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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Nov 19. 2018

같은 공간, 서로 다른 은유

영화 <집의 시간들>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도심에서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라는 말은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존재들 중 하나다. 그러나 여기에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에 위치한 주공아파트’라는 이름을 붙여 각기 다른 살림살이를 하나 하나 들여다본다면 그 이야기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을 터. 사라질 집에 대해 기록하는 텀블벅 프로젝트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의 이인규, 주택 안팎을 영상으로 담는 '가정방문'의 라야가 합작한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은 둔촌주공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여덞가구의 집에 대한 인터뷰를 담고 있다. 










  러닝타임 78분동안 인터뷰를 하는 거주민들의 얼굴은 일절 등장하지 않으며 그리 역동적이지 않은 카메라가 그들의 집구석 구석을 면밀하게 담아낸 모습이 대신하여 출연한다. 어지러져있거나 정돈되어있거나,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들은 인터뷰이의 말을 따라 집에서 살아온 시간, 얽혀있는 에피소드, 동선과 생활양식들을 제시해준다. 또한 인터뷰는 어느 거실에서부터 시작해 창, 베란다, 문이라는 경계를 넘나들고 복도, 계단, 엘리베이터를 훑으며 찻길과 인도, 주차장, 놀이터, 공원 등 단지 내 바깥으로까지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살고 있는 생활반경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 공간에 투자한 시간과 관심에 비례하는 일이므로, 여덟가구의 거주자들은 그만큼 다양한 에피소드와 각기 다른 애정의 농도를 비추어주는데 이러한 증언들은 같은 공간에 대한 서로 다른 은유를 보여줄 수 있는 영화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재건축 소식은, 거주민들이 그것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든 아니든 간에 ‘지금 현재 머무르고 있으나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이중적인 정체성에서부터 영화를 출발하게 한다. 이제까지 집에서 살아온 시간과 앞으로 이 집을 떠나있어야 하는 시간을 같은 선상에서 사유하는 경계에 선 영화는 그들의 어느 기억 하나도 하나의 단일한 추억거리로 봉합시키려들지 않는다. 어떤 이는 나무가 좋았다고 하지만 그의 아들은 나무 가까이에 드글거리는 벌레들이 싫었다고 한다. 어릴 적 자신이 놀던 아파트 복도에서 그 또래의 자녀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때 기분이 묘했다는 이는 아이의 두 돌 전까지만 해도 집에서 종종 흘러나왔던 녹물에 엄청난 곤혹을 겪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이웃이었던 이들이 갓 이사온 어떤 이에겐 좀처럼 끼기 힘든 무리로 다가오기도 한다. 아파트에 대한 증언들은 왕왕 엇갈려버리고 서로 맞대고 있는 벽 하나, 천장 하나가 얼마나 멀고도 가까운 일인지에 대해 별 꾸밈없이 전달한다. 이는 동시에, 거주민들에게는 익숙하나 관객들에게 낯선 공간일 수 있는 이 아파트에 대한 형상화를 단 한 장면으로 귀결시키지 않으려는 어떤 움직임으로도 읽힌다.














  "저 (현관)문을 몇 번이나 드나들었을까. (...) 내가 도대체 여기를 얼마나 많이 오르락내리락했을까" 


  자신과의 경계가 무화되다시피한 집이라는 공간을 다시금 사유할 때, 함께한 시간의 물리적인 양을 헤아리는 순간 섬찟해진다. 이와 함께 카메라는 불투명한 현관문 유리 바깥으로 슥 지나가는 누군가의 그림자를 담아내며 공간 속에 깃든 유령같은 시간을 가시화한다. 이러한 형상화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살아온 세월이기도 한 집을 은유하는 영화의 방식이며, 여덟 개의 집 안 모습을 하루동안 변화하는 햇빛 아래 시시각각 포착한 <집의 시간들> 전체에 걸친 방법론이기도 하다. '재건축'이라는 하나의 발단을 기존의 경제 논리에 기댄 개발과 보존의 영역에 머물러 논하는 것이 아닌, 개인의 역사 안에 자리한 현재진행형의 터 혹은 터전으로 형상화한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의 개봉이 반가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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