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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Jan 03. 2023

결산 없는 연말, 목표 없는 새해라도

줄줄이 목표 세우는데 몰입했던 내가 새해 목표를 안 적는 이유

연말연시 많은 결산들과 목표 세우기 글들이 쏟아진다. 나 역시 다이어리 쓰는 걸 중학교 때부터 매우 좋아했고, 새해가 아니더라도 이것저것 목표를 세우고 꾸미고 하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수많은 목표 세우기 방법론과 플래너 콘텐츠들을 즐겨찾기 하고 남들의 목표는 무엇일까 궁금해서 해쉬태그 '목표', '투두리스트', '만다라트 계획표' 등을 팔로우하기도 한다. 내 취미 중 하나가 고즈넉한 카페에 찾아가기인 이유도 카페에 가서 다이어리에 목표를 적고, 점검하고, 자책(?)을 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쓰다 보니 살면서 내가 대단한 성과를 이뤘어야 할 것 같다는 부담감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난 목표에 의한 성과를 못 내더라도 목표를 세우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편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깨끗한 다이어리'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난해 연말과 올해 연초는 어떤 결산도, 목표도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와 올해는 너무 뻔했고 뻔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나는 일하면서 야간 대학원도 다녔고 임신 준비를 위해 병원도 다니고 있었다. 이것들을 위한 세세한 '투두리스트'만 적어도 다이어리가 꽉 찰 정도였다.


지난해 7월 말 임신이 돼서 '이제는 임신을 잘 유지하면서 일하고, 내 몫의 집안일만 해도 선방'이라고 생각하면서 별다른 목표를 짜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기에 길지 않은 목표였기에 따로 적을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다이어리를 살펴보면 7월까지는 빼곡한데 그 뒤로는 깨끗하다. 7월까지는 다양한 펜의 색깔로 이건 지켰고, 이것 못 지켰고, 이건 더 할 거라는 이야기들이 촘촘하다. 그런데 7월 이후에는 일과 관련한 일정 외엔 아주 깨끗하다.


연초에 다이어리를 들고 찾은 연희동의 한 카페. 그러나 목표를 세우지않고 돌아왔다. 사진은 연희동에 새로 오픈한 '본지르르'라는 카페의 모습이다.

올해는 더 뻔하다. 3월까지는 최대한 일을 다니려고 노력할 것이고, 4월에 출산을 하고 나머지 개월들은 아이를 보는 인생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겠지. 생애 처음으로 1년 이상의 긴 휴직을 한다고 해도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는 시간이다. 나를 위한 플래너보다 아기가 몇 시에 똥을 쌌는지, 몇 시에 밥을 먹었는지, 몇 시에 잠을 잤는지 등을 적을 플래너가 필요한 시간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 어떤 목표도, 결산도 그다지 할 마음이 없어졌다. 어쩌면 세울 수 없다는 심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의 성장을 위한 세세하고 귀여운 목표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나쁘진 않다. 아니 오히려 꽤 충만하다. 깨끗한 다이어리도 참을 만하다. 할 일들이 쌓여 목표를 세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가장 본질적이고 하고 싶었던 것에 집중하는 '미니멀라이프', '심플 라이프'가 된 느낌이기도 하다. 물론 출산과 육아는 내 생각보다 매운맛이겠지만.




어쩌면 몇 년간 줄줄이 세워온, 머릿속으로는 다 기억하지 못해 표를 만들고 줄줄이 적어 내려 간 세세한 목표는 내가 정말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혼자 이것저것 잡다한 욕심을 부린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심정변화는 지난 몇 년간, 나는 결국 내가 만든 가족과 그 사랑 안에서 가장 큰 행복을 얻고 있다는 식상하고 재미없는 사람임을 인정한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그 전에는 내가 일에 사실 큰 욕심이 없고, 대단한 야망도 없으며, 가족이나 사랑이라는 고리타분하고 뻔한 것에 가치를 두는 사람임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더불어 내가 '아기를 원하는 여자'라는 점도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약 2년 동안 다녔던 병원에서 많은 이들이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시험관 임신을 하면서 돈과 시간과 체력을 쓰다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졌다. 내가 아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은 절대 할 필요가 없었고 그만두기도 쉬웠을 것이다. (아기를 낳기로 결심한 과정이나 생각은 따로 글로 정리해볼 예정이다.)


물론 아이를 낳고, 아이를 기르는 생활에 조금 더 익숙해지면 나의 다이어리는 다시 빽빽해질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복직해 일을 한다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한 다이어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어쩌면 다이어리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정신없이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한동안은 깨끗한 다이어리를 잘 참는 사람으로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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