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시작하는 10대 소녀의 사랑
10대 사춘기 소녀는 대중문화의 단골 소재다. 소설, 영화, 케이팝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같은 소녀라도 작품마다 주인공의 성격과 서사는 달라진다. 이를테면 소설 『최선의 삶』 속 ‘강이’, ‘소영’, ‘아람’은 터져버릴 것 같은 감정을 삐뚤어진 방식으로 분출하며 가출 길에 오른다. 영화 <벌새>의 ‘은희’는 알 수 없는 불안과 이해할 수 없는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차분하고 부단히 날갯짓한다.
케이팝에서는 이런 소녀상이 좀 더 아름답게 정제된 형태로 등장한다. 걸그룹의 노래에서는 그간 첫사랑의 설렘이 다채롭게 변주돼 왔다. 소녀시대 ‘소녀시대’, 에이핑크 ‘몰라요’, 트와이스 ‘CHEER UP’, 여자친구 ‘오늘부터 우리는’까지. 2세대 걸그룹부터 3.5세대 걸그룹에 이르기까지 모두 10대 소녀의 사랑을 노래하지만, 곡의 장르와 분위기, 컨셉은 제각각이다.
다양한 소녀상이 이미 넘쳐나고, 여전히 새로운 소녀의 얼굴이 태어나는 지금, 한 질문이 떠오른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소녀의 새로운 모습을 길어 올릴 수 있을까?
2024년 3월 데뷔한 빌리프랩 소속 걸그룹 ‘아일릿’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지도 모른다.
아일릿의 미니 1집 SUPER REAL ME는 앨범명부터 ‘나’의 진짜 이야기를 하겠다는 선언이다. 사랑을 노래하더라도 우리가 아닌 나의 감정, 나의 시선이 중심이다.
데뷔 타이틀곡 ‘Magnetic’은 “our type”은 “정반대 같”지만 “내가 만들래 green light”라고 당차게 말하며 뒤이어 “여잔 배짱이지”라고 외친다. 화자는 너의 감정에 대한 호기심보단 내가 설레는 순간 자체를 즐긴다. 상대의 반응보다 “지금 순간”과 감정에 “과몰입”하는 ‘나’가 원톱 주인공이다.
두 번째 타이틀곡 ‘Cherish (My Love)’는 첫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을 그리지만, 그 경험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I’m a diamond”라는 도입부는 보컬이 반주보다 뚜렷하게 들려 마치 하나의 선언처럼 다가온다. 노래는 “눈치 없는 네 맘”보다 “너무 소중한 내 마음”을 그린다. 자아도취적인 사랑은 아일릿 멤버들이 표현하는 사춘기 소녀의 모습을 투과해 귀여운 사랑으로 변모한다.
세 번째 타이틀곡 ‘빌려온 고양이’는 첫 데이트에 떨려 하는 ‘나’의 모습을 ‘빌려온 고양이’라는 속담이자 밈으로 풀어냈다. 하지만 긴장 속에서도 “데이트도 기세야”라며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이 곡에선 ‘너’의 마음을 궁금해하기도 하지만 “Do you wanna dance?”라고 묻고 곧 “대답은 하나뿐/Say yes”로 답을 정해버리는 가사는, 여전히 초점이 ‘나’에게 맞춰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아일릿의 서사는 모두 ‘나’를 중심에 두기에, 변덕스럽고 즉흥적인 면모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하이라이트 키워드(‘슈퍼 이끌림’, ‘꿍실냐옹’)가 가사 곳곳에 배치돼 있고, 후렴구 안무는 손동작을 살려 만들었다. 이 안무는 틱톡을 비롯한 SNS에서 밈을 활용해 자신을 표현하는 지금의 10대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시선은 실제 10대 프로듀서들이 곡 작업에 참여하면서 한층 더 리얼하게 완성됐다.
무대 위 아일릿의 의상도 소녀의 다면성을 비주얼로 구현한다. 데뷔 쇼케이스에서는 파자마를 연상시키는 룩으로 잠들기 전 가장 솔직한 순간을 표현했고, 또 다른 무대에서는 공주풍 레이스 드레스로 상반된 이미지를 선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의상은 하나의 결로 이어진다. ‘아일릿 코어’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이다. ‘Midnight fiction’ 속 잠들기 전 자유롭게 상상하는 소녀와 ‘bomb’의 브랜드 필름 속 마법소녀는 같은 인물이다. 아일릿은 서로 다른 색을 한 팔레트에 담듯, 이 여러 결을 스토리텔링과 무대 위에서 선명하고 생생하게 펼쳐 보인다.
아일릿이 그려내는 10대 소녀상은 새롭기만 한 건 아니다. 이미 많은 걸그룹이 지나온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숙한 팔레트 위에 ‘나’의 솔직하고 엉뚱한 서사, 그리고 다양한 결을 담은 비주얼을 겹겹이 쌓아 올리자 새로운 빛깔이 생겨났다. 그 색이 바로 아일릿이 그려내는 10대 소녀의 서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