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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100일이 조금 지난 8월 초, 처음으로 아기가 열이 났다. 신생아 황달로 인해 조리원과 같은 건물이었던 소아과를 갔던 때를 제외하고, 아기가 아픈 건 처음이었다. 사실 신생아 황달은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고 수치도 걱정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니 사실상 처음으로 아기가 아픈 것이었다. 예방 접종 때에도 열이 나지 않고 수월하게 지나갔으니, 처음으로 아기의 열을 맞닥뜨린 초보엄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불안에 휩싸였다.
열이 나기 하루 이틀 전 아기가 손가락을 열심히 빨았는데, 그때 컥컥거리더니 목이 조금 부어서 그런가? 혹은 여름인데 무언가 소독이 덜 된 물건을 빨다가 감기가 걸린 건가? 내가 집안 청소를 열심히 안 해서 그런가? 에어컨을 너무 하루 종일 틀어놨나? 등등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이 원인인지는 알 수 없는 동시에 모든 것이 원인인 것만 같아 일단 집 앞 소아과로 경보를 했다.
8월 초. 집 앞 소아과는 여름휴가로 인해 휴진이었다. 아 맞다. 저번주에 공지 봤었지.. 지하철로 한 정거장 떨어진 소아과로 갔다. 폭염이라 아기가 더울 것 같아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포털에서 검색을 했을 땐 '영업 중'이라고 쓰여있었는데 막상 가니 휴가 안내 딱지가 붙어있다. 이럴 수가. 택시를 타고 또 한 정거장 떨어진 소아과로 향했다. 이번엔 전화를 먼저 해보고 휴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다행히 한 정거장 더 떨어진, 세 번째 소아과에서는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아기의 열은 38도를 웃돌았다. 그러나 아기가 밥도 잘 먹고 축 쳐진 것도 아니어서 큰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의사는 이때의 아기들은 뇌수막염 등의 가능성도 있으니 잘 관찰을 해야 한다고 했다. 갑자기 무언가 큰 병명에 압도돼 불안이 한층 더 올라갔다. 뇌수막.. 염이요..? 다시 물으니 의사는 "뇌수막염 안 들어보셨어요?"라고 묻는다. 아니 들어는 봤죠.. 여하튼 지금 당장 그런 병에 걸린 것은 아니고, 해열제와 항생제를 처방해 줄 테니 이삼일 지켜보고 열이 안 떨어지면 다시 병원에 오라고 하고 진료가 끝났다.
안심을 찾은 건 오히려 약국에서였다. 해열제와 항생제를 처방받는데 70대 정도로 보이는, 무언가 고수 포스가 흐르는 약사는 아기의 상태를 보시더니 "아기가 입을 벌리고 숨을 쉬는 걸 보니 코딱지가 많아서 숨쉬기 불편한 걸 수도 있다. 기분이 좋아 보이고 기운도 있는 걸 보니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해열제를 먹이면 금방 열이 떨어질 것 같다."라고 말했다. 초보 엄마는 고수 포스가 물씬 풍기는 약사의 말을 듣고 의사를 만나고 커진 불안을 조금 잠재웠다.
다행히 아기는 해열제를 먹이니 금방 열이 떨어졌고 잠에 들었다. 그래도 밤에 또 열이 날 수 있으니 밤에도 갈 수 있는 병원 리스트를 찾아놨다. 그제야 불안한 마음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찬찬히 TV장 한편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육아 바이블 '삐뽀삐뽀 119 소아과'에서 '열이 날 때' 챕터를 찾아보았다. 사실 이 바이블은 당근마켓에서 거의 택배비만 주고받은 것으로, 판형만 보아도 아주 예전 버전의 책인 것을 알 수 있는 책이었다. 책을 살 때는 '같은 사람이 쓴 육아서인데 뭐가 그렇게 다르겠어?'라고 생각하면서 이전 버전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2007년 판 책에서는 '열날 때 물수건 사용 키 포인트'라는 챕터가 있었고 해열제를 사용해도 열이 떨어지지 않는 경우 물수건을 사용하라고 돼있었다. 옷을 다 벗기고 물이 뚝뚝 떨어지게 해서 온몸을 '쉬지 말고' 닦으라는 것이었다. 우리 아기의 경우 열이 39도 이상은 아니었지만 거의 비슷하게 임박하고 있었고 해열제를 먹이고 열이 떨어질 때까지는 물수건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책에도 '열을 떨어뜨리는 데는 해열제 사용이 가장 중요하며, 물로 닦아주는 것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하십시오'라고 쓰여있긴 했다. 아마 해열제를 먹이지 않고 물수건으로만 열을 내리려는 부모도 있을 것이기에 이런 문구를 사용한 것 같았다.
여하튼 나는 해열제를 먹이고 물수건도 '쉬지 않고' 닦아줬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열 보초'인가.. 라면서 만약 열이 내리지 않으면 정말 어느 정도까지 '쉬지 않고' 물수건질을 해야 하는 것일까 아득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쨌든 이 책은 2007년형이기에, 무언가 새로운 정보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저자인 하정훈 샘의 유튜브를 다시 뒤적거리고 '열이 날 때'와 관련된 영상을 찾았다.
해당 영상은 친절하게도, 2018년 12월에 찍은 것이라고 설명이 돼있었다. 나의 책과 11년의 간극이 있는 영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영상에서는 '물수건으로 닦는 것은 권장하지 않음'이라고 되어있었다. 그 사이 지침이 바뀌었다는 설명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rlV6XvUiEU&list=PLC6Msm1YCNw-NJBk4ajBkTeS2rJULiT1b&index=15
물수건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쉬지 않고' 아기를 닦던 것이 조금 허망해졌다. 그리고 아기도 무언가 불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물수건질을 하면 당연히 아기 몸의 열은 조금 내릴 것이다. 어른들도 더울 때 찬물 샤워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쨌든 아기가 열이 나게 된 원인이 물수건으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해열제를 먹였으니 시간이 지나면 열은 조금 내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당장 열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아니라면 굳이 물수건을 '쉬지 않고' 닦는 것이 필요할까 생각됐다.
그리고 나는 물수건질을 그만두고, 온라인 책방에서 '삐뽀삐뽀 119 소아과 2023년 개정판'을 주문했다. 그냥 새것으로 사버렸다. 예전 책에서 아이의 증상을 찾아 뒤적거리고 찾아 읽는 시간, 그것이 또 맞는지 최신 유튜브 정보를 찾는 시간, 유튜브와 과거의 정보가 다를 때 밀려오는 조금의 불안함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 책을 읽고, 유튜브로 최신 정보를 다시 찾아보는 수고를 들일 수 있다면 이전 책만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실제로 개정판을 찾아보니 한두 줄 최신 정보가 추가된 것 이외에는 거의 비슷하긴 했기 때문이다. 다만 개정판에는 물수건 사용 챕터 맨 앞에 "이제는 물수건 사용이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입니다"라고 적혀있었다. 만약 이것을 처음으로 읽었다면 나는 굳이 물수건질을 '쉬지 않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물수건질을 한 것이 억울했다기보다, 나의 지적 안일함으로 인해 그다지 권장되지도 않는 일을 한 것 같아 현타가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 외에도 어쨌든 최근에 바뀐 지침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렇게 우리 집에는 똑같지만 다른 책이 두 권이 됐다. 마음 같아서는 두 권의 책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이것저것 비교를 해보고 싶지만, 책의 두께가 두꺼워 차지하는 면적이 큰 만큼 아마 며칠 못 가 중고책은 버려지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초보 엄마는 무사히 또 한 퀘스트를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