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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Jan 21. 2022

준비하는 마음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 칭찬이 목말랐던 인간의 요리 사랑

입사한 지 몇년이 지난 후 자취를 시작했다. 28살 때까지 밥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내가 하는 밥을 자랑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현재 남편이자 당시 남자친구와 집에서 밥을 해 먹는 일이 많아졌다. 요리를 해본 적이 없었지만 꽤 잘하는 나를 발견했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을 때도 몇 번 밥을 차려줬는데 폭풍 칭찬을 들었다. '나 어쩌면 요리에 재능이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들은 그저 배고팠을뿐인 것 같지만.  


칭찬에 목마른 내 캐릭터 상, 요리를 해서 보여주면 바로 돌아오는 칭찬이 너무 좋았다.


어느 날 모임의 대화 주제 중 '내가 왜 요리를 좋아하는지'를 말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요리는 게임과 같이, 즉각적인 결과물을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화가 오가면서 요리가 어쩌면 일과도 비슷한 과정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손님수와 분위기에 맞게 메뉴를 기획하고 시간을 배분하고 재료를 준비한다. 재료를 손질하고 각 요리에 맞춰 집어넣는다. 특히 집에 어떤 재료가 있는지, 새로 살 것은 무엇인지, 메뉴 구성은 어떻게 하고 어떤 그릇에 담을 것인지 등 치열한(?) 기획 속에 한 상이 차려진 후 얻는 피드백은 뿌듯하거나 아쉽다. 어쩐지 투잡하는 것처럼 피곤하더라니.  


물론 지금도 엄청난 요리를 해내거나 특별히 맛있는 메뉴를 개발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홈파티를 계획할 때 설레고, 인스타그램에 요리 사진을 올리면 꽤 칭찬을 받기도 한다. 나는 칭찬을 받기 위해 요리를 하는 것인가.  


유부국과 월남쌈, 토마토를 올린 빵과 완두콩 프리타타.


내가 요리를 좋아하게된 이유인 '즉각적인 결과물'이라는 특성은 삶에 대한 나의 태도를 변화시키기까지 했다.


요리를 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변한 점이 있다면 계획 수립, 즉 준비가 만족할만한 결과를 만드는데 결정적 요소라는 걸 알았다는 일이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즉흥적으로 사는 걸 마음의 소리를 따라 잘 산다고 생각했고 나름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한다..)


요리를 위해 재료를 준비해두는 과정을 즐기게 되면서, 왜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을 피해왔는지 생각해봤다.




나는 ‘준비하는 마음’을 부끄러워했다. 미리 뭔갈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은 그것에 마음을 쓰는 것이고, 그 진심을 들키기 싫어했다.


어렸을 적 옆 친구에게 누군가 ‘쟨 저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그 정도로는 잘 못하네’라는 소리를 한 적 있다. 나에게 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옆에있던 나까지 수치심이 들었다. 나는 그 친구처럼 공부를 열심히 한 적도 없지만 그 소리를 들을까 봐 무섭기까지 했다. 차라리 ‘쟨 맨날 노는데 평타는 하네’가 나았다. 아마 이런 상황들이 몇 개 더 있었을 것이다. 어릴 적 이런 마음이 성인이 돼서도 남아있었나 보다.


내가 연예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어린이였던 것도 이런 맘과 비슷한 듯했다. 뭔가 나 혼자 열심히 누굴 좋아하는 걸 들키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방울토마토의 껍질을 까놓은 모습. 양파와 애호박을 손질해둔 모습.

 

요리를 하면서 나의 애씀이 곧 만족스러운 테이블로 다가온다는 것을 반복해서 느꼈다. 즉각적인 결과와 칭찬은 나의 준비 과정을 부끄럽지 않게 만들었다.


그래서 요새 유행어이기도 한 ‘00에 진심인 사람’은 참 건강한 사람이다. 무엇에 진심인 것을 드러낼 수 있고, 내가 그것에 마음 쓰고, 또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 자체가 건강한 사람이라는 증거다.

 

요리를 하면서 이제 나는 ‘준비’에 조금은 덜 부끄러운 사람이 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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