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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하 Dec 15. 2023

오랜만에 설레는 로망의 실천

독립서점 책방지기 알바 일지 #1

드디어 첫 책방지기의 날이 도래했다. 책방으로 가는 길이 이전과 다르다. 주머니에 인수인계 내용이 적힌  종이를 고이 접어 넣어두었다. 책방 문을 여는 비밀번호를 입으로 몇 번씩 되내며 걸어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누가 나의 신나는 뒤통수를 구경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설렘을 마음에 품고 어디로 가는 길은 역시나 즐겁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우리 책방은 이층이다. 일층 문을 열고 올라가 이층에서 잠금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왼쪽의 스위치를 켜면서 책방을 한 바퀴 돌아 켜두어야 하는 조명의 스위치를 모두 켜두었다. 제법 쌀쌀한 날씨이니 온풍기도 어서 켜두자. 일단 내가 추우니까. 겉옷을 책방 안쪽 옷걸이에 걸어두고 해야 할 일을 하나씩 해본다. 아로마 디퓨저를 켜고 오디오를 킨 다음 음악을 플레이한다. 결제 어플에 들어가 영업 시작으로 변환시키고 카드기 전원을 꾸욱 3초간 누르면 된다. 아 맞다, 가습기에 물을 받아서 틀어두어야 한다. 온풍기를 계속 틀어두면 건조해져서 가습기를 틀어둔다는 사장님의 세심함을 잊지 말자. 오픈 준비가 되었으니 책방 오픈 팻말과 입간판으로 책방이 있음을 알리고, 1층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진짜 오픈 준비 끝!! 이제 손님만 들어오면 된다!!! 두근두근.

책방 지기 자리에는 책방 지기 일지가 있다. 앞선 선배님들의 일지를 훔쳐보며 비슷하게 날짜와 크루에서의 활동명을 써둔다. 그리고 손님을 기다렸다. 다행히 인수인계 내용이 적힌 종이를 다시 꺼내보지 않은 나에게 작은 대견함을 느끼고 4시간 동안 무탈히 사장님께 연락할 일 없이 있기를 바라보았다. 


12시 13분, 첫 손님이다. 헐.. 떨려. 너무 떨려. 내가 계산 실수를 하면 어쩌지. 약간 긴장된 상태로 있었는데 조용히 찾아와 말을 거셨다. "책을 전시하고 싶은데요, 수익금은 안 주셔도 되고 전시만이라도 가능할까요?" 다행히도?! 책 구매 손님은 아니고, 독립출판물을 전시하고 싶으신 작가님이었다. 사장님께 전달하겠다며 이름과 연락처를 받아야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라 메모지가 눈에 보지 않는다. 급한 데로 책방 지기 일지 한 구석에 연락처를 받았다. 손님을 보내고 자리 옆 서랍을 열어보니 포스트잇이 한가득이다. 이런...


작가님이 다녀가고 조용한 책방. 디퓨저 향이 좋아서 멍하니 앉아있다가 사진을 찍어 개인 SNS에 출근을 알렸다. 몇 안 되는 지인들이 다녀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기다리는 손님이 오지 않아 노트북을 켜고 할 일을 하고 있는데 드디어 다시 손님이 왔다. 


14시 16분, 혼자 온 여자분이다. 책방 입구부터 책들을 하나씩 천천히 살펴본다. 왠지 금방 갈 것 같지는 않다. 나도 처음 가는 서점에서는 입구부터 하나씩 살펴보는데, 괜한 동질감에 고개를 빼꼼 빼꼼 내어 손님의 위치를 확인한다. 책방지기 자리는 내 키보다 조금 높은 책장이 앞에 있어 손님이 오셨나 가셨나 살펴보려면 사알짝 까치발을 들고 요리조리 고개를 내밀어야 한다. 한 시간 정도 천천히 책들을 살펴보다가 '나는 왜 불안한 사랑을 하는가'라는 책을 고르고 책을 읽고 가도 되는지 물어보는 손님. 첫 결제라 최대한 긴장하지 않은 척, 떨리지 않은 척을 하며 결제를 하려 하는데 이미 허둥지둥이다. 일지에 책 제목과 금액을 적어두고(처음이라 마음이 급해 엄청 휘갈겨 써서 나중에 다시 썼다..) 결제 어플을 켰는데 순간 당황해서 "잠시만요-"라고 말하니 천천히 해주셔도 된다는 손님. 손님 천사이신가요?! 몇 초 되지도 않는 시간인데 손님께 결제를 빨리하고 앉게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자꾸 조급했다. 무탈히 결제를 마치고 책을 읽고 가는 손님께는 커피나 차를 드리고 있어 안내드렸다. 손님이 고른 차를 준비하면서 나 잘한 건가? 실수한 건 없나? 생각하며 물을 끓였다. 결제 어플에 들어가서 내가 결제한 내역을 여러 번 확인했다. 나 자신이 꼼꼼하지 않은 사람임을 알기에,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확인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여기는 내 사업장도 아니고 남의 사업장인데! 실수로 손해를 만들면 안 되지. 아르바이트 첫날, 첫 손님부터 실수가 있어서 안된다. 자꾸 살펴봐도 결제내역에 결제 완료라 떠있으니 안심하고 손님께 차를 가져다 드렸다. 


정신없이 첫 손님을 맞았지만, 진정한 책방지기가 된 듯한 느낌에 또 손님이 와서 책을 사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 생각을 들은 걸까. 또 손님이 왔다. 


14시 35분, 잠시 살펴보더니 '상처가 될 줄 몰랐다는 말'이라는 책을 구매했다. 지금까지 다 모르는 책들이라 무어라 말 한마디 덧붙이지 못하고 계산대에 있는 서점 도장 마음껏 찍어가시라는 말과 영수증 드릴까요? 만 물었다. 


14시 41분, 여자분 두 분이 오셔서 선물해 줄까,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어 선물용 책싸개를 한번 확인했다. 책을 서로에게 보여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손님은 아쉽게도 그냥 나갔다. 안녕히 가세요. 언젠가 또 오셔서 서로 꼬옥 선물하시길 바라요!라고 속으로 외쳤다. 내향인 책방지기는 오늘 마음으로 많이 외친다. 


14시 58분, 장발의 남자분이 와서 '비운의 죽음은 없다.'와 '재난 그 이후'를 구매했다. 두 권 다 벽돌책이고 제목도 심상치 않다. 이 두 책을 얼마 만에 다 읽을지 궁금하다. 어떤 계기로 이런 책을 사는지도 궁금하지만 내향인 책방지기는 영수증무새마냥 영수증이 필요하신지만 물었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재난 그 이후'는 애플티비 드라마로 방영된 원작이고 2022년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이며 전미 비평가협회 수상작이라 한다. 드라마를 보시고 책을 보시는 것인지 또 궁금해졌다. 꽤 오랫동안 긴급구호 현장과 난민 사업을 했던 나는 재난 관련한 책은 감정이입이 잘 되고 마음이 힘들어 선뜻 손에 잡히지 않지만.. 나중에 아주 나아아아아중에 시간이 지나면 읽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 후 여러 손님들이 오고 가고 15시 5분 '제주도 호텔리어의 그림판 일기'와 '나의 조현병 삼촌'을 구매하는 마지막 손님을 맞았다. 제주도 책은 제목부터 느낌이 왔는데 역시나 찾아보니 독립출판물이 맞았다. 정말로 그림판으로 그림을 그린 일기로 제주도 호텔리어의 에피소드를 묶었다. 이런 책이 우리 책방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재밌다. 


책방에 무슨 책이 있는지 다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오늘 판매된 책 중 아는 책이 한 권도 없었다. 그래서 손님들은 왜 저 책을 골랐는지 물어보고 싶고 궁금하다. 반대로 내가 책을 사는 이유를 생각 보면 그냥 읽고 싶은 이유이긴 하지만... 여러 책 중에 골라서 결제하게 만든 부분이 하나씩 있을 텐데 다음엔 조용히 물어볼까 싶다. 나도 책방일기를 그림판으로 그려볼까 하다가, 호텔리어만큼의 다양한 에피소드는 없을 것 같아 빠르게 마음을 접어본다. 


첫 출근날인 오늘 나의 첫 구매 손님은 15시 46분 즈음 자리를 정돈하고 떠나셨다. 손님이 앉았던 자리와 책들을 한번 둘러보고 16시부터 마감을 시작했다. 1층에 두었던 입간판을 올려두고 close로 팻말로 바꿔두고 설거지를 했다. 오픈했던 순서의 역순서로 하나씩 끄고 마지막에 문을 잠그고 1층 문도 닫으며 카톡방에 퇴근을 알렸다. 생각보다 매출이 잘 나온 느낌이다. 문 닫힌 책방의 사진을 개인 SNS에 올리며 퇴근을 알리니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책방지기가 잘 어울린다, 놀러 가겠다 또 언제 일하느냐 등등. 나도 신났는데 친구들도 즐거워하니 덩달아 신이 난다. 무언가 엄청난 즐거움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런 것은 없지만 나의 로망 중 하나를 실천한 기쁨은 계속 있을 테니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즐겁다!!!


책방 일지 글도 책방에 손님 없이 멍하니 앉아있다가, 이 순간의 마음을 감정과 생각을 글로 남겨야겠다며 책방에 앉아서 첫 글을 우다다다쓰고 퇴고도 꼼꼼히 못하고 발행했다. 그렇게 안 하면 또 서랍에서 잠자는 글이 될 것 같았기에 시작했는데, 나의 일지는 언제까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로망 실천의 즐거움을 소소하게 기록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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