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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찬우 Aug 09. 2020

오늘, 환자 본인은 욕 중독 검진 및 치료에 동의합니다

나의 짜증과 화를 다른 이에게 옮기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신경질적 욕하기 중독이라는 자가진단을 내렸다.


대학원과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는 고등학교가 모두 방학을 하여 식후땡 아메리카노만큼이나 값진 여름휴가를 맞이했다.

전염병과 수재로 어디 가기에 부담스러운 시기이기는 하나, 때마침 대학 동기가 우리 집 근처 서점에 책을 사러 온대서 같이 밥 한 끼 했다.


3개월 만에 만난 것 같다. 우리는 따끈한 솥밥에 고추와 파가 송송 들어가 있는 간장을 입맛에 맛게 한두 숟갈 넣고 두런두런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친구는 차를 구입할 생각인데 어떤 차 디자인이 제일 나은 것 같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밥을 먹으면서 같은 메뉴를 파는 집과 차이점을 논하기도 하고, 최근에 결제한 콘서트가 과연 오프라인으로 열릴 수 있을 것인지 모르겠다며 다양하고 밝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나도 밝고 건강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정작 내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온통 교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과 그의 업무 스타일에 대한 서운함과 불만, 대학원 시스템의 고질적인 문제점 등이었다. 교수님의 이런 말씀이 내 기억에 남아서 자꾸 맴도는데 그게 너무 힘들고, 교수님께서 내게 이제는 부드럽게 말씀해주시는데도 아직도 교수님을 뵐 때면 며칠 전부터 과도하게 긴장이 되고, 하도 까이기만 하니까 질문하기도 무섭다는 둥 주로 교수님과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어려움과 교수님께 서운한 점을 주절주절 털어놨던 것 같다.


친구에게 대학원 생활이 녹록지 않다 수준을 넘어 구체적으로 이러이러한 게 서운하고, 이러이러한 게 힘들었다며 한탄한 건 처음이었다. 순간 말을 막 쏟아내다가 말하던 사람인 내가 되레 '내가 뭐 이런 것까지 말하고 있지?' 하고 놀랐다.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다. 자동차 디자인 한 번 더 보자. 다시 골라볼래."라고 화제를 전환하면서, 터져 나오는 설움과 화를 억지로 봉합했다.

 

그런데 사실 난 나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엄마에게 거의 매일 대학원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아주아주 격앙된 목소리로 내질렀었다. 친구에게 말을 할 때는 단어 선택부터 조심했다. 그에게는 내가 잘못해서 혼이 났던 부분은 팩트를 말해주고, '내 잘못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서운했고 그게 생각보다 오래간다'라며 나름대로 차분하게 나의 마음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엄마와 통화를 할 때는 짜증을 있는 대로 다 표출했었다.


푸념이나 투정과 욕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앞의 두 가지는 좀 더 팩트에 기반하여 나의 현재 감정을 차분히 설명하는 느낌이라면, 욕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팩트를 확 줄이고 분노를 터트리는 일로 보인다. 슬프게도, 내가 엄마에게 했던 말은 푸념보다는 욕에 가까웠다.

사람이 대화를 집중해서 듣다 보면 상대방의 톤과 분위기에 감화되기 마련이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 하고 집에 들어와서 늦은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 엄마에게 나는 무슨 짓을 한 걸까. 얼마만큼의 짐을 엄마에게 떠넘긴 걸까. 


오늘 저녁, 엄마와 통화하면서 친구와 했던 대화와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다른 톤으로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인지하고 아차! 싶었다.


나 엄마랑 통화할 때마다 화풀이를 하고 있었구나.


나는 곧 내가 '신경질적 욕 중독'에 걸렸음을 인정했다. 누군가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감정을 날 것으로 표현하면 소중한 관계를 잃거나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 하기는 스포츠가 아니다. 게임도 아니다. 푸념, 투정에서 팩트가 줄어들고 짜증과 화가 늘어나면 그것은 귀여운 투정 정도가 아니라 욕이다. 그런 말을 전화를 할 때마다 누군가에게 뱉는 건 상대가 보일 때마다 독침을 쏴 대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우리 가족, 특히 제일 사랑하는 우리 엄마, 소중한 내 친구들, 나를 언제나 아껴주는 사람들을 위해 화가 나고 짜증 나는 일은 일기를 쓰면서 정리하고, 말을 꼭 해야겠거든 돈을 내고 상담전문가의 도움을 받겠노라 다짐하였다.


나의 짜증과 화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말지어다 - [오찬우] 12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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