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찬우 Jul 27. 2020

오늘, 책상 옆구리를 사글세로 줬다

내가 안 쓰는 책상 위 공간, 옆 사람이 쓰게해도 괜찮을까?

"그랬다가 돌아가면 책상 없다"


관습적으로 쓰는 표현이다. 요새는 낡은 표현이 되어 잘 안 쓰는 것 같기도 하다만, 직장에 발가락이라도 담가보니 책상은 정말 나의 고용상태를 확실하게 말해주는구나 싶다.


나는 대학원생이자 고등학교 시간강사로, 고등학교에는 주 2회~3회 정도 나간다. 2회는 수업을 하러 고정적으로 출근하고, 그 외에 학생들이 오프라인 등교를 할 때에 맞춰 평가결과 확인이 필요할 때, 마감이 임박한 서류를 제때 제출하지 않았을 때&못했을 때, 교과 회의를 해야 할 때 한 번씩 더 다녀올 때가 있다.



우리 학교에 있는 책상은 ㄱ자 모양이다. 가로길이는 두 팔을 쭉 뻗을 수 있는 정도고 기본적으로 철제 책꽂이, 철제 서랍, 모니터, 키보드와 마우스를 제공해준다.


책상이 정돈된 모습을 보면 그 선생님의 성격이나 업무 스타일을 대충 파악할 수 있다. 책상엔 정말 그때 필요한 도구와 책만 놔두고 나머지는 사물함이나 서랍에 넣어두는 미니멀리스트 '곤도 마리에' 타입이 있다. "Does it spark a joy?" 같은 정리용 시그니처 문장 하나 만들고 유튜브 열어도 연금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우리 학교 선생님들의 대부분은 곤도 마리에 과인 것 같다.


실제로 내 대각선 뒤쪽에 앉은 E 선생님은 깔끔하고 정돈되어있는 책상을 항상 유지하시는데, 때때로 "이거 좀 분류되어있으면 좋겠다~", "이거 이제 좀 정리해야겠다. 당분간 안 볼 거 같으니까"라고 혼잣말을 하시면서 책상을 착착 정리하신다. 그때그때 적절한 서류 정리 도구도 어찌나 잘 찾아오시는지... 곁에 있으면서 많이 배우고 싶다.


물건을 쌓아놓고 사는 비버* 타입도 있다. 나의 왼쪽 자리에 계신 S 선생님께서는 책상 3면이 2단 책꽂이이고, 책상 바로 옆에 높이가 1m가 넘을 것 같은 사물함도 가져다 놓고 쓰시며, 교과특별실에도 자신의 물건을 정리해두셨다. 아, 모니터도 두 대를 쓰시고**,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 각종 영상 촬영보조장비도 종류별로 두세 개씩 구입하셔서 상황마다 다른 장비를 사용하신다. 책, 영상장비, 클립, 포스트잇 등등 업무에 필요한 모든 도구를 넉넉히 구비해두고 사는 분이시다.

 책상에도 빈 곳이 없고, 마치 성 안에서 노상 별 보고 기록하고 참고문헌 보는 일을 반복하던 프톨레마이우스같다. 자신이 책과 장비로 쌓아놓은 성 안에서 연구하고, 행정 일하고, 연구하고, 은 업무를 하신다.


내 오른쪽에 앉는 G선생님은 학기 초에는 미니멀리스트에 가까웠는데, 어느 날 블루투스 키보드를 사 오시고 전공도서로 책상 3면을 점점 쌓으시더니 드디어 오늘, 모니터도 한 대 더 구입하셨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자신의 책상 책꽂이에 책을 빼곡히 꽂고 책상 옆구리(ㄱ자 세로획)에 쌓고 몸통에도 쌓다가 어느 날부터 내 책상의 옆구리에 자신의 물건을 놓으신다. 오늘은 커다란 모니터 상자가 내 책상 옆구리에 놓여있었다.



처음에는 나는 주 2~3일만 학교에 나가니까 내 책상 옆구리에 다른 이의 물건이 얹어져 있어도 별 생각이 없었다. 학교에서 나를 생각해서 공강시간을 없애준 덕분에 연타로 3시간 수업을 해야했고, 온라인 수업으로 파일과 학습자료 등을 미리 세팅하는 데 쉬는 시간을 바치기 일쑤였다.  동영상 자료까지 쓰는 날엔 영상이 끊김없이 재생되는지 내 아이패드로 따로 확인하느라 교무실에 거의 내려가지 못했기 때문에 책상을 사용하는 일이 많지 않았.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 자체가 짧다보니 내 책상 위에 다른 이의 물건이 있어도 누가 잘못 가져다 둔 게 티나지 않으면 그냥 두었다.


게다가 나는 교과서부터 학습자료까지 모든 자료를 파일로 저장해서 사용하고, 남은 인쇄물은 주로 파쇄하는 편이며, 학생들이 작성한 수행평가자료는 사물함에 보관하기 때문에 책상과 책꽂이가 거의 비어있다. 책꽂이에는 온라인 수업 때 쓰는 헤드셋과 오프라인 수업 때 쓰는 손세정제, 마스크, 중요한 메모를 적어두는 포스트잇만 놓여있을 뿐이었다. 책상 위는 웬만하면 비워놓는다. 직장에서 보는 서류가 다 빤하지 않나. 책상 위에 올려놔서 좋을 것 없는, 보안을 유지해야하는 서류들이 꽤 있다(학생 성적, 시험문제 등등은 더 그렇다).

그러다보니 언뜻보면 그냥 빈 책상같기도 하다. 책상 벽에 공지사항과 주의사항, 일정표 종이만 집게 자석으로 붙여두었는데, 사람들이 그걸 보고서 오찬우의 책상임을 짐작하는 거 같다.

무 삭막한가? 사실 학생들이 찾아오거나 당 떨어질 때 먹을 초콜릿 정도는 서랍에 넉넉히 넣어뒀다. 그렇지만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보이면 자꾸 먹고 싶기 때문에) 책상 위에 잘 올려놓지 않는다.


뭐든 벽에 걸고 세우고 서랍에 넣길 좋아하는 성향 덕분에 내 책상 몸통과 옆구리는 늘 비어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G 선생님 내 책상 옆구리는 땅 주인이 있지만 오랫동안 그린벨트로 묶여있어서 풀만 무성한 공터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가끔 지름길 생기거나 개구멍 생기곤 하는. 가까운 곳에 있는 빈 공간이니 잠시 짐을 올려뒀다가 내가 오면 치울 생각 아니셨을까.



오늘 학교에 도착해서 커다란 모니터 포장 상자를 보고 이게 뭐지? 란 표정으로 멀뚱멀뚱거리니, 다른 선생님들이 자리에 안 계신 G선생님 대신 황이 이렇게 된 까닭을 말씀해주셨다.


"놓을 데가 없어서 잠시 놓으셨나 보더라고. 모니터를 싸게 새로 샀대~" -둥글둥글 성격 좋고 유머감각이 뛰어나신 C 선생님

"이거 남의 책상에 이렇게 놓으면 어쩌나. 얼른 치우라고 해야겠네." - 아까 그 우리 학교 곤도 마리에 E선생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주변 선생님들이 더 걱정을 해주신다. 쩌면 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놓을 데가 없어서 잠시 놨어요~" -내 책상 옆구리의 쓸모를 찾아주시는 G선생님


(1)나의 영역을 수호하여 상자를 치우라고 해야 할지, (2)이 영역의 주인은 나지만 선생님한테 빌려주는 거라는 뉘앙스를 풍겨야 할지, (3)그냥 허허 하고 (어찌보면 호구같은) 웃음을 지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사실, G선생님께서 내게 저렇게 말씀하셨을 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겐 딱히 불편한 게 없었기 때문에 (3)으로 대처했다.


"하하, 뭐 쓰세요 선생님 "


결국 그냥 웃음만 남긴 채 수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문득 그 책상은 학교가 내게 준 작지만 소중한 나만의 업무공간이니 내 공간을 지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학교에 간헐적으로 출근하더라도 그 영역은 내 주어진 것이다.

민법 판례 중에는 땅 주인이 있는 땅에 지름길이 생겼어도, 그 길 외에 통로가 있고 땅 주인이 지름길로 다니길 원치 않는다면 주인있는 땅에 있는 길을 폐쇄할 수 있다는 것도 있다.  

택배 상자가 현관 앞에 놓일 때도 101꺼는 101호 현관 옆에 놓고, 102호 택배는 102 현관 옆에 놓는다. 101호와 102호 사이에 놓거나 102호 택배가 101호나 202호에 가 있으면 업무상 착오로 인한 명백한 실수다.

G 선생님이 내 책상 옆구리를 사용하더라도 최소한 그 옆구리는 나에게 할당된 개인 업무 공간임은 주지시켜야 할 것 같았다.


개인 업무 공간을 마련해주는 건 그 사람의 고용지위를 반영한 조치다. 나는 시간강사이긴 하지만 수업과 평가, 대회 지도를 담당한다. 다른 선생님들과 대등한 위치에 서서 소통해야 하는 상황들이 종종 있다. 개인 공간을 사수함으로써 나도 자격을 갖추고 업무를 하는 사람이며, 업무를 하는 데 있어 동등한 발언권이 있다는 사실을 상대가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나의 후임 혹은 나의 동료로 일하고 있는 강사 선생님들이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때 '찬우샘은 그냥 가만히 계시네..불편해도 가만히 있어야할까?'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대처할 필요가 있다.


내 자리가 정말 물리적인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개인 공간 침범으로 인해 겪을 불편을 토로하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책상 옆구리를 G선생님에게 파맛첵스 같은 인싸들의 간식을 제공받고 사글세 주기로 결심했다***



G 선생님은 아무래도 곤도 마리에보다는 비버 타입에 가까우신 것 같다. 곧 S 선생님을 따라갈 느낌이 든다. 내 책상 옆구리를 빌려 쓰는 단계를 거쳐 내년 즈음엔 책상 옆에 사물함을 추가로 마련하는 단계로 진화하실 것 같다.

G 선생님이 내 책상 옆구리를 계속 사용하실 거라면, (2) 내 것임을 알리면서 빌려주기 전략이 현실적이다.

- 선생님 여기 원래 제 공간이지만 짐 올려놓으세요. 세는 지난번 파맛첵스 받은 걸로 퉁(?)칠게요!


오늘, (맘속으로) 내 책상 옆구리를 사글세 놓고 왔다. (다음주에 확실히 임대공간이 될 예정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 전에 곤도 마리에 선생님께서 G선생님의 상자를 놔 둘 곳을 찾아주실 지도 모른다)


덧. 오늘도 내가 직장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해프닝에 잘 대처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은 들지 않는다. 별 게 다 고민이다 싶다. 그냥 시간이 훅 접혀서 한번에 경력 20년차의 노하우(와 연봉)을 갖게 됐으면 좋겠다.


*비버는 자기 보호, 먹이 저장 등의 목적을 가지고 나뭇가지 등으로 댐을 쌓는다.

**우리 학교의 유행인가? 모니터를 두 대 쓰시는 선생님이 굉장히 많으시다. 사립학교고 근무분위기, 교직원 복지 등이 매우 좋다. 모니터를 두 대 사용하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평생직장으로 삼으시려나보다'라고 생각한다. 안정감이 느껴지니 정착하여 살림살이 들여놓고 그러는 거 아니겠나.

***G선생님은 나눔 정신이 투철한 트렌드팔로워다.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탄 간식이 있으면 많이 사 와서 주변 사람들과 나눠 드신다. 때때로 약간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내게 먼저 먹어보고 리뷰해달라고 하시는데 그럴 때 정말 귀여우시다ㅋㅋㅋ순수하시고 호기심 많고 명석하고 따뜻한데 약간 허당미가 있어서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작가의 이전글 오늘, 양말을 짝짝이로 신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