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학시절의 기억과 지금
그때의 뉴욕과 지금의 뉴욕으로 보는 시대적 차이
2013년 9월, 30살이 끝날 쯔음 한국으로 오기 전까지 저는 뉴욕에서 약 9년을 살았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군 복무 제외 20대의 대부분을 미국 땅에서 보냈습니다.
그 시절의 뉴욕은 지금 한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꽤 낯선 도시였을 것 같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아는 사람이 열 명 중 아홉도 되지 않았고,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미드타운 32번가(Korean Town) 근처도 분명 미국 한복판인데도 인파 대부분은 한국 유학생이나 교포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뉴욕과 분리된 작은 섬처럼 보여졌죠. 유학 시기에 지금은 대형 기획사인 한국의 J 기획사가 뉴욕에 사무실을 열고 무언가를 열심히 시도했다더라 하는 기억도 있습니다. 실제 길에서 몇번 마주치기도 했네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도 자체가 다소 이른 시대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변화의 기류는 2012년을 전후해 아주 조금씩 보여졌습니다. 개인적으론 PSY의 등장이 그 출발점이었을 것 같은데, 분명한 어떤 전환점이 있었고 그 이후로 세계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달라지기 시작했던거 같습니다. 당시의 저는 이 변화가 이렇게까지 이어질 줄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뉴욕에서 작지만 확실한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느낌만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연말 회사 파티에서 강남스타일 춤추는 직원이 이따금 보이는 정도?
얼마 전, 타임스퀘어 한가운데에서 BTS 정국이 공연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2년전 영상이었네요.)
� 링크: https://lnkd.in/gCUfNStK
학교를 가던 길에도, 회사를 향하던 아침에도 항상 무심히 지나치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넋을 놓고 화면을 바라봤습니다. 퍼포먼스와 캐릭터, 무대의 분위기, 관객의 에너지까지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그 자리에 한국의 아티스트가 있었고, 그가 ‘이방인’이 아니라 모두의 환호를 받는 중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기쁨과 자부심, 그리고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왔죠. 이제 한국 아티스트가 뉴욕의 중심에서 환호를 받는게 노멀한 시대라는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뉴욕에 살던 그 시절, 한국의 위상이 지금과 같았다면 어땠을까. 욕심일까 싶지만 아마도 그 당시의 기억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이 매번 어디에 있는지 설명해야 했고, 잘못된 정보를 정정하고자 시간을 들여 이야기해야 했으며, 그렇게 의도치 않은 ‘대표자’가 되어 시간을 들여야 했습니다. 당시 애써 웃으며 넘겼지만 분명히 마음에 남아 있던 미묘한 거리감과 인종차별적인 경험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무대 위의 정국의 퍼포먼스 장면은 단순한 문화적 성공이라기보다 “이제는 한국인이 한국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도착했다고 느껴졌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왜 그렇게 자주 제 자신을 미국에서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을까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당시 자랑이기보다는 때로는 증명해야하는 시기였던거 같습니다. 아마 그래서 이 영상이 시대의 변화처럼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때의 뉴욕이 지금과 같았다면 제 20대는 조금 달라졌을까요. 아마도 억지로 당당한척이 아닌 자연스럽고, 조금은 덜 방어적인 20대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시간을 통과했기에 지금 이 장면이 더 깊이 와닿는 것 같기도 하네요.
지금 저는 30대를 오롯히 보낸 한국에 있습니다. 더 이상 뉴욕에서 한국을 설명하지 않아도 이 곳에서 영상을 보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국가의 위상은 어떤 개인의 삶을 바꿀 수 있고, 그 개인의 기억은 국가의 변화 속에서 다시 해석될 수 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때 뉴욕에서 한국을 열심히 설명하던 사람이, 이제는 한국에서 뉴욕 한복판의 한국 아티스트의 퍼포먼스를 목격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변화의 간극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운이 좋은 세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장면을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런 감정 없이, 너무도 당연하게 지나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때는 정말로 우리가 다음 단계에 도착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