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가 불러일으키는 감정, 그 감정들을 처리하는 법
뉴스는 보통 '미담'보다 부정적인 것들로 채워진다. 일을 할 때는 하루종일 뉴스를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고, 퇴근 후에도 내가 담당하는 분야의 뉴스는 계속 체크를 해야 하기에 당연히 '뉴스 중독'의 상태가 된다. 뉴스의 대부분은 (아마 95% 이상) 부정적인 소식이기에 뉴스를 많이 볼 수밖에 없는 기자들의 많은 수가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을 관찰했다. 실제로 우울증이 많은 직업군에 빠지지 않는 것이 기자 직군이다.
뉴스라는 것이 공익을 위한 측면도 있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와야 하는 산업 특성상 '얼마나 더 부정적인 소식을 빨리 전하는가'에 집중하기도 한다. 사람의 특성상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더 많은 주목을 한다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웹툰 중 하나인 '오무라이스 잼잼'의 45화에선 이런 대사가 나온다.
왜 TV 뉴스는 늘 그런 식일까?
왜 늘 사람들에게 세상은 무섭고 슬프고 한심하다고 얘기하는 걸까?
왜 언제나 과장된 오프닝 음악과 경직된 얼굴로 그날의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우울한 사건사고들을 헤드라인으로 소개하는 걸까?
왜 일방적으로 문제와 의문만 무책임하게 내던지고 대답은 회피하는 걸까?
웹툰 <오무라이스 잼잼> 45화
여기에 알랭 드 보통은 답한다. 흉악하고 공포스러운 사건을 뉴스를 사람들이 찾는 이유를 말해준다.
이런 사건들은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인지라 그에 비하면 우리는 정상적이고 축복받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 뉴스를 접하고 나면 예측 가능한 일상의 쳇바퀴 앞에서, 우리의 이상한 욕망을 우리가 정말 단단히 비끄러매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동료를 독살하거나 친척을 안뜰에 묻어버린 적 없는 자신의 자제심 앞에서 안도한다. <뉴스의 시대> 16p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2524X&start=pnaver_02
이 책은 2014년 작으로 꽤 오래된 책이지만 다시 읽어도 건질 것이 많은 책이다. 우선 이 책은 뉴스를 정치, 해외, 경제, 재난, 셀러브리티, 소비로 카테고리화 한 뒤 각각의 뉴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와 각 뉴스의 임무에 대해 설명한다.
하지만 뉴스의 임무에 관한 부분은 뉴스를 자주 보고, 만들어본 자들이라면 식상한 설명과 임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정도다. 사실(팩트)만을 제공하는, 즉 중립을 위한 뉴스보다는 관점이 있는 뉴스를 제공하라는 것이 핵심이다.
'사실'만을 제공하는 뉴스가 아니라 카테고리화된 뉴스, 뉴스를 삶에 적용하게 만드는 뉴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 핵심은 계속 강조된다. 효율적인 독재는 뉴스검열이 아니라 사실만을 나열한, 파편화된 뉴스 제공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다만 실제 뉴스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팩트만을 다루는 단신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이 부분은 뉴스를 만들지 않는, 뉴스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철학자의 의견으로 보면 될 듯하다.
우리가 뉴스와 얽힌 정도에 비하면 안타깝게도 많은 언론기관 내부에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사실’ 보도가 가장 품격 있는 저널리즘이라는 편견이 광범하게 퍼져있다. 이를테면 CNN의 슬로건은 ‘여러분께 사실을 제공합니다’이다. 네덜란드의 NRC 한델스블란트는 ‘의견이 아닌, 사실을 전달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줄기차게 홍보한다. 이 ‘사실’이 지닌 문제는 오늘날 신뢰할 만한 사실 보도를 찾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정작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접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뉴스의 시대>, 32p
민주정치의 진정한 적은 다름 아닌 뉴스에 대한 적극적인 검열이라고 여기기 쉽다. (...) 권력을 공고히 하길 소망하는 당대의 독재자는 뉴스 통제 같은 눈에 빤히 보이는 사악한 짓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 그 또는 그녀는 언론으로 하여금 닥치는 대로 단신을 흘려보내게만 하면 된다.
<뉴스의 시대>, 37p
뉴스를 만들다 보면 단신을 만들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심층적인, 의견이 섞인 뉴스 역시 단신들이 주는 정보들 위에서 세워질 수밖에 없다. 우선 알랭드 보통은 기자가 아니기에 이런 의견을 말할 수 있다. 뉴스를 직접 만들지 않는 언론학자들도 이런 의견을 많이 말하긴 한다. 또한 이 책은 2014년 작이기 때문에, 이 당시 의견 저널리즘이 유행한 부분도 있으므로 그런 경향도 참고해야 한다. 아마 2023년 알랭드 보통에게 이 부분을 다시 질문하면 다른 답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탁월한 지점은 ‘뉴스의 시대’에 대한 설명이나 뉴스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혹은 뉴스의 임무에 대한, ‘뉴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라고 느껴진다.
이 책의 재미있는 부분은 오히려 뉴스를 보는 사람들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다.
각종 뉴스들은 우리에게 분노, 슬픔, 숭배, 질투,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부른다. 뉴스를 보는 이유는 어쩌면 여러 감정들을 느끼고, 나누고 감정들을 느끼고 분출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그 감정에 대한 분석, 그 감정을 뉴스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분석이 탁월하다.
가령 우리는 정치뉴스에서는 분노를 느낀다.
뉴스는 분노에 찬 반응을 제거해서는 안된다. 뉴스는 우리가 정당한 이유로, 정당한 수준에서, 저당한 시간 동안 화를 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이 건설적인 기획의 일부가 되도록 말이다.
<뉴스의 시대>, 66p
유명인에 대한 뉴스에선 숭배와 질투가 섞인다.
누군가를 동경하려는 욕구는 우리 심성의 뿌리 깊고 중요한 특징이다. 무시하거나 비난한다고 해서 없앨 수가 없다. 그런 무시나 비난은 동경의 욕구를 단순히 저 아래로 밀어 넣을 뿐이고, 그럴 경우 이 욕구는 아무런 돌봄도 받지 못한 채 미성숙한 상태로 잠복해 있다가 부적절한 대상에 달라 부기 십상이다. 셀러브리티에 대한 사랑을 억압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지적이고 생산적인 최선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뉴스의 시대>, 184p
2014년 작을 다시 읽으면서 지금 내가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셀러브리티에 대한 고찰이었다. 나는 종종 명품이나 셀럽의 삶을 전시하는 프로그램이나 SNS을 두고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물론 그것이 수준 높은 뉴스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이고 참조할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이런 것에 지나치게 흥미를 거세(?)하는 태도가 인간 본성에 대한 부정이라고 여겨지고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셀러브리티는 ‘똑같이 따라 하는’ 사람을 두고 안쓰러운 가짜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선망에 기초한 모방이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진다면, 이는 훌륭한 삶의 필수 요소가 된다. 경탄하기를 거부하는 것, 성공한 사람의 성취에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안호는 것은 타당한 근거 없이 오만하게 자신을 중요한 앎으로부터 떼어내 버리는 짓이다.
<뉴스의 시대>, 191p
이 책의 재난뉴스 파트에서는, 사람들이 재난뉴스를 보며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삶을 재조정한다고 정리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우리의 우선순위가 재조정되는 것이다. (...)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겁을 주면서, 우리 존재의 핵심 속에서 우리가 응당 알고 있는 바대로 삶을 이끌어갈 기회를 부여한다.
<뉴스의 시대>, 233p
이렇듯 알랭 드 보통은 뉴스 그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는 뉴스를 보며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뉴스가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말한다.
감정에 대해 말하기. 이는 알랭 드 보통이 가장 잘하던 일이다. 그의 최고작으로 뽑히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불안> 등이 그랬던 것같이 말이다. 결국 책은 현대인의 감성을 분석한 것이며 현대인의 감성을 빚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뉴스라는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뉴스 유저들이, 혹은 뉴스를 만드는 언론계가 이 책을 모두 읽는다 하여 알랭 드 보통이 제안하는 적절한 감정을 배출하고 만드는 사회가 될진 의문이다. 마지막 장에서 읽을 수 있듯이 무차별적인 뉴스가 아닌 개인이 원하는 뉴스만을 보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괴로운 정치 뉴스 같은 것에는 비위가 약하고 패션과 연예 뉴스에만 다이얼을 맞추는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맞춤 뉴스가 어떤 효과를 발휘했을지 상상해 보라. (...) 또는 협소한 시야를 가진 건 매한가지지만 관심분야는 좀 달라서 국가의 비극에 대해서만 듣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아와 학살에 대한 이런 배타적인 관심이, 실은 더 잘살지만 대하기는 더 부담스러운 이웃에 관심을 표하지 않으려는, 고상하지만 감정적으로 안이한 변명으로 활용되는 것이라면?
<뉴스의 시대>, 279p
이 책의 프롤로그엔 철학자 헤겔의 주장이 나온다.
“삶을 인도하는 원천이자 권위의 시금석으로서의 종교를 뉴스가 대체할 때 사회는 근대화된다.”
현대사회에서는 뉴스가 종교를 대체했지만 뉴스의 진화가, 즉 알고리즘에 따른 개인 맞춤형 뉴스는 곧 다시 종교가 뉴스를 대체하는 날을 불러올 것이라고 알랭드 보통은 예고했다.
스스로 믿는 것만 보고 듣는 사람들이 특정한 뉴스만 찾는 시대가 된 지는 이미 오래됐다. 뉴스는 그들의 믿음을 공고화시키는 사실들의 나열에 불과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 부분은 현재와 시차가 느껴지는 부분이긴 하다. 이미 알고리즘이 사람들을 어떻게 극단화시켰는지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이후 어떻게 '개인이 원하는 뉴스'가 세상을 더럽혔는지(?) 보려면 제임스 볼의 책 '어떻게 개소리는 세상을 정복했는가'를 읽어보면 좋다.
헤겔의 말을 다시금 상기하면서, 뉴스와 종교를 구별할 때 우리는 뉴스로부터 더 좋은 정보와 감정들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