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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Jun 28. 2023

내 안경이 하나인 게 싫다

누군가는 욕하겠지만

남편은 안경을 좋아한다. 안경이 집에 20개는 족히 있는 것 같은데도 길을 가다가 안경가게를 지나치지 않는다. 최근에도 남편은 안경을 하나 더 샀다.


그는 새로운 안경을 사면 한동안 그 안경만 끼고 다닌다. 그렇다고 안경이 하나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회사에 갈 때는 최근에 산, 꽂힌 안경을 쓴다. 집에 와서는 조금 더 가볍거나 시야가 넓게 보이는 안경을 바꿔 쓰기도 한다. 그날 입는 옷에 따라 안경을 바꾸기도 하고 운동을 할 때도 다른 안경을 쓴다. 축구를 할 때는 고글 형태의, 고정이 되는 안경을 쓴다. 수영을 갈 때 쓰는 도수를 넣은 물안경도 수영 가방에 챙겨 넣는다. 운전을 할 때 필요한 선글라스는 자동차 서랍에 넣어둔다.  



종종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관점, '프레임'은 안경에 비유되곤 한다. 내가 어떤 안경을 쓰는지에 따라 세상이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여러 개의 안경이 필요하듯, 세상을 보는 관점도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하나의 프레임에 완전히 꽂히는 시기가 있다. 안경을 새로 산 시기처럼 말이다. 


한때는 한두 가지 프레임에 완전히 갇혀서 세상만사를 한두 가지 프레임에 욱여넣어 세상을 이해했다. 그 프레임에 맞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면 '나는 OO한 관점의 사람인데 이런 행동을 해도 될까?'하고 혼란함이나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같은 관점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친구나 타인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엔 되도록 많은 관점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해 놓은 후, 사안에 따라 어떤 관점으로 보는 게 맞는지 그때그때 판단하는 것이 나에겐 더 알맞다고 생각된다. 주장이 강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지금 이 사람은 OO한 관점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넘길 수 있다.




이런 생각을 처음 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나고 자라 기독교식 예배나 집회에 익숙했다.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입학하자마자 3월부터 학교 내에서 등록금 인상 반대 집회가 열렸다. 당시 사립대학교의 입학금이나 등록금이 점점 비싸지고 있었고 대학교들의 적립금에 대한 보도들이 나오면서 등록금 인상 반대 집회의 규모가 커져가고 있었다. 학교 정문에서부터 집회가 열리고 있으니 안 볼 도리가 없었다.


집회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딘가 익숙한 순서로 집회가 진행되는 게 느껴졌다. 그 바닥(?)에서 유명한 인사들이 흥을 돋우는 연설을 하고, 사람들은 박수를 치거나 저마다 추임새를 넣는다. 그들만이 알고 있는 노래를 부르고, 율동에 맞춰 춤을 춘다. 몇몇 연설이 진행되면서 청중들 사이에는 후원을 위한 돈을 넣는 박스가 오고 간다. 그들만이 아는 노래나 춤, 구호 등을 외치며 사람들은 신이 나고, 그것들을 모르는 사람들은 조금 주눅이 든다.


이러한 순서나 형식이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과 어떤 특정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집회에서나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이날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내가 지금까지 깊이 신념을 가지고 빠져들었던 것이, 그 형식은 똑같고 내용만 다르게 이곳저곳에서 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세상에 여러 관점이 있고, 이 관점들이 부흥(?)되는 형식은 비슷하며,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공동체를 이루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걸 깨달았다. 나만의 생각이나 나만의 특별한 공동체라고 느꼈던 것들이, 그저 세상에서는 수많은 관점들 중 하나로 분류되는 것이고 나는 또 그 안에서 그 질서에 맞춰 행동하고 사고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는 그게 충격이었다.





물론 이걸 깨달은 이후로도 나는 새로운 관점을 만나면 푹 빠져들기도 하고 그 공동체에 속해 살기도 했다. 나라고 해서 무슨 초월적인 존재는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어떤 관점에 푹 빠지고, 신념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들을 낮춰보는 것도 아니다. 각자 잘 맞는 관점이나 신념이 있으면 그 관점과 신념에 따라 살아가면 된다. 신념이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고 자신에게 맞는 방향성을 제시한다면 그 신념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히 좋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평안이 필요하고 어떠한 새로운 방향성이 필요하다면 또다시 그런 도움을 받게 될 것임을 안다.  




다만 그저 나라는 사람은 단 하나의 관점이나 신념에 맞춰 살아가는 게 잘 안 되는 박쥐 같은 사람이기에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의 관점에 완전히 빠져있는 사람과의 대화가 조금은 재미없게 느껴진다는 정도다.


진마티넷의 책 '불편한 사람과 뻔뻔하게 대화하는 법'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정답을 모두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는 즐겁지 않다. 그들은 신념이 굳어버려 난공불락의 요새에 갇힌 사상을 지니고 있으며 점점 확실하지 않은 자료와 기존 신념에 부합하지 않는 데이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곤조가 없다며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 박쥐라고 욕을 먹을 수도 있지만, 나는 내 안경이 하나인 것이 싫다. 상황에 따라 필요한 안경을 갖추고 있으며, 그때그때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안경을 쓰고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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