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똥밭을 건너

비행과 평화의 날

by sero


2024년 5월 7일 화요일, 암스테르담에서 한국으로돌아가는 날이다. 한국행 비행 날에 밖에 나가는 일은 잘 없다. 일하며 돌아가니 최대한 자둬야해서다. 이번엔 출발시간이 늦어 산책이라도 할까 싶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퇴사 날짜가 좀 더 보고 가- 살짝 등 떠민 것도 같다.

호기심이 많아, 퇴사를 정하기 전에도 체류지에서 열심히 돌아다닌 편이다. 매달 21일, 언제 어느 도시로 누구와 가세요- 쓰여 나오는 수동적 스케줄 안에서 어디든 갈 곳을 정해 다녀오는 게 그나마 한 능동적인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그 날 정한 목적지는 호텔 근처 공원이다.

아침을 먹고 호텔 자전거를 빌렸다. 열쇠를 받아 간 자전거 보관소에서 두툼한 자물쇠와 한참 씨름했다.왼쪽 오른쪽 몇 번을 돌려도 안 열린다.

이리 저리 자물쇠를 괴롭히니 철컥, 굽어진 쇠가 드디어 틈을 보였다. 안심하고 올라탔는데 이번엔 안장이 높다. 다시 내려 실랑이를 한다. 자물쇠와 다투느라 진이 빠져 안장과 아옹다옹할 기운이 없다.

살짝이라도 내려간 걸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출발 전 3시까지 돌아간다는 계획으로 2시에 맞춘 알람을 한번 더 확인했다. 안장이 높으니 허리가 어설프게 꺾여 꼴이 우습다. 횡단보도 앞에 멈출 때마다 까치발을 해야하니 가랑이도 아팠다.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일단 공원 표시가 있는 방향으로 간다.


숲 속으로 들어서자마자 으악..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공원 표시 아래 있는 작은표지판을 제대로 보지 않고 온 죄다. 말 그림이 그려 있었다. 나는 말대신 자전거를 타고 말 전용 길에 들어섰다. 말똥 천지다. 말 발이 그렇게 큰지 몰랐다. 과장을 보태 젖은 진흙 위로 공사장 포크레인이 이리저리 파고 지나간 것 같단 상상을 했다. 움푹 파인 말 발자국에 말오줌이라 믿고 싶지 않은 것들이 고여 있다. 나는 왜 아이보리색 긴 바지와 연한 버터색 컨버스 하이를 신고 나왔을까? 만화처럼 모락모락나는 김이 보이는 것 같고 발이 따뜻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페달을 밟아봤지만 질척한 바닥이 앞으로도뒤로도 가지 못하게 붙잡았다. 안장이 높아 발을 사뿐히 딛을 수 없다. 발 끝을 말똥에 있는 힘껏 다이빙시키거나 아예 내려 자전거를 끌며 말똥밭을 걸어야한다. 뭐가 더 나은 선택일까(뭐가 말똥이 덜 묻을까) 고민하다 내려서 자전거를 끌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컨버스 천까지는 살짝만 닿고 밑창 고무 선에서 말똥과 작별했다. '이게 뭐야 으'

궁시렁대며 다시 페달을 밟는다. 타지에서 혼자 돌아다니면 혼잣말이 는다.

조금 가다보니 목장이다. 삐그덕- 바랜 회갈색 울타리 문을 열고 들어섰다. 툭 치면 부서질 것 같은 울타리의 있으나마나한 허술함이 귀여웠다. 그 안을 돌아다니는 동물들 사이 엉뚱하게도 작은 미끄럼틀을 타는 염소가 있었다. 염소를 보며 신난 아이들과 그걸 보는 가족들의 웃는 얼굴에 방금 전 냄새나는 사투를 조금씩 잊었다. 오늘도 누군가의 보통 하루 속에 잠시 구경왔다.


목장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며 문득 나의 비행도 여행이 될 수 있나 떠올려본다. 여행이 일상을 떠나 비일상 속 나를 발견하는 거라면, 떠나는 게 일상이 된 내가 하는 건 여행일까 아닐까 종종 궁금했다.

이 비행인지 여행인지는 가끔 순간 이동처럼 엉뚱한 곳에 떨어진 기분이 든다. 십여년을 해 왔고 미리 나오는 스케줄이 있어도 그렇다. 비행기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호텔에서 더 정신없이 자다 나오면 멍해질 때가 있다. 특히 밤샘 비행 후 깨면 누가 온 몸을 꾹꾹 밟고 간 느낌과 함께 눈을 떠서인가 싶다.

방금 전까지 한국에 있다 먼 나라 길에서 멀뚱히 신호를 기다리는 게 믿기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래도 영화 '셉템버 이슈'*에서 본 대사가 떠오르면 꼼지락꼼지락 일어나 나갔는데, 그건 "항상 눈뜨고 있으라. 보이는 모든 게 영감을 줄 수 있다" 였다.

꼭 번뜩이는 뭔가가 떠오르지 않아도 이런저런 것들을 눈에 담아갔다. 그렇게 근처를 걷든 공원에 앉아 빵을 뜯어 먹든 암막 커튼 친 방에서 나가 뭐든 보고 온다는 나와의 약속을 굳혔다. ‘뭐든’에는 오가다 본 표지판, 어제 마주친 트램 안 퇴근하는 사람들, 말똥밭을 빠져나와 본 당나귀, 공원 캠핑장의 가족 어떤 것이든 해당된다. 지나치며 바라보다 보면 사람사는 건 어디나 비슷해- 생각도 한다.

좋았다 기운빠졌다 다시 힘내봤다를 반복하며 매일을 열심히 꾸려가는 것, 닮은 점과 다르게 각자만의 고유한 경험을 쌓는 것, 그리고 얼마나 다양한 삶을 살건 결국 세상 끝의 도착지는 같다는 것, 중요한 건 나로 살고 소중한 사람들과 쌓는 작은 순간들이란 것도 그렇다.


입사 초반 팀원들과 시끌 벅쩍 유명한 여행지를 다니던 시기가 지나고 두 발로 동네 구경을 다니기 시작했다. 명소를 단체로 다니며 인솔자의 설명을 듣는 것보다 혼자 걸으며 쌓인 시간이 마음에 오래남는 웅성거림을 남겼다. 동시에 웅성대는 생각들이 누군가의 일상에 불현듯 들어가 걷는 동안 차곡차곡정리되기도 했다.

비행을 가 그렇게 그 곳 사람의 일상을 구경하는게 비일상 속 일상이 되어갔다. 맛집이나 가보고 싶은 서점, 예쁜 정원 등 좋아하는 곳들도 자주 갔다. 하지만 여러 곳을 다닐 수록 여행의 조건이 하나둘 생겨난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무엇보다 원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

1년에 수십 번이 아니라 딱 한 번을 가도 스스로 정한 곳에 원하는 모습으로 가는 것.

일몰 명소로 유명한 시드니 천문대가 아닌 한국의 동네 뒷산에서 지는 해를 봐도, 소중한 사람과 보면 그게 나한테는 더 좋은 여행이구나 알게 됐다. 예쁜 걸 보거나 맛있는 걸 먹으면 생각나는 얼굴들때문인가보다. 또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는 모습보다 일상이 단정하고 하루를 충실하게 쌓아가는 사람이 훨씬멋져 보였다. 그러니 밤샘을 싫어하는 내가 원하는 만큼 착실한 일상이 아닌 건 비행 너의 불규칙함 때문이야라고 구박하며 탓하기 딱 좋았다. 천천히지만멈추지 않고 페달을 밟는 발처럼 머릿 속에 이 생각 저 생각이 이어진다. 자전거가 목장 끝에 다다랐다. 개구진 염소가 있는 목장과 이 곳 사람들의 하루에도 안녕을 말할 참이다.

삐걱- 나가는 길 목장 문을 힘껏 밀었다. 키 크고 굵다란 나무들이 가득한 길이다. 모두를 위에서 내려다보지만 권위없이 상냥한 숨을 뿜는다.

몸을 던지면 푹신하게 받쳐 줄 듯한 녹색 풀들도 보였다. 그 위 노랗고 하얗게 작은 꽃들이 흩뿌려져 있다. 박자감 있는 페달 소리가 경쾌했다. 토독토독 자잘한 자갈들이 밟히는 소리도 묘하게 듣기 좋다.

구경한 이 곳 일상이 우리와 다름없이 따뜻해선지, 태어나 처음 본 미끄럼틀 타는 염소 덕분인지 말똥으로 잃었던 웃음도 되찾아 달린다. 바람이 살랑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속도를 조금 늦춰 가만가만 얼굴에 닿는 보송함을 느껴봤다. 시나 노래 가사에 나올 법한 감싸안는 바람이 시원하고 따뜻했다.

구름색 하늘색 나무색 풀색 꽃색 좋아하는 빛깔만 모인 길을 지났다.

나란히 이인용 자전거를 탄 노부부와 커다란 바구니에 딸을 태운 엄마의 자전거, 호수 위 자동차 모양의 배를 탄 가족들의 오후를 스쳤다. 그들의 얼굴에 한국에 있을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아마 살며 처음 온전히 나만 생각하며 스스로 하는 결정, 퇴사 앞에 생각나는 얼굴들. 누군가는 걱정하고 누군가는 응원할, 보고싶은 얼굴들을 떠올리며 암스테르담의 잠잠하고 아늑한 길을 지난다.

어디 앉아있는지 모르지만 길의 시작부터 끝까지 새들도 함께 했다. 내내 부르는 음이 귀에 부는 바람 소리와 듣기 좋게 어울렸다. 땅에 닿는 걸음까지 푸른 색일 것 같이 울창한 초록 숲 길이 끝나간다.

길의 마지막 즈음 습관적으로 오른쪽으로 틀다 페달을 멈췄다. 탁 트인 잔디밭과 그 끄트머리엔 투명한 호수다.

모두에게 고흐 풍차 아름다운 튤립의 나라로 기억될곳에서 말똥밭을 헤맨 것보다 비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말똥밭을 제외하곤 처음으로 자전거에서 내렸다. 늦지않게 가 자야한다는 압박감에 서둘러 다녔지만 내리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진초록 사이 사이 햇살이 닿은 부분만 살짝 형광끼있는 봄의 연두빛이다.

호수 근처의 도란대는 사람들은 아주 멀었다. 너른 들판에 혼자 서 있는 기분이다. 와,, 와,, 내 귀에만 들리는 감탄사를 여러 번 내뱉어도 충분치가 않았다. 잔디밭 위 벤치에 앉았다. 벌렁 눕고 싶지만 알람이제대론가 확인하는 맘은 그대로다. 언제든 자전거에올라탈 수 있게 의자 끄트머리에 앉았다.

매일 떠나지만 내가 하는 게 여행인지 비행인지 모르겠는 내가 점점 여행의 설렘이나 낭만에 대해선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생각했었다.

한국에 있고 싶고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걸지도 몰라 했었다. 그런 내게 여행은 예상 못한 곳에서 뜻밖의 선물과 손편지를 슬쩍 내밀었다. 깜짝 선물은 감동이 두배다.

맑은 날 공원 벤치에 놓인 편지를 뜯었다. 보낸 사람은 암스테르담 비행(혹은 여행)이 아니라 십년 넘게 함께 한 비행 여정 그 자체다. 내용은 글자아닌 것들로 쓰였다. 흰 구름과 사이좋게 엉긴 하늘 색으로 쓰고 초록 들에 뿌려진 눈같이 가벼운 흰 꽃으로 썼다. 한가득 삼키는 초록 숨으로 채우고 끈기있게 따라오며 들려준 새의 목소리도 빼곡했다. 지난 시간과 그 시간을 보낸 나에 대해 좋고 미움이 섞여 있던 그 즈음의 내게 도착한 다정한 선물이었다.


여행이면 어떻고 비행이면 어떠냐. 그렇게 깐깐히 따지지 않아도 이런 광경을 본 거면 충분하지 않아?

그냥 고맙고 감사했다. 퇴사 앞 알게 모르게 어지러웠을 마음이 차분해졌다.

넓게 펼쳐진 들과 물 구석구석을 본다. 눈에 담고 크게 호흡해 숨으로도 들이마셨다. 내쉴 땐 자잘한 아쉬움이나 불만들에 감사함을 잃었던 때, 다 걸러내지 못한 작은 후회들도 같이 뱉는다.

햇빛 투명한 풍경이 그걸 다 안을만큼 품이 넉넉했다. 그 즈음 많이 생각하던 어떻게 하면 마무리를 잘 할 수 있을까? 란 숙제를 해결한 기분이 들었다.

비행과 저절로 화해한 평화의 날이다.

원하는 태도로 내 일상을 사랑해주지 못했던 때의 나, 시간을 허비한 건 아닐까 불안하던 나와 평화롭게 함께 할 수 있게 됐다.

어느 순간 고정된 생각은 성의껏 들여다보지 않으면그대로 굳어져 말똥밭에 빠진 듯 나를 가두기도 한다. 그렇게 눈 앞에 세계만 좁게 보는 건 스스로 말똥밭에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다.

그 동안의 경험에서 느낀 아쉬움은 다음 장에서 반복하지 않고 배운 점만 보태가면 그 간의 여정이 진짜 여행으로 완성될 거란 생각을 했다.

퇴사가 6개월 앞으로 다가온 5월의 네덜란드.

여섯 번의 스케줄이 남았지만 거기 적힌 AMS(암스테르담의 공항코드) 를 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가능한 눈에 많이 담아가야지. 사진은 적당히 찍고 가까이 멀리 양 옆 대각선 사방을 골고루 본다.

알람이 울렸다. 침이 잔뜩 묻은 공을 자랑하듯 물고 온 삽살이닮은 강아지랑 그 주인과 나눈 인사를 마지막으로 호텔로 향했다. 돌아가는 비행 힘들어도 컨디션에 휘둘리지 말고 마무리 잘 하자. 마음도 먹어본다. 말똥을 밟고 무거워졌던 바퀴가, 피어나듯 퍼지는 흙바닥을 구르며 가벼워졌다. 역시 사람은 경험을 통해 배운다. 돌아갈 땐 향긋하게 사람 길로 들어섰다. 숲에서 바퀴에 묻혀온 것들 그대로 푸르게 달렸다.





#암스테르담 #비행 #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