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과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는 고등학교가 모두 방학을 하여 식후땡 아메리카노만큼이나 값진 여름휴가를 맞이했다.
전염병과 수재로 어디 가기에 부담스러운 시기이기는 하나, 때마침 대학 동기가 우리 집 근처 서점에 책을 사러 온대서 같이 밥 한 끼 했다.
3개월 만에 만난 것 같다. 우리는 따끈한 솥밥에 고추와 파가 송송 들어가 있는 간장을 입맛에 맛게 한두 숟갈 넣고 두런두런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친구는 차를 구입할 생각인데 어떤 차 디자인이 제일 나은 것 같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밥을 먹으면서 같은 메뉴를 파는 집과 차이점을 논하기도 하고, 최근에 결제한 콘서트가 과연 오프라인으로 열릴 수 있을 것인지 모르겠다며 다양하고 밝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나도 밝고 건강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정작 내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온통 교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과 그의 업무 스타일에 대한 서운함과 불만, 대학원 시스템의 고질적인 문제점 등이었다. 교수님의 이런 말씀이 내 기억에 남아서 자꾸 맴도는데 그게 너무 힘들고, 교수님께서 내게 이제는 부드럽게 말씀해주시는데도 아직도 교수님을 뵐 때면 며칠 전부터 과도하게 긴장이 되고, 하도 까이기만 하니까 질문하기도 무섭다는 둥 주로 교수님과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어려움과 교수님께 서운한 점을 주절주절 털어놨던 것 같다.
친구에게 대학원 생활이 녹록지 않다 수준을 넘어 구체적으로 이러이러한 게 서운하고, 이러이러한 게 힘들었다며 한탄한 건 처음이었다. 순간 말을 막 쏟아내다가 말하던 사람인 내가 되레 '내가 뭐 이런 것까지 말하고 있지?' 하고 놀랐다.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다. 자동차 디자인 한 번 더 보자. 다시 골라볼래."라고 화제를 전환하면서, 터져 나오는 설움과 화를 억지로 봉합했다.
그런데 사실 난 나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엄마에게 거의 매일 대학원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아주아주 격앙된 목소리로 내질렀었다. 친구에게 말을 할 때는 단어 선택부터 조심했다. 그에게는 내가 잘못해서 혼이 났던 부분은 팩트를 말해주고, '내 잘못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서운했고 그게 생각보다 오래간다'라며 나름대로 차분하게 나의 마음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엄마와 통화를 할 때는 짜증을 있는 대로 다 표출했었다.
푸념이나 투정과 욕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앞의 두 가지는 좀 더 팩트에 기반하여 나의 현재 감정을 차분히 설명하는 느낌이라면, 욕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팩트를 확 줄이고 분노를 터트리는 일로 보인다. 슬프게도, 내가 엄마에게 했던 말은 푸념보다는 욕에 가까웠다.
사람이 대화를 집중해서 듣다 보면 상대방의 톤과 분위기에 감화되기 마련이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 하고 집에 들어와서 늦은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 엄마에게 나는 무슨 짓을 한 걸까. 얼마만큼의 짐을 엄마에게 떠넘긴 걸까.
오늘 저녁, 엄마와 통화하면서 친구와 했던 대화와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다른 톤으로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인지하고 아차! 싶었다.
나 엄마랑 통화할 때마다 화풀이를 하고 있었구나.
나는 곧 내가 '신경질적 욕 중독'에 걸렸음을 인정했다. 누군가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감정을 날 것으로 표현하면 소중한 관계를 잃거나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 하기는 스포츠가 아니다. 게임도 아니다. 푸념, 투정에서 팩트가 줄어들고 짜증과 화가 늘어나면 그것은 귀여운 투정 정도가 아니라 욕이다. 그런 말을 전화를 할 때마다 누군가에게 뱉는 건 상대가 보일 때마다 독침을 쏴 대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우리 가족, 특히 제일 사랑하는 우리 엄마, 소중한 내 친구들, 나를 언제나 아껴주는 사람들을 위해 화가 나고 짜증 나는 일은 일기를 쓰면서 정리하고, 말을 꼭 해야겠거든 돈을 내고 상담전문가의 도움을 받겠노라 다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