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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Nov 23. 2018

삶과 죽음을 뒤집은 구원의 길

영화 <팬텀 스레드>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 영국, 왕실과 사교계 여성들의 드레스를 만드는 디자이너 ‘레이놀즈 우드콕’(다니엘 데이 루이스). 유명세를 떨치던 중 휴식 차 내려간 시골에서 레이놀즈는 우연히 ‘알마’(빅키 크리엡스)라는 여성과 마주치고 이들은 곧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우드콕의 의상실에서 알마는 그의 충실한 뮤즈로서 영감을 주는 패션모델이 되지만 레이놀즈와 그의 누나 ‘시릴’(레슬리 맨빌)이 견고하게 구축한 집안의 질서에 숨이 막히고, 이들과 자꾸 부딪힌다. 그럼에도 레이놀즈와 그의 옷을 사랑하는 알마는 자신의 방식이 통하지 않자 독버섯을 찾아 연인에게 먹이는 지경에 이른다.





<팬텀 스레드>를 논할 때, 단순히 소재 차원에서 1950년대 영국 패션과 사교계를 아름답게 구현해놨다는 평에 머무르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영화 속에서 패션은 단순히 완성된 드레스 한 벌이 아닌, 이를 만드는 과정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치수를 재고, 천을 재단하고, 실과 바늘로 꿰매는 일련의 과정들을 안정적인 분할의 미장센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이 시퀀스들은 잡음없이 작업을 이어나가는 의상실 직원들과 이를 관리, 감독하는 누나 셰릴의 질서에 맞추어 정렬된다. 같은 맥락에서, 두 세 개의 씬으로 이루어진 단락이 끝날 때마다 디졸브 편집을 통해 이야기의 레이어를 쌓아가는 방식은 천 위에 레이스나 장식을 덧대는 디자인 과정과 흡사해보이기도 한다. 이 예민한 작업을 위해 우드콕 의상실의 명성만큼이나 촘촘하게 쌓아온 집안의 위계는 연출 방식 그 자체로 구현된다. 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이가 바로 알마다.





그들이 처음 만난 부터, 레이놀즈의 작업실에서 치수를 재며 디자이너가 좋아하는 숫자로서의 몸으로 거듭나는 알마. 그 둘을 얼핏 보면 나이가 많고 적음, 경력과 연륜의 격차, 남성과 여성  클리셰를 통해 기존의 '아티스트와 뮤즈'의 전형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단 둘이 치수를 재고 있는 방에 태연하게 들어서는 그의 누나를 보며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앞뒤가 맞지 않은 레이놀즈의 주문을 두고 자신의 해석을 고집하기도 하는 등 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표준 발음을 쓰는 런던에 온 이후 알마의 사투리 억양은 중요한 순간마다 고개를 들며 돈과 격식이 오고가는 사람들의 대화에 대한 환멸을 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놀즈를 사랑하는 그녀는 그의 옷을 가장 충실하게 돌보는 역할을 해낸다. 옷을 입을 자격이 없다 생각되는 고객의 방으로 침입해 레이놀즈와 함께 드레스를 구해낼 때엔 디자이너 당사자보다 더 분노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로를 사랑함에도, 알마는 그의 작업을 위해 레이놀즈가 고유하게 쌓아온 질서를 깨지않는 선에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들 사이에 항상 끼어있는 제 3의 무언가(들) - 동생의 곁을 떠나지 않는 누나 시릴과 의상실 직원들, 혹은 고객들과 관련된 일들-를 제치고 알마는 그의 연인에게 첫번째 순위가 되기를 갈구한다. 그리고 마침내 행동한다.





안정적인 분할의 미장센이 집안의 생리를 구가해놓았다면 인물들은 집안의 기둥격인 계단 위에 서서 수직적으로 유영하는 카메라 시선에 의해 가시적인 관계도로 구현된다. 어느 날 알마는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나가게 하고 홀로 레이놀즈를 위한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이 영화의 분기점을 꼽으라면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알마가 레이놀즈를 내려다보는 장면이겠다. 알마의 돌발행동에 의해 처음으로 질서의 부재를 느낀 레이놀즈는 이를 탐탁치 않아하고 그녀는 그간 참아온 분통을 터트리고 만다.



레이놀즈가 그동안 구축해놓은 위계 이면엔 오랜 부재감이 존재한다. 16살에 재혼하며 그의 곁을 떠난 어머니를 두고 영화 내내 그의 죽음과 유령에 대해 언급하는 레이놀즈 주변은 온통 여성이다. 드레스를 입는 주고객과 더불어 전직원 모두 여성인 의상실 혹은 그의 곁을 그림자 같이 따라다니는 사업 파트너 시릴은 그 부재감을 채워주고 있는 하나의 성벽처럼 보인다. 다시 뮤즈와 아티스트의 전형의 이야기로 돌아가, 어머니의 환영에 벗어나지 못한 이 아티스트를 뮤즈인 알마가 구원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은 그 전형의 틀에 결코 합일되지 않는 알마의 몸짓과 표정, 그리고 억양에 부딪히며 영화 내내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 관전 포인트로 자리한다.






결국 알마가 치사량 보다 덜 우린 독버섯차를 마시고 레이놀즈는 앓아눕게 된다. 사경을 헤매던 그가 어머니의 환상을 보는 그 방으로 알마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은 내내 따라다닌 질문에 대한 이 영화의 답일 것이다. 아들과 어머니가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저세계'에서 유약해진 레이놀즈를 간호하려 돌아다니는 알마는 환상장면 내내 픽스됐던 카메라를 기어이 움직이게 하는 생명력을 갖고 있다. 어떤 대체나 양보 없이, 알마가 어머니의 환상과 공존하며 서있을 때 레이놀즈와 관객들 모두 깨닫게 된다. 산 사람은 산 사람이며 알마는 결코 그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어느덧 유령이 사라지고 소임을 다한 알마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방을 나선다. 결코 죽음과 같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어진 레이놀즈는 그 다음날 아침 그녀에게 청혼한다. 이전에 독버섯을 먹고 정신이 혼미해진 그가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은 자의든 타의든 문을 잠그고 고립되었던 2층의 작업실, 의상실에서 벗어나 알마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전조로도 보여진다.





계단에서 내려온 레이놀즈는 전보다 더 넓은 공간으로 들어서지만 산 자의 세계는 산 자의 세계대로 성치 않다. 안정적인 3분할 프레임이 깨지고, 레이놀즈와 알마가 전에 같이 있어본 일이 없는 장소가 그 균열을 비집고 들어선다. 레이놀즈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과 같은 결혼생활이 이어지자 그가 다시 누나에게 돌아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면서도 "이 집에는 죽음의 기운이 있어"라며 부리는 히스테리는 결혼으로써 이미 뒤집혀버린, 기존의 죽음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자책으로까지 들린다. 직후 알마가 다시 한 번 독버섯을 따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이어지는 것은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영화관에서 일정 폭소가 나온 장면이기도 한데- 알마가 레이놀즈를 굴복시키는 방식에 대해 이미 학습한 관객들이 영화의 진짜 절정은 첫번째 시도가 아닌 두번째 시도에 있음을 알게 한다. 결국 레이놀즈는 한 번 더 독버섯으로 만든 요리를 먹고 이를 지켜보는 알마가 드디어 음식의 정체와 그들 사이에 존재해온 게임에 대해, 서로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위해 레이놀즈가 얼마나 약해져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알마의 공간 안에서, 이는 고백이라기 보다 선고에 가깝다. 요리를 삼킨 레이놀즈가 죽음의 세계를 탈출하는 순간 그녀에게 키스하고 그들의 해피엔딩이 절정에 다다르는 것은 결코 모순의 논리가 아닌 것이다.





알마의 독버섯과 마침내 죽을 지경까지 가는 연인에게 그녀가 던지는 솔직한 미소는 기존의 관객 머릿속에 자리한 뮤즈 서사에 반한 반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를 열면서부터 알마가 사랑에 충만한 얼굴로 이제까지 그들의 서사를 말해주는 상대방이 레이놀즈를 진찰하러온 의사였다는 사실은 그 시작부터 우리도 그녀와 공범이었음을 알게 하며 주체가 된 그녀의 입을 빌려 진행되는 미래에 대한 상상은 사실 그녀의 액자 속 구성 중 하나였던 레이놀즈에 대한 확인 사살이다. 그녀의 연인이 정말 죽었든 죽지 않았든 최후의 승자는 웃었고 집에는 생기가 돌 것이다. 명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은퇴작에서의 빅키 크리앱스라는 의외의 얼굴을 보고, 서사를 비트는 쾌감을 느낀 이후에 영화 안팎으로 뒤집힌 삶과 죽음은 이제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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