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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Nov 25. 2018

생명력이라기 보다, 생존력

영화 <밤치기>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인 '가영'(정가영)은 다음에 찍을 영화의 취재를 위해 남자 '진혁'(박종환)과 만난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위해 자리한 그들은 그 날로 두번째 만남이며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로 그려진다. 그리고 오뎅탕을 올려놓은 부르스타의 불이 켜지기 무섭게 가영은 성(性)에 대한 노골적인 질문을 쏟는다. 자위 혹은 야동, 이성에게 차인 기억 등 질문하는 족족 안면이 없다시피한 이와 맨정신에 얘기하기 힘든 주제들이다. 치고 들어오는 대사에 벙쪄있는 진혁의 표정처럼 관객들은 당황하거나 -정가영 감독의 전작에 대한 본 이들에 한해서- 이 여성이 또 어떤 관계론을 써내려갈지 궁금해하거나, 영화는 초반 10분동안 순식간에 몰입으로 자리한다. 



‘인터뷰’라는 분명한 명분 하에 만난 ‘질문하는 자’ 가영은 진혁에게 영화와 연애, 혹은 남자 진혁에 대한 대화를 풀어간다. 이런 질문들이 왜 필요한지 궁금해하는 진혁에게 "영화는 비밀이며 관객은 탐정"라는 수수께끼같은 실타래를 던져 자신이 짜놓은 판에 들어서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이에 진혁은 술김에 엉덩이를 들썩이면서도 역으로 가영에게 질문을 건네기도 하고, 가영과 공평하게 같이 취하자 종용하기도 하며 그 미로 속에서 쉽사리 길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쓴다. 서로의 역할을 엎치락 뒤치락 하던 끝에 가영이 묻는다. “오빠랑 자는 건 불가능하겠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라는 격언이 무색해지는 영화였다. 가영은, 혹은 가영의 영화는 문이라면 다 두드리고 보는 무대뽀 정신도 아니고 ‘살다 보면 열고 싶은 문이 아닌 열 수 있는 문만을 열게 된다’는 삶의 잠식에도 굴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영의 수작질이 좋다. 초범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 좋다. 감독 정가영이 배우 정가영으로 출연하며 상대 남자와 자기 위해 들이닥친다는 설정의 동일함 때문에, <밤치기>는 전작 <비치 온 더 비치>와의 비교 혹은 언급을 피해가기는 힘든 영화이기도 하다.



인터뷰 중간중간 진혁이 반대로 인터뷰어가 되어 자신이 받은 낯뜨거운 질문들을 받아치는 장면에서, 가영이 농담과 진담을 오가며 상대와 노는 것에 집중하며 짓는 표정은 전 남자친구에게 퍼붓는 대시가 주를 이뤘던 전작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교묘한 남녀의 역할놀이, 그에 가중되는 긴장상태 등 '인터뷰어' 가영에겐 ‘비치’ 가영을 능가하는 또 다른 재치가 존재한다. 자고 싶다는 돌직구에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은 상대 진혁을 문득문득 노려보는, 기회를 엿보는 그 표정들. 농담으로도 숨겨지지 않는 어떤 진심들은 무작정 내질러지기보다 전작보다 많아진 수의 컷배치를 통해 전작보다 강약 조절되기도 한다.



'인터뷰어'라는 안전한 자리에서 벗어난 가영이 진혁에게 인터뷰 당하는 '유령'이라는 역할을 기꺼이 맡아주는 장면 역시 흥미롭다. 전적으로 진혁의 시점에서 짜여진 판일 수도 있는 그 인터뷰에서 "좋은 영화로 다시 태어나라"라는 첨언에 "그럴 수는 없어요. 좋은 영화는 좋은 사람이 만드는 거니까."라는 영화에 대한 진심으로 응수하기도 하는 그 능숙함은 그녀의 팬들에게 성에 대한 영화의 성장을 말할 수 있는 기쁨을 기어이 누리게 한다.   





진혁과의 밤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영의 팔짱엔 한 남자가 더 끼어있는 것 같다. 가영의 구애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진혁은 동네 아는 형 '영찬'(형슬우)을 부른다. 그가 동석하고 가영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영화는 2막을 연다. 지금까지 그녀의 전작에서 별로 보이지 않았던 서브 캐릭터의 등장이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에, 인터뷰라는 목적으로 달성한 대화 외에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내뱉는 직설. 상대를 알아가는 순간에 집중하고 그에 촉을 세우는 영화가 <밤치기>다. 어찌 보면 벼랑 끝 전술로도 보이는 자리에 자고 싶은 남자와 잘 수 있는 남자라는 두 선택지는 과연 분에 넘치는가. 



구애를 거절하는 진혁 앞에서 밀고 당김을 포기하지 않았던 가영은 좋아하는 여자를 앞에 둔 영찬이 부리는 진상을 앞에 두고 사뭇 다른 표정을 짓는다. 결국 그와 헤어지고 다시 진혁에게 연락해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가영과 진혁이 나눈 대화의 일부가 보이스 오버된다. 영화를 만드는 남자에 대한 가영의 영화는 진혁의 흥미를 끌지만, 결국 가영이 그에 대한 구상을 포기했기 때문에 영화 속 그가 만들던 영화도 엎어지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결국 재회하는 둘의 뒷모습과 함께 매치된다. 자신의 구차함이나 찌질함에 대한 후회도 미련도 없는 가영의 뒷모습과 결국 제 발로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진혁의 뒷모습. 판 안에서 활기와 생기를 내비치는 생명력에 그치지 않고 관계의 판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가영의 자세는 생존력에 가깝다. 어떤 결말을 보던 간에 우리의 주인공의 발걸음이 씩씩할 수 있는 이유다. 그 다음 이어지는 결말 시퀀스, 가영이 영화 내내 입었던 옷을 걸치고 아침 현관문을 나서는 모습이 진혁과 만난 그 날 아침인지, 헤어진 다음날 아침인지에 대한 질문에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것 또한 그 이유에서다. 밤에 어떤 자리를 가졌든 같은 옷을 입고 다른 먹잇감을 찾으러가는 가영에게 치는 박수는 영화 <밤치기>같은 감독의 구애가 부디 끊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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