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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Mar 30. 2022

춘삼월에는 가족을 떠올리세요

동생에 대한 짧은 이야기

동생과 나는 4살 터울이다. 동생이 태어날 무렵 아버지의 공장이 부도가 나면서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다. 이는 우리 둘의 돌 사진만 비교해보아도 알 수 있다. 내 돌 사진에는 거대한 과일이 산처럼 쌓여 있고 떡이 높다란 탑을 이루고 있으며 색동 한복을 입은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동생의 돌 사진은 겨우 구색만 갖춘 꼴이라 내 사진에 비해 초라하다. 또한 내 사진첩을 넘기다 보면 제주도 식물원에서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를 볼 수 있다. 넓은 공장 부지를 배경으로 멀뚱히 서 있는 아이도 볼 수 있다. 아빠와 볼을 맞대고 까르르 웃고 있는 아이도 있다. 전부 나다. 동생은 태어나자마자 가난의 한 구덩이에 내던져진 거다. 그럼에도 그 애는 교우 관계가 원만했고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출중한 대학에 들어가 역시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다 취직했다. 좋은 유전자가 다 저기로 갔나 싶을 정도로 잘 자란 녀석이다. 마음속 어떤 흉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표면상으론 그렇다. 엄마는 전부터 잘 우는 동생을 늘 걱정했다. 실상 나나 걔나 잘 울었다. 대신 나는 고집을 부리거나 악다구니를 쓰는 경우가 잦아서 엄마는 내가 밖에 나가 그릇된 행동을 할까 봐 걱정을 하곤 했다. 동생은 이 험한 세상 어디 가서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염려를 했고. 지금도 변하지 않은 엄마의 고민이지만, 난 사회에서 언사로 인해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고 동생은 제법 단단하게 자라 문제적 상황에서는 과감히 욕설을 뱉을 줄 아는 사내가 되었다.


지난 주말 동생이 부산에 놀러 왔다 갔다. 친구들은 남매 사이가 좋아 보인다고 했다. 우리 남매는 큰일이 없는 이상 연락을 자주 주고받지도 않고, 그렇다고 고민을 시원히 터 놓지도 않는다. 알아서 잘 살겠거니 한다. 실제로도 알아서 잘 사니까. 어릴 때도 크게 싸우는 일이 없었다. 엄마는 큰 고생 없이 남매를 키웠다고 한다. 둘 다 순해서 사고를 치는 일이 없었다고. 엄마가 일을 할 때면 어린 남매에게 과자 값을 쥐여 동네 슈퍼에 보내곤 했는데, 그때마다 두 손을 꼭 붙들고 다녀 슈퍼 사장님께 칭찬을 받았다. 서로 몸이 커진 뒤에는 손을 잡기는커녕 어깨를 붙이는 것조차 기겁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부모님이 없는 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인 게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 사이에 서로의 일이 바빠 약 6년가량의 텀을 두고 만 탓이었다. 둘 다 아빠의 주량을 닮아 술 마시는 것도 좋아하고, 술도 쉽게 마시는 편인지라 새벽까지 와인을 마시며 지난 이야기들을 했다. 룸메이트인 삼월도 함께였다. 삼월도 우리 부모님을 본 적이 있다. 이주 전, 삼월의 친구들 모임이 있어 청주에 갔다가 오는 길에 본가에 잠시 들렀다. 그녀에게 우리 부모님은 상당히 좋은 인상으로 남았던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빠가 암으로 인해 금주를 한 뒤부터 집안이 조용해졌다. 우리 부모님은 좋은 사람들이다. 과거의 부모님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가난과 부채가 그들을 생의 투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겼다. 요즘은 승자의 여유가 만연하다. 너그러움은 여유로부터 나오는 게 확실하다. 과거를 회상하다 보면 ‘그땐 그랬지.’가 아니라 ‘그땐 왜 그랬지.’, ‘그때 그래야만 했나.’ 같은 원망이 섞여 든다. 이미 저 편에 불행한 기억들을 무덤으로 만들고 용서란 비석을 세워 두었지만, 간혹 땅이 꿈틀거리는 것만 같다. 그렇지만 파헤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남매가 모였으니 어쩔 수 없이 부모님 얘기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삼월은 내 이야기 속 부모님과 현저히 다른 부모님에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제 3자는 완벽히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감정은 경험을 해 봐야만 깊이 알 수 있다. 사랑도, 미움도, 일종의 증오나 고통 또한.  결국 기억을 정의하고 감정을 정돈하는 일은 오로지 우리 남매의 몫일 테다. 그날 새벽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동생이 해주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싸우는 일이 잦았고, 그럴 때 나는 동생을 데리고 방에 들어가 문을 굳게 닫곤 했다. 어느 날은 내가 그만 싸우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부모에게 대든다며 혼이 났다고도 한다. 그 후 성장한 동생이 하는 수없이 내 자리를 꿰찼다. 우리가 자라고 부모님은 나이가 들며 싸움의 횟수가 줄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칼 같은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평온에도 가시지 않은 습관일지, 응어리일지 나는 알 수 없다. 간혹 날카롭지만 길이가 짧은 언어들이 그들의 사이를 휙 지나간다. 그나마 그런 금속성의 말들은 노쇠하여 힘이 없고 동생이 중간에서 칼날을 휘어잡으면서 작은 전쟁들은 마무리가 된다. 나는 멀리 살고 집에 올라가는 일이 적다 보니 나보다 동생이 우리 집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한가한 주말이면 집에 가 힘없는 노부부가 미뤄둔 잡다한 일들을 대신 하곤 하니 실질적인 가장의 노릇이 그 애의 어깨를 짓누를지도 모른다. 난 어릴 때부터 집을 나오고 싶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집과 멀리 떨어진 학교에 입학했고, 그 뒤로도 쭉 타지에 살았다. 아마 동생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애도 스무 살이 되면서 기숙사 생활을 했으니. 집은 쉼의 공간이자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와도 같았다. 기실, 명절에 본가에 올라가도 엄마와 3일만 같이 있다 보면 싸우기 마련이라 짧은 기간 동안만 얼굴을 보는 게 마음이 편하다. 적당히 애틋하고 적당히 그리워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일요일에는 부산 구경을 시켜준다고 베리 자매와 함께 전포동, 기장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군데군데 매화가 피고 벚꽃이 만개할 준비를 하고 있던 날이었는데 동생에 대한 칭찬이 꽃보다 먼저 피어나 괜히 어깨가 으쓱 올라가곤 했다. 구태여 티를 내진 않았지만. 사실, 누군가에게 그 애 장점을 말하자면 끝도 없다. 다만 조금 민망해 괜히 퉁명스레 대하는 것이지. 내가 그 애 기저귀를 갈아주며 도맡아 키우진 않았어도 사진첩에 발목이 통통한 아기의 배를 두드리며 재우는 내 사진이 있으니 돌봄에 일조를 한 건 사실이다. 으레 남매들은 그런 정신이 있지 않나. 까도 내가 까. 녀석이 어디 가서 까일 인물은 아니지만 그 애가 어디선가 피해를 입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달려가 동생에게 피해를 준 놈의 정강이를 깔 것이다. 언젠가 내가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가족이 그 애 하나만 남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퍽 꿉꿉해진다. 우린 친인척 간에 왕래가 적어 다른 가족들과의 유대 관계도 없고 외가가 아닌 친가 쪽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빠의 형제들을 생각하면 아빠가 딱할 지경이니 말 다 했다. 새삼 내게 동생은 무척 귀중한 사람이라는 걸 느낀다.


살다 보니 가족들은 멀리 있음에도 흔하디 흔한 사람들로 여겨 한편에 치우고 지냈다. 그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테니까. 떠나지 않을 거니까. 잊고 있었으나, 기억해냈으니 되었다. 간과하지 않고 당연시하지 말아야지. 나의 탄생에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을. 나의 처음을 함께 한 사람들을. 보고 싶다. 나의 밉고도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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