월 27일까지 진행된다. 



작품 감상하는 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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