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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Jul 05. 2023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대외용' 추천 작품 하나씩은 있잖아..

지브리 스튜디오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역시 나는 지브리 취향은 아니구나.' 사실 지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도 한 때 지브리 음악감독으로 알려진 히사이시 조의 음악을 모두 찾아 듣고, 히사이시 조의 책 '감동을 만들 수 있습니까' 등을 찾아 읽었다. 비슷한 음악가로 분류되는 칸노 요코의 앨범을 들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데 지브리 스튜디오 음악을 모아둔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 지브리의 영화를 떠올리고 특유의 감성을 느끼긴 해도, 정말 내가 이 음악을 좋아한다는 감각은 없었다.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역시 재미있고 몇 번을 반복해서 본 것도 있지만, 나에겐 조금 기괴하고 공포스럽고 비장하게 느꼈다.


비슷하게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도 그랬다. 미야자키 하야오든 봉준호든 감히 내가 '좋다, 안 좋다' 평할 필요도 없을 정도의 대가이고 오히려 '나는 별로...'라고 말했을 때 문외한 취급을 받기나 할 정도의 예술가들이다. 


영화 기생충이 개봉했을 당시 그 영화가 너무 작위적이고 불쾌했다고 말했다가 남편과 싸움에 이를 정도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후 기생충이 전 세계에서 상을 휩쓸었을 때 남편은 무언가 자신이 이긴듯한 (ㅋㅋ)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의 만듦새나 메시지, 촬영기법 같은 것들을 흠잡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아무리 완벽하고 전 세계에서 인정하는 대가의 것이라도 나에겐 '좋아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뿐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3번 봤는데, 볼 때마다 너무 무섭다. 공포영화 같음..

 



이처럼 정말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기는 꽤 어렵다. 예를 들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홍상수나 노아 바움백,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무언가 조금 어려웠다.


홍상수의 경우 배우와의 불륜으로 비난 여론이 높다.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나 '프란시스 하'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라고 말하기에 영화는 조금 가볍기도 하고 신변잡기스럽다. 웨스 앤더슨을 말하면 어쩐지 너무 유행에 편승하는 사람 같기도 한 느낌이 있다.


영화 '프란시스 하' 스틸컷.


20대의 나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말하라고 하면 왠지 내가 아는 가장 마이너 한 감독의 이름을 꺼내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자주 말하고 다닌 감독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랍스터'를 대거나 미아 한센 러브의 '다가오는 것들'을 꼽았다. 물론 이 감독들과 작품들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과 작품들은 맞다. 그런데 이들은 약간 뭐랄까, '대외용'으로 이름 대기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정말 내가 '랍스터'나 '다가오는 것들'과 같은 작품을 홍상수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나 웨스 앤더슨의 '프렌치 디스패치',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보다 좋아하느냐고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 혹은 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정말 좋아하는데 이스트우드의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나의 '대외용' 감독이지는 않았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밤의 해변에서 혼자' 리뷰를 보고 싶은 분이 있다면 클릭..)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5890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생각보다 늦게 왔다. 10대나 20대 때는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내가 얼마나 마이너 한 감독의 이름을 대고 그 영화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지가 나의 거의 모든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나 음악 이야기로 물꼬를 트고, '와, 그런 영화/음악은 어떻게 찾으세요?'라는 반응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이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이야기가 즐겁기는 하지만, 저런 말을 들으려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들을 뒤로 숨기지는 않는다.




반면 어떤 사람은 마이너 한 취향이나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예술가의 이름을 대는 걸 우습게 생각한다는 의미로, '나는 그런 시기는 지났다'는 의미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를 댈 때 아이돌이나 걸그룹 등의 이름을 댄다.

물론 아이돌이나 걸그룹을 가장 좋아할 수는 있는데, 그것들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과 그것이 '대외용'인 사람과는 또 다르다.


오히려 아이돌이나 걸그룹을 '대외용'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얼마 못 가 자신이 얼마나 마이너 한 취향 혹은 고급진 음악을 듣는지 빨리 말하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한다. 이 경우는 '고급진, 마니어한 취향을 말할줄 알았겠지만 대중적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쿨한 나'같은 반전 매력을 보이고 싶은 욕망이 읽힌다. 이 케이스 역시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나는 '대외용'으로 마이너 한 감독을 대는 사람만큼이나 자신이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데 가볍게 보이려고 아이돌이나 가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되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이 못 알아들을까 봐, 혹은 나를 예술병종자(?)같이 여길까 봐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걸 숨기는 사람도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은근히 어렵다. 우선은 취향에 대해 산전수전을 다 겪고 이것도 빠져보고 저것도 빠져보고 난 후에야 자신 있게 내가 좋아하는 걸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또한 그런 취향 대결(?) 같은 대화들도 실컷 다 해보고 그것들도 같잖아질 때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하고 난 후 그냥 대화가 끊겨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경지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솔직하게 밝히고 난 뒤에도 상대방이 자기 멋대로 나를 평가하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아야 하며, 혹은 그 뒤에도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으면 좋다. '그 뒤의 나'를 보여줄 기회가 없다 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정도가 되면 더 좋다.




나 역시 아직 이런 경지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좋아하는 감독을 말할 때 '난 사실 OOO를 좋아해'라든가 '나의 길티플레져이지만 OOO를 좋아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자신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는 꽤 오래 걸린다. 반대로 남들이 별로라고 하고 욕하는 것을 내가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것도 꽤 어렵다. 그런 깨달음이 쌓여 나 자신이라는 사람을 알아가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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