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사는 여자
“면접 보러 왔는데요.”
문을 열고 들어선 사무실은 무척 어수선했다. 이곳이 동아리 방인지, 피시방인지 헷갈릴 만큼 젊은 청춘들이 모여 있었다. 특히 팀장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긴 생머리, 뿔테 안경, 헐렁한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걸음걸이가 어째선지 삐딱해 보였다. 그에 대한 첫인상은 이게 다다. 당시 살고 있던 집 계약 기간이 끝나갈 무렵이라, 몇 달 정도 월세를 벌기 위해 다니다 그만 둘 생각이었다. 면접을 볼 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젊은 CEO가 이끄는 회사라 그런지 직원들의 연령대가 낮아 거의 또래였다. 팀장은 알고 보니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대수롭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퇴사를 할 예정이었으니까. 팀장은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나이차가 꽤 많이 나는 외국인. 굉장한 아메리칸 마인드군. 밥을 먹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쯤 내가 즐겨보던 넷플릭스 시리즈가 있었는데,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과 팀장의 인상착의가 비슷해서 드라마를 보다 문득 떠올리곤 했다. 뿔테, 검고 긴 머리…. 여자치고 낮은 목소리. 그녀와 처음 술을 마신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우리 팀에는 나와 팀장 말고 술을 즐기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가까워진 건 술이라는 매개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잔을 앞에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래 사람과의 관계는 급격히 가까워질수록 위험하다. 우리도 조금, 급했다. 그러나 위기감 같은 건 없었다. 어차피 지나갈 시절 인연 중 하나겠지 치부하면 그만이었으니. 우리는 술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다녔고 그녀는 사회가 강요하는 ‘여자’의 모습에서 한 단계 벗어나 있었다. 새로웠다. 나는 사회적 여성성으로부터 탈피하고자 다짐, 그리고 차분히 실행에 옮기던 중이었고 그녀는 어릴 적부터 그런 껍질조차 한 번도 걸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자유로움에 동경인지 호감인지 질투인지 선망인지 모를 복합적인 감정들을 느끼며 나의 탈피 행위에도 속도가 붙었다. 우리는 부딪히는 면도 있었다. 당시 나의 최대 관심사는 ‘페미니즘’이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급진적인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페미니즘에 대해 일절 모르던 사람이었다. 되레 내게 당신은 여성 우월주의자 같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녀와 나의 세상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차별을 겪은 적이 없었다. 회사를 다니며 한 번도 여자가 커피를 타야 한다는 둥, 여자란 본디 얌전해야 하며 요리는 기본적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등의 말도 들어보지 못하고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난 애초에 그녀를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나의 생각을 전달했을 뿐. 그러다 보니 그녀는 서서히 사회 기반에 깔려 있는 불평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우리의 공통점이 하나 더 만들어졌다.
그녀가 처음 내가 사는 집에 오게 된 이유는 술이었지만 눌러앉게 된 까닭은 솔이었다. 같이 잠을 자기엔 퍽 가깝지 않았던 우리가 처음 한 집에서 잠을 자게 된 날, 나는 방에서 그녀는 거실에서 잠을 청했다. 내가 방을 내어준다고 했지만 기어이 거절을 하더니 청바지를 입고 아무렇지 않게 소파에 눕는 그녀를 보고 ‘저렇게 불편한 차림으로 잘 수 있나.’ 걱정을 했더란다. 솔은 우리 둘 사이의 여백을 슬렁슬렁 거닐었다. 그뿐만 아니라 초면인 그녀에게 호감을 표하기도 했다. 동물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그녀로서는 얼굴 앞에 대뜸 제 엉덩이를 들이미는 솔에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얄미울 정도로 새침한 나의 고양이가 무슨 일인지 그녀가 잠든 사이 그녀의 옆구리 사이를 파고들어 똬리를 틀었고, 작은 생명이 그녀를 다른 세계로 인도했다. 그 후, 내가 집을 비울 때면 그녀가 잠시 집에 들러 고양이를 봐주곤 했고 더 나아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옷 한 벌, 속옷 한 장. 그러더니 내가 집을 옮기던 날에는 내 짐과 그녀의 짐이 뒤섞여 있었다. 각자의 물건들이 경계를 잃고 어우러져 있었다. 이사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게 3년 전 일이다.
우리도 간혹 싸울 때가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초반에도 많이 싸웠다. 게다가 서로 화해까지 도달하기 위한 각자의 방식이 달라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녀는 갈등이 발생하면 즉시 대화를 해야 하는 성격이다. 반면 나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 사이 내가 화가 난 이유, 상대방에게 해야 할 말을 정리하고 감정을 추스른 다음 대화를 해야 한다. 어찌 보면 창과 방패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해서 비브라늄으로 만든 창과 방패는 아니기에 차츰 뭉툭해지고 물렁해졌다. 지금은 시간적 여유를 가진 뒤 대화를 이어 나가는 편이다. 그렇게 성사된 대화는 또 얼마나 치열한지. 판사 없는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의 공방이 연속된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한 발 물러서는가. 때에 따라 다르다. 내 잘못이 분명할 때는 내가 먼저 발을 뒤로 빼지만, 서로의 잘못이 맞물린 경우에는 삼월이 양보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론적으로 어릴 적 내 고집이 여전하다는 것이고 그녀가 너그러이 봐주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비 패턴은 또 어떤가. 그녀가 무조건 GO라면 난 일단 멈춤이다. 이는 이번 이사 준비를 계기로 정확히 알게 된 사실이다. 우리가 이사를 갈 새 집은 세탁기와 냉장고가 없어 장만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짐을 옮기는 날은 5월 10일. 아직 한 달가량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와, 여러 회사의 제품을 둘러보고 구매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일주일 전, 삼월이 하루 날을 잡아 부산 내 가전제품 매장을 순회하듯 돌자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바로 세탁기를 샀다! 수중에 돈이 그다지 많이 없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협소하긴 했지만, 다각도로 구매 경로를 알아보고 싶었던 나와 달리 그녀는 우리의 상황, 제품의 기능과 가격만 보고 바로 구입을 결정했다. 그녀는 확신을 가지면 곧장 행동으로 실천한다. 마트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래 끌 것 없이 간결하게 가격을 비교한 뒤 바로 카트에 넣는다. 나는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대체할 수 있는 것도 보고…. 뭐든 느리고 신중하다. 그래서 고양이 사료나 모래는 내가 깐깐하게 따져 보고 선택지를 구성한 뒤 그녀가 최저가를 찾아 계산을 한다. 영화를 감상하는 방식도 다르다. 함께 밥을 먹으며 영화를 볼 때에도 나는 무엇이 재미있는지 검색하고 고민해 선택하는 스타일이라면 그녀는 눈에 띄는 것 아무거나 고른다. 그 후의 모습도 차이가 있다. 난 하루에 영화 한 편 이상을 감상하지 않는다. 영화를 본 뒤에는 감독, 배우, 내용,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다 찾아봐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고 그녀는 영화 한 편을 보고 바로 다른 영화를 골라 본다. 그리고 무엇 하나 꽂히면 하루 종일 그것만 한다. 최근에는 레드벨벳 신곡에 꽂혀 차에서도 그 곡을 반복해서 듣는 중이다. 마블에 꽂히면 종일 마블 영화만 재생한다. 고도의 집중력과 저돌적인 실행력, 신속함. 나와 맞지 않다.
그녀는 한편으로 자신만의 주관이 분명하고 굳건한 자존감을 지닌 사람이다. 그녀를 보며 사과를 하는 행위도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자존심만 셌지, 속이 뒤틀려 있는 사람이었다. 어떠한 열등감, 조바심에 등을 떠밀리 듯 살았던 내가 그녀와 지내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 고마움을 표현하는 일을 체화했다. 그녀는 배울 게 많은 사람이었지만 난 우리의 관계가 오래 지속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 못지않게 나 또한 내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었으며 타인과 내 삶을 공유하는 것도 모자라 공간, 물건까지 나누는 게 달갑지 않았다. 나는 선 긋는 걸 좋아할뿐더러 누군가의 삶에 관여하고 싶지도, 누군가가 내 삶에 끼어들 틈도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사람 일이란 건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시나브로.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어느 순간 내가 정의하지 않은 관계가 시나브로 내 삶의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가끔 반항적으로 때로는 순종적으로 나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확실한 건 혼자보다 둘이 낫다는 거다. 금전적인 부분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전이라면 타지에서 대상 없이 나 홀로 부정적인 감정들을 절구통에 꾸역꾸역 밀어 넣어 빻았을 터인데, 지금은 그녀 앞에서 와인 한 잔을 앞에 두고 설탕처럼 뿌리고 녹인다. 용해된 감정들을 잔에 담아 음미하듯 삼킨 뒤, 자고 일어나면 어느덧 삶의 부속물처럼 냄새나는 감정들이 휘발하고 난 자리에 행복을 채울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게 소용이 없을 때도 더러 있다. 인간이 복잡한 동물인 건지, 내가 엉켜있는 동물인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소란한 행복의 소음들로부터 멀어져 정적을 이불 삼아 밤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오로지 혼자만의,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너그럽게도 삼월이 바닷가가 잘 보이는 숙소를 이틀 정도 잡아주어 홀로 보내고 온 적이 있다. 그게 벌써 2년 전이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린 걸까. 속절없고 무책임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책임을 다하며 살아왔다. 후회는 없다. 1월 1일의 해를 네 번이나 함께 맞이했다. 앞으로 얼마나 무수한 해를 나란히 보게 될까. 다르다는 것. 부딪힘에 망설임이 없다는 것. 이 격렬한 과정 속에 쪼개지지 않고 하나로 결합될 것이라는 것. 그녀는 내가 보지 못하는 시야를 가졌고 내가 앞으로도 해야 할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선택지를 제시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겪을 수많은 갈등 끝에 결국 올바른 최선을 찾게 될 것이다. 사공이 둘이어서, 우리의 배는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녀가 내 평생 소중한 편이자 귀감으로, 오래도록 곁에 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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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과 알렉스가 닮았다 X
뿔테 안경, 긴 생머리가 일치한다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