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민경 Jan 21. 2022

'오히려 좋아'의 단단함

침착맨 이말년, 그에게 꽂혔던 두번의 계기.

침착맨 이말년의 '오히려 좋아'라는 말이 곳곳에서 들린다. 최근 술자리에서도 나는 '오히려 좋아'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다. 왜 이 다섯 글자에 꽂히게 되었는지 썰을 좀 풀어보겠다.


20대 초반에는 '삐딱하게 보기'가 멋있어 보였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무조건 비판 거리부터 생각해봤다. 돈, 명성, 가족, 안정, 재벌, 기업의 착한 행보, 사회에서 신뢰도를 가지고 있는 언론과 기관, 그럴듯한 말들 등 어떤 주제가 나와도 그것에 대한 비판 거리는 널려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쉽게 하는 말에 나는 한번 더 생각해봤다는, 지적 허세를 부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삐딱하게 보기'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었던 것 같기도.


실제로 삐딱하게 보기는 글을 쓰거나 기사를 쓸 때 매우 필요한 기술이다. 그 예시는 굳이 들지 않겠다. 너무 많이 들어봤을 것 같아서다.


기자가 된 지 올해로 8년차이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이 '삐딱하게 보기' 기술이 조금 지겨워졌다. 비슷한 주장을 비슷하게 비판하고, 나 역시 그렇게 손쉽게 쓴 글이 있었다. 주변에도 현상에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고, 무언가 해보자고 하면 안 되는 점부터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판을 해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환경이었다. 비판을 잘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는 너무 많았다.


몇 년 전부터 퇴사 열풍과 재테크 열풍이 불면서 사람들은 다시 자기계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대학생활 때 코웃음을 쳤던 자기계발 코너에 오래 서있었다. 자기계발의 핵심이 뭔가. 긍정긍정긍정이다. 나는 할 수 있고 자기계발을 해서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이 노력이 좋은 쪽으로 나를 데리고 갈 것이라는 긍정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다.


시니컬하고 비판적인 내용에 환장했던 나는 이제 다시 긍정에 환장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건 이래서 안되잖아'라든가 '~는 이래서 안좋아' 등의 내용으로 흘러가면 무언가 마음이 불편했다. 'NO'를 외치던 내가 왜 'NO'를 외치는 사람들이 불편해진 걸까.


그렇다고 그냥 처음부터 무조건 'YES'만 외치는 게 멋져 보이진 않았다. 순진무구한 태도가 멍청해 보이는 건 여전했다. 내가 꽂힌 건 어떤 현상에 대한 부정적인 면과 비판 지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 '내 주변에 이런 문제를 겪은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해결했어'라고 풀어가는, 비판을 한번 더 꼰 긍정이었다.


그걸 간파한 게 '오히려 좋아'다. 오히려 좋아는 무조건 '좋아'와 다르다. 문제에 맞닥들인 상황에서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오히려 좋아다. 그러니까 한번 이미 '삐딱하게 보기'를 거친 후, 다시 한번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좋아의 정신이다. 정(正)과 반(反)을 알고 나서 합(合)으로 나온 거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할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들어 회사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다면 '회사가 다 그렇지'하면서 욕을 할 것이다. 만약 회사에서 좋은 일만 있고 돈도 많이 주고 안락하기만 했었다면 재테크를 공부할 계기가 있었을까? 회사가 만족스럽기만 했다면 사람들이 따로 브런치를 개설해 글을 쓸 계기가 있었을까? 오히려 좋다. 문제를 만났을 때 비판만 하고 반대만 외치는 게 아니라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태도다.


이전에도 침착맨 이말년의 말에 완전히 꽂혔던 적이 있었다. 또 다른 문구는 "못하면 되잖아?"였다.


2020년 1월에 올라왔던 딩고 프리스타일 유튜브의 'EP.03 설 문안 인사 드리러 팔로알토, 침 콰이엇(침착맨)을 찾아간 뱃사공! 그의 고민은...?! I [월 300의 사나이 : 뱃사공] 설날 특집 1편 : 국힙 상담소'이라는 영상을 봤을 때다.


https://www.youtube.com/watch?v=DZqrYUnTqaA


딩고의 '월300의 사나이'에서 래퍼 뱃사고의 상담을 들어준 침착맨.


당시에도 일의 속도가 안 나왔고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였다. '우울하고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라고 스스로 생각될 정도였다. 왜 그럴까 생각하면서 우연히 보게 된 영상이었다.


일의 속도가 안 나왔고 일하기 싫어하는 상태가 계속됐던 이유는 '이제는 잘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요즘 '완벽주의의 함정'과 같은 심리학적 설명들이 자주 나와 식상한 이유이긴 하지만, '완벽주의'라는 말은 오히려 나와 거리가 있는 말 같아서 안 와닿았던 게 사실이다.


굳이 완벽주의를 추구해서 아무것도 못했다기보다, 기존에 내가 하던 것보다 '잘해야 될 것 같으니까' 하기 싫어지는 거다. 어느 정도 연차도 쌓였으니까 일을 잘해야 될 것 같고, 또한 일에 진심이고 진지하니깐 당연한 감정이다. 이말년 왈, 그러니까 더 잘해야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기만 하지 말고, 그냥 좀 못해보라고.


내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그냥 일을 '하는 것'에 의의를 두자는, 그 식상한 다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쓰면서도 마음속으로 '그래도 잘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함께 들지만, 그냥 좀 못해보는 것, 그 말이 나에겐 필요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좋아'와 '못하면 되잖아?' 두 가지 말을 사용하면 멘탈 건강이 아주 단단해져 버릴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튜브를 보다가 노트북을 켤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