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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Nov 29. 2018

십자가를 짊어진 이는 누구입니까

영화 <영주>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여성서사에 대한 기대와 수요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그동안 특정 주류가 득세하고 있던 서사의 전형, 그에 앞선 '여성'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의 대상화 없이 한 세계를 오롯하게 구성하고 있는 여성의 목소리와 얼굴을 함축한다. 장르의 정의와 존재의 이유, 가치가 딛고 선 결이 아무리 다양한들 이에 대해선 모두 동일한 목마름을 갖고 있을 것이다. 영주라는 이름, 그리고 포스터 속 단독자로서 서사를 품고 있는 배우 김향기의 얼굴. 차성덕 감독의 첫번째 장편영화 <영주>는 개봉 전부터 이러한 현시류에 응답하는 모습으로 눈길을 끈 작품 중 하나다. 





졸음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영주(김향기). 가장이 된 영주는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 영인(탕준상)의 누나로서 집의 안팎 살림살이를 도맡는다. 그러던 어느 날 영인이 사고를 치고 합의금을 준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어린 영주를 둘러싼 세계는 냉혹하다. 금전적인 사기까지 당한 와중에 도움을 청하러 찾아간 고모는 애정이 식은 눈빛으로 영주를 보며 그간 남매를 도맡고 겪은 고초에 대해 설명한다. 말을 마친 고모가 영주에게 말한다. "할 말 있어? 난 다 했는데." 



누구에게도 들릴 필요가 없어진 영주의 대답은 무력해지고,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 없는 그 이후부터 영주는 입을 닫는다. 필요에 의한 단어만 쓰며 자신이 책임져야 할 역할에 대한 말만 꺼낸다. 소년원에 갈 위기에 처한 동생을 면회하면서 영주는 누나만 믿으라는 위로, 따뜻한 미소만을 짓는다. 영주의 이름이 지워진 자리에 기능과 필요만이 남았고, 부모의 부재 이후 무력해진 자신의 이름만큼이나 누나라는 역할로서 그 공백을 채우려 애쓰는 모습이다. 이때 영화 속 인물 그 누구보다 묵직해진 영주의 얼굴은 종종 밤새 혼자 집안에서 고민하는 그림자로 가득 메워진다. 그 얼굴이 담고있는 무게감은 누나로서 해줄 수 있는 말들 속에 갇힌 영주의 진심에서 나온다.





집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닥치자 영주는 불현듯 부모의 죽음과 관련한 피의자 가정의 주소를 알아내고 찾아아간다. 시장에서 가게를 하는 상문(유재명)과 향숙(김호정) 밑에서 일을 배우며 급한 돈을 훔치려는 시도까지 해보지만 그날 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상문의 목숨을 구하게 되고 향숙은 도둑질을 덮어주며 오히려 감사의 표시로 선뜻 돈봉투를 건넨다. 몇 년 전 집안에 있었던 사고와 식물인간인 아들, 자신의 치부를 먼저 드러내며 영주가 참 좋은 아이라 한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영주는 당황한다. 단지 캐릭터의 선함이라 단정짓고 넘어가기에, 어색하고 공허하던 영주의 미소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사연없는 집이 없고,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다는 말로 쉽게 환원될 수 없는 향숙의 사랑이 영주의 고군분투기 그 이상으로 쏟아져내린다. 늘 입고 있던 죽은 엄마의 가디건을 벗고, 향숙이 새 옷을 사주겠노라 데려간 옷집에서도 새 자켓을 입고 선 영주는 예쁘다는 단순한 감탄사 하나 쉽게 내뱉지 못한다. 그러나 일련의 일들이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한 상문과 조금씩 말을 섞고 엇나가는 동생에게 속내를 보이며 화를 낼 수 있는 힘에 보태는 것은 분명하다. 비로소 영주가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며 언어를 드러내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무력해지며 무너진 한 세계가 다시 복원되는 것처럼 보이며 비로소 제 힘을 갖기 시작한다. 





바로 그 때, 자신이 누구의 주머니에서 나온 합의금으로 풀려났는지 알아버린 영인이 어떻게 부모를 죽인 이와 손을 잡을 수 있냐며 누나를 몰아세운다. 부모와도 같던 사람들에게 이제까지의 일을 고백하기 위해 동이 트기도 이른 새벽, 영주는 향숙과 상문의 집으로 달려간다. 이제까지 고장나있던 영주의 언어를 완성시키고 완치하기 위해, 동생 영인에게 네가 틀렸고 내가 옳았다는 한 마디를 단정짓기 위해 영주의 영화는 끝을 향해 달려간다. 이윽고 고해성사의 현장이 열린다.



[영인아 니가 틀렸어.] 결국 영주는 영인에게 문자를 보내지 못한다. 고백 후 외로움을 느낀 영주가 들어간 상문과 향숙의 아들의 방에 작은 스탠드 불빛이 켜지고, 향숙이 기도를 올린다. 이 모든 십자가를 지겠노라 울먹이는 목소리 뒤로 스탠드 불빛도, 기도도 닿지 않는 침대 그늘에 누워있는 영주를 카메라가 롱테이크로 잡는다. 더 이상 저 아이를 볼 낯이 없다는 그들의 대화가 당혹스러워하는 영주의 얼굴 클로즈업샷과 대치되고, 영화 초반 거실에서 홀로 고민하던 얼굴의 그림자가 다시 주인공에게 드리운다. 영주가 지키고 싶었던 한 세계가 또 다시 무너지는 일은 정말이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이제껏 죄인도 아닌 영주가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난을 겪고, 상문과 향숙, 그리고 영주가 서로의 죄를 얘기하며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는 새벽을 함께 나는 일은 결국 염치와 부끄러움이 섞인 부부와 영주가 함께 할 수 없는 모순을 전제한다. 





그렇기에, 이후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한강 다리 위에서 영주의 얼굴을 바싹 따라잡는 클로즈업이 불편한 것이다. 자살을 시도하려하지만 끝내 포기하고 다시 땅을 딛은 영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한다. 자신의 고통과 치유 사이, 그 경계에 끼어있던 영주에게 덤덤한 거리를 유지해오던 카메라는 그녀가 헐떡거리자마자 달려가 일그러진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숨통을 트여줄 틈 없는 그 샷은 영화 내내 사용되던 방법론과 모순되고 튀는 지점으로 발생한다. 단독자의 얼굴로서,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영주의 얼굴이 영화 그 자체라는 의도가 분명한만큼 -십자가를 위한 기도 이후 집을 나온 영주의 맥락 하에- 카메라가, 시선을 경유하고 있는 관객이 얼굴에 다가간 거리만큼이나 그녀의 공간을 침범하고, 밖으로 내몰고 있단 인상 또한 명징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카메라는, 영주가 재현의 맥락에서 쉽게 무너지는 서사이자 인물이 아님을 증명한다. 오열하는 얼굴을 분명하게 담아냈던 카메라는 그녀의 등 뒤로 빠지며 그간 걸어온 길 위에서 나약했던 뒷모습이 다시 일어서는 장면을 목격한다. 울음에 거칠어진 호흡도 잦아들기 시작한다. 무너지고 일그러진 얼굴을 포착할 수 있는 카메라는 죽지 않고 살아돌아가는 뒷모습 역시 담아낼 수 있다. 고통을 재현하는 카메라가 가진 양날의 검 위로 다시 삶의 세계로 한 발짝 걸어나가는 영주의 발자국이 또렷해지는 순간이다. 이름을 잃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영화 <영주>가 마침내 유효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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