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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Nov 15. 2023

창작은 기득권인가 아닌가

책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리뷰 

얼마 전 이미지 좋았던 싱어송라이터이자 방송인 유희열이 류이치 사카모토를 표절했다는 지적을 당했다. 사실 오랜 시간, 힘들었던 때 유희열의 라디오를 즐겨 들었던 사람으로서 표절 문제가 안타깝게 여겨졌다. 물론 나는 음악 관련 전문가가 아니므로 이것이 표절이다 아니다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두 곡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곡이 문제라고 지적됐고 대중이 듣기에 멜로디라인 등이 비슷한 곳이 많아 1990년대 음악을 만들던 때의 관습이라는 설명에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정도의 문제가 되어버린 모양새다. 


이 외에도 최근 식케이의 곡에도 표절 문제가 언급됐다. 음악에서도 마찬가지고 얼마 전 유튜브 최고의 스타라고 불리는 신사임당 역시 신사임당의 새 사업이 결국은 뜨는 유튜브를 '표절'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당하면서 대중의 질타를 받았다. 표절 문제는 꽤 정기적으로, 분야를 막론하고 이슈가 되는 것 같다. 


몇 년 전에는 퍼렐 윌리엄스에게도 표절 문제가 있었다. 퍼렐은 2013년 로빈 시크의 ‘Blurred Lines’을 만들고 함께 불렀다. 한국에서도 히트한 ‘Blurred Lines’은 2015년 초 1970년대 활동한 마빈 게이의 ‘Got to Give It Up’을 표절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곡을 만든 퍼렐은 노래를 부른 로빈 시크와 함께 마빈 게이의 유족에게 500만 달러, 한화로 약 64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퍼렐은 마빈 게이를 존경하며 그의 노래를 많이 들었지만 이 곡을 쓰며 특정 곡을 차용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퍼렐의 사례뿐 아니더라도, 대중예술 혹은 예술의 영역에는 언제나 표절의 위험이 떠돌고 있다. 표절 시비에 휩쓸린 예술가들은 종종 ‘오마주’(Hommage)를 주장한다. 유희열도 류이치 사카모토에 대한 오마주를 주장했다. 자신이 존경하는 아티스트에 대한 존경을 담아 작품을 바치는 ‘오마주’와 '표절'의 경계는 흐릿하기만 하다.


책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는 이런 표절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미술사를 훑어보면서 사실 창작이라는 것은 모방이 기본이라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책이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프랑스 국립박물관연합의 편집책임자로 활동한 미술사학자 카롤린 로슈(Caroline Larroche)의 책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는 표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책의 부제가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라는 것만 보아도 명작을 ‘모방했어도’ 명작이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소개에서 역시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가 '눈과 마음'에서 한 말을 인용하는데 공감을 부르기도, 지금과 같은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지 의문이 남기도 한다. 


“창작은 기득권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것이며, 정해진 수명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7p)


물론 이 의견은 메를로 퐁티와 저자의 생각이다. 저작권에 대한 관념이 최근 와서 더욱 강조되고 있기에, 지금은 통하지 않는 말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다만 현대에도, 아무리 대단한 걸작이라고 하더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저작권이 풀려 모두가 사용할 수 있게 되는데 이 부분에서는 여전히 맞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은 14세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모방한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최후의 만찬'부터 시작한다. 1970년 파리에서 일어난 ‘쉬포르-쉬르파스’ 운동(미국 추상주의 및 사물을 원래 용도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식의 창작을 추구하는 신사실주의의 영향으로 시작된 운동)의 계보까지 미술사를 다룬다.


시대에 상관없이 명가들은 모두 스승 혹은 오마주 대상이 있었다. 미켈란 젤로는 젊은 시절 데생을 그릴 때 지오토의 벽화를 본보기로 삼았으며, 렘브란트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다른 작품을 베껴 그리는 작업을 그림 공부의 중요한 기초로 놓았다. 앙투안 와토는 루벤스가 주장한 미의 기준을 그대로 물려받아 쓰기도 했다.


전 시대의 화가를 존경하여 모방하는 여러 사례 중에서도 특히나 재미있는 부분은 역시 현대 예술로 들어온 후다. 


‘패러디’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단순히 주제를 차용하는 것이 아닌, 존경하는 화가의 작품을 비틀어보기도 하고 자신만의 개념을 창조해 덧붙이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이는 역시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이다. 앤디 워홀의 '최후의 만찬'(1986)은 15세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찍어냈다’. 책은 앤디워홀의 '최후의 만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앤디워홀의 '최후의 만찬' 시리즈를 두고 원작의 권위를 파괴하고 그 의미를 왜곡하는 행위로 해석하는 것은 워홀이 얼마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지를 몰라서 하는 얘기일 것이다. 

실제로 워홀의 작품은 인물들의 성격과 심리를 더욱 명확히 보여주었으며, 이로써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지닌 심오한 인간미를 십분 확인시켜 주는 공을 세웠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16p)


200편의 작품을 다루니 한 편 한 편의 꼼꼼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현대 예술 작품은 작품보다 해설이 길어지는 경향이 생길 수밖에 없음에도 설명은 간략하다. 아무래도 이 책의 주제가 작품해설보다는 ‘작품들의 계보를 확인하는 것’, 다시 말해 수십 년 혹은 수 세기의 간격을 두고 세상에 나온 작품들 간의 ‘혈연관계’를 밝히는 것(7p)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의 가족들 중에서도 그렇지만, 카롤린 라로슈가 들려주는 미술계 ‘가족 이야기’에서도 딱 보기만 해도 닮아 가족인 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보아도 ‘얘네가 가족이라고?’하는 의문이 남는 이들도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가족은 딱 보면 티가 난다. 13세기부터 유행했던 기독교 성화를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 시모네 마르티니, 산드로 보티첼리, 라파엘로, 장 푸케, 알브레히트 뒤러, 파르미자니노, 시몽 부에 등 ‘성화 패밀리’가 대표적이다. 성화의 주제는 성모와 예수, 삼미신, 세례 요한 등 성서 인물부터 시작해 현실의 권력들, 즉 황제나 귀부인을 그린 그림들까지 비슷한 화풍을 따른다. 


보자마자 가족인 줄은 모르겠지만, 특징 하나로 엮이는 가족들도 있다. 죽음을 관한 그림이 그렇다. 이 그림들에는 해골이 꼭 등장해 가족임을 드러낸다. 미술사에서 17세기부터 ‘바니타스’(vanitas)라는 특징적인 정물화 장르가 그렇다. ‘바니타스’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전도서의 문구를 주제 삼은 문구로, 해골을 정면에 내세운 정물화가 많다. 필리프 드 상파뉴의 '바니타스 혹은 인생에 대한 알레고리', 로히드 반 데르 바이덴의 '브라크 가문의 세 폭 제단화', 하르멘 스텐베이크의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알레고리'등이다.  


같은 형제지만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은 해골을 정면으로 내세우지 않아 언뜻 보면 같은 가족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하지만 두 형제가 위풍당당하게 신들의 소유물을 드러내며 서있는 사진 아래로, 해골이 아주 비스듬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 형제들의 계보는 현대까지 살아남았다. 안느 푸아리에&파트릭 푸아리에의 '바니타스'는 설명 없이는 가족인 지 알 수 없으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럴듯한 사례다. 500프랑짜리와 200프랑짜리 지폐를 믹서에 갈아 제작한 이 작품은 돈데 대한 헛된 욕심 때문에 파멸로 치닫고 있는 세상과 예술이 투기의 동의어가 되어버린 이 시대를 고발한다고(76p) 한다.


 



가족의 얼굴을 보고도, 가족이라는 설명을 들어도 믿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어색한 조합은 아무래도 챕터 ‘흰 바탕 위의 흰 정사각형’에 나오는 15세기 플랑드르의 로히르 반 데르 바이덴과 20세기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와의 관계일 것이다. 작가 스스로도 고백한다. 사실 이들 사이에는 바이덴이 그린 '머리쓰개를 쓴 여인의 초상'의 매력적인 ‘흰 천 조각’이 말레비치의 '흰 바탕 위의 흰 정사각형'을 연상케 하는 점 외에는 아무런 연관서가 없다(194p)고. 하지만 여인의 얼굴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는 이 천조각은 말레비치가 보여줄 색의 신비함을 예고한다(196p)는 이유로 가족으로 묶여있다.  


이 책은 대충 어떤 화풍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떤 계보인지 찾아보고 싶을 때 궁금증을 풀어주기도, 의외의 계보를 찾아 기분 좋은 놀라움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계보 없이 홀로자란 아티스트인 줄 알았지만 많은 이의 영향을 흡수한 이들도 알 수 있다. 미술계 작품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해설해주지는 않지만, 큼직한 도판과 깔끔한 설명으로 잘 만들어진 족보를 본 기분이다. 그래서 이 책은 상시 옆에 두고 꺼내볼 국어 ‘사전’ 같은 책이라기보다는 가끔 먼지가 쌓일 때마다 쓱쓱 닦으며 꺼내볼, 미술계 족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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