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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Dec 11. 2021

개를 거꾸러뜨리다

<파워 오브 도그>



*해당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연차를 낸 수요일, 밥을 먹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나니 시간이 비더라. 그래서 소파에 드러누워 두툼한 겨울 이불을 덮고 영화를 시청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넷플릭스 영화 <파워 오브 도그>. 지난 베니스 영화제에서 첫 공개되어 감독상을 수상하고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 다수 부문 후보작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해당 작품이 극장에서 선 개봉할 즈음 누가 나에게 이 영화를 꼭 보라고 했었다. 나는 영화를 추천받으면 짧게나마 감상을 적어 추천인에게 전하곤 하는데, 아마 그 의견을 받는 재미로 그가 나에게 자꾸 영화를 추천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마초이즘에 찌든 남자들이 그들의 세계랍시고 허세 부리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 영화 중에서는 <신세계>와 같은 누아르 장르가 그런 쪽일 테다. 여자는 철저히 배재된 채 남자들의 권력과 힘, 잔혹성을 바탕으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를 몸소 보여주는 영화들. 잘 빠진 수트를 입고 나와 상대방의 배에 가차 없이 칼을 찔러 넣고 누군가는 배신을, 누군가는 의리를 지키는 흔한 소재. 언젠가부터 그런 것들이 식상하게 느껴졌다.


*물론 2013년 신세계 개봉 당시 재미있게 관람을 했었고 최근에 누아르의 원조격이라는 무간도도 집중해서 봤다. 아마 그 이후 비슷한 소재들이 별 다른 시도도 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등장하니 질린 듯하다. 나만 그런 건 아닐 테지.


미국 영화로는 서부극이 단적인 예다. 그래서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넷플릭스 공개 당일 삼월이 먼저 이 영화를 보고 대략적인 스토리를 설명해주었고, 그 후에야 나도 이 영화를 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영화는 1925년 미국 몬타나를 배경으로 하여 총 네 명의 중심인물이 등장한다. 목장 경영으로 성공한 형 필과 동생 조지. 형제의 성격이 굉장히 달라서 주목할 만하다. 필은 거칠고 야생적인, 앞서 말했던 마초 그 자체다. 한편 조지는 하루의 피로를 반신욕으로 해소하는 고상하고 얌전한 인물로 필과 대조적이다. 이 형제 사이에도 미묘한 권력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듯 보였는데, 중간에 필의 행동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가령 조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몹시 불안해하고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건배사를 할 때에도 동생이 없으면 입을 열지 않았다. 게다가 다 큰 중년 남성 둘이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자기까지 한다.


그러던 중 로즈와 피터가 스크린에 등장한다.

로즈는 남편과 사별한 후 홀로 식당을 운영하며 아들 피터를 키운다. 의대생인 피터는 종이로 꽃을 만들 줄 아는, 섬세하며 유약한 인물로 (처음에만) 비친다. 이 작품에서 피터라는 인물이 참 신비로웠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표정 변화가 적고 고요한 데다 강풍이 불면 손도 쓰지 못하고 훌렁 날아갈 것 같이 연약해 보였지만 품에 안고 있던 토끼의 배를 망설임 없이 갈라 해부학 재료로 사용한다던가, 다리를 다친 토끼에게 평화를 주고자 단숨에 목을 꺾어 버리는 등 동정이라곤 일절 없는 모습을 보이면서 관객이 인지하고 있던 것들을 조금씩 꼬아 가기 시작한다.


어느 날 로즈의 식당에서 필이 피터가 만든 종이꽃을 가지고 조롱하고 모욕한다. 필이 가진 권력 때문인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 그들의 시선에서는 햇빛이라곤 쬐어 본 적도 없을 법한 창백한 얼굴에 비쩍 마르고 조용한 소년이 남자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린애에게 무안을 주는 것이 약자를 대하는 ‘진정한 남자’들의 방식인가. 그들이 말하는 ‘남자’가 대체 무엇이길래. 그 상황에 수치심을 느낀 피터는 뛰쳐나가고 로즈는 부엌 한편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운다. 그런 그녀를 조지가 달래면서 두 사람은 연을 맺고, 결혼까지 한다.


그렇게 로즈는 형제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된다. 본격적인 미국판 시댁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결혼을 했으면 분가를 하지, 조지 이 모자란 놈아…) 사실 필은 학대에 특화된 인물이다. 예일대 고전학과를 졸업한 고학력자로서 머리가 똑똑한 만큼 남을 괴롭히는 자세도 몹시 훌륭하다. 사람 자체를 제 아래로 보는 것은 물론 동생인 조지에게는 ‘뚱보’, ‘돼지’라 부르며 신체적 열등감을 갖도록 하고, 피터에게는 부족한 남성성을 갖고 꾸준히 조롱하며 로즈에게는 ‘꽃뱀’이라 칭하며 괄시한다. 각별하던 형제 사이에 (필의 입장에선 천하다고 할 수 있는) 여자 하나가 끼어들었으니 속이 상할 수야 있겠지마는 분노를 표현하는 자체가 굉장히 괴팍하고 잔인하다. 필은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온 먹잇감인 로즈를 교묘하게 옥죈다. 대표적인 예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로즈 주변에서 같은 노래로 기타를 연주하며 맴돈 것이다. 그로 인해 위축된 로즈는 중요한 자리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지 못 한다. 물리적인 폭력을 휘두른다면 멍 자국을 증거로 내밀 수나 있겠는데, 심리적인 압박은 뇌를 뒤집어 까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로즈는 필의 발자국 소리, 휘파람 소리만 들어도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지경까지 이른다. 이런 고단한 생활을 술로 견디기에 이르고 방학을 맞은 피터가 집에 머무르며 영화는 아주 조용히, 그러나 소름 끼치게 새로운 방향으로 핸들을 돌린다.


이 작품에서 필이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이름이 그의 정체성에 대한 힌트라고 할 수 있다. ‘브롱코 헨리.’ 필은 늘 그 이름을 달고 살며 그를 동경하고 예찬한다. 아무도 오지 않는 자신만의 아지트에서 B.H라는 이니셜이 새겨진 손수건을 목에 감고 목욕을 하는 필. 한편에는 나체의 남자들이 그려진 잡지가 몇 권 쌓여있었다.


미국 하이틴 드라마에는 꼭 게이인 인물에게 직접적인 폭력과 혐오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덩치 큰 남자 애들이 나온다. 지독한 호모 포비아인 줄 알았던 그놈도 알고 봤더니 진짜 게이이고. (대표적으로 스무 살에 열심히 봤던 ‘글리’라는 드라마가 있다.) 내가 말한 ‘덩치 큰 남자 애들’은 이 작품에서 ‘필’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기 위한 모습의 일환으로 남성성에 집착하며 오히려 소수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게 올바른 것인가. 1920년대라면 동성애는 더욱 금기됐으며 세상에 존재함에도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 중 하나였을 테니 한편으로 필이 이해도 된다. 하지만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자신을 숨기는 필을, 나는 동정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한 부분이 공개되면서 필이 사실은 옛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무척 여리고 외로운 남자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동생에게 의존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지 않을까.


필이 자신의 비밀을 피터에게 들키게 되는 순간부터 둘 사이의 기류가 조금씩 바뀐다. 피터가 집 앞 산 봉우리를 보고 ‘개’의 형상이 보인다는 말을 한 시점에는 필의 얼굴에 확신이 가득 찬다. 피터는 그때부터 자신이 세웠던 계획을 차근차근 이행해간다. 극 초반 피터가 굉장히 고요하고, 그 속에 무엇이 들었을지 모를 강물 같은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강물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산양은 필이었다. 먹이사슬 관점에서 제일 꼭대기 층에 있는 짐승이 최약체에게 삼켜지는 꼴을, 우리는 잔잔하고도 매혹적인 음악과 영상으로 마주하게 된다.


필의 장례식 이후 피터가 성경책을 읽는 장면이 나온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기독교에서 ‘개’를 사악한 존재로 해석하기도 한다던데, 그렇다면 피터에게 ‘개’는 필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필에게 ‘개’란 로즈였을 테고. 결국 피터가 ‘개의 세력’으로부터 어머니를 지켜낸 것이다.


이 영화에서 총 세 명의 남자를 통해 남성성을 각자 다르게 해석한 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진정한 남자’란 과연 무엇일까. 남성성, 혹은 여성성은 어쩌면 예부터 철저하게 짜인 허구가 아닐까. 우리에게는 성별의 제약과 한계를 깨뜨릴 의무가 주어진 것만 같다.


며칠  삼월과 와인을 마시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녀의 견해가 나와는 달라 재미있었다. 필은 피터가 준비한 소가죽에 묻어있던 탄저균에 감염되어 죽고 만다. 그런데 삼월은 필이 알면서도 가죽을 만졌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피터와 로즈에게 한 행동을 속죄한다는 의미로. 필이 피터를 사랑해버리고 말았으므로. 술을 곁들인 대화였기에 자세한 근거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옛사랑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꾸준히 복기하는 남자이니,  그런 것도 같고.


*기억에 남는 장면. 필과 피터가 담배를 나누어 피우는 씬. 나른한 피터의 눈꺼풀과 푸른 눈동자. 하얀 손가락이 담배를 말아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파스스 타 들어가는 담뱃불을 필이 바라본다. 피터가 제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필에게 내밀고, 필은 피터를 응시하며 담배를 입에 문다. 두 사람의 얼굴이 교차되는데, 묘하게 섹슈얼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거기서 필을 맡은 배네딕트 컴버배치의 눈빛이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깊고 빛났다고 해야 할까. 그 아저씨는 왜 평소에는 오이 같다가 연기만 하면 잘생겨 보이는지 의문.  


*주인공에게 맞는 말, 병에 걸려 죽은 소의 사체, 토끼의 내장 등이 등장한다. 동물에게는 굉장히 폭력적인 영화. 뭐, 윤리적으로 잘 찍었으리라 믿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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