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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Aug 11. 2019

이 재난영화의 결단력

영화 <엑시트>

***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유해가스가 터졌다. 촉 후 수 분 내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이 가스는 거침없이 도시 구석구석에 퍼져간다. 땅 위에 들어선 수백 개의 건물만큼이나 곳곳에 벌어져있는 골목과 틈새 사이로 무고한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고, 그야말로 도심은 아수라장이 된다. 그리고 그날 밤 환갑잔치로 바깥에 나와있던 용남(조정석)과 그의 가족들은 아직 가스가 들어차지 않은 건물 위층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더 위로, 옥상으로 올라간다.



영화 <엑시트>를 가리키며 가장 많이 화두가 되었던 단어는 단연 '의외'였을 것이다. 영화는 소리 지르고 울부짖던 예고편과 포스터를 보며 '여름 영화'라 불리던 기존의 한국 블록버스터의 뒤를 잇지 않겠느냐는 예상을 쉽게 제쳐버린다. 이 영화가 그리는 깔끔한 쾌감은 한국의 상업 영화가 그리고 있던 신파라는 안전한 선택, 그로 인한 피로감을 빗겨나간다. 영화의 서사, 영웅 시민으로 도약하는 캐릭터에 충실히 복무하는 환경으로서의 재난이 아니라 재난의 실체란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 고군분투하는 생존의 시점으로 화답하는 이가 바로 영화 <엑시트>다. 



옥상문이 잠겨버렸으니 결국 창문을 깨고 벽을 타기 시작하는 용남을 향해 사람들은 미쳤다고 소리를 지른다. 옥상문을 열고나선 살려달라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그 비명들은 고통에 차 울부짖는 몸부림이라기보다 살고 싶고 살기 위해 욕과 성을 다하는 사기충천에 가깝다. 이 의욕이 묘한 쾌감과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영화도 이 방향성을 모르지는 않는 것 같다. 용남의 대학 동아리 후배이자 웨딩홀의 부점장 의주(임윤아)가 알려준 구호를 '따따 따따따' 리듬에 맞춰 울고 있는 사람들은 영화에서 엄연한 유머 코드로 작동한다. 손에 붙잡힐 듯 잡히지 않는 헬기와 점점 옥상 쪽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연기로 인한 위기감이 여전히 유효할지라도, 용남의 가족들이 외치는 구원이 코미디의 한 부분으로서 자생하고 있다니.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이들은 주인공인 용남, 혹은 의주가 억지로 이끌어가거나 구조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 용남 대가족의 옥상 장면은 <엑시트>가 그리고자 하는 목적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그리고 있는 시퀀스일지도 모른다. 



구조받길 원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을 기꺼이 구조하고자 하는 영화 속 시스템은 그 누구도 비참한 피해자로 동원하려 하지 않는다. 기존의 재난영화가 그대로 답습해오던,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특히나 여성 성별의) 비명소리가 <엑시트>에는 없다는 사실도 바로 같은 맥락의 연출에서 의도한 지점이 아닐까. 2014년 4월, 온 국민을 참담하게 만들었던 세월호 사건을 은유한 학원 장면은 어떠한가. 그 건물 역시 옥상문이 잠겨있고, 기둥을 타고 올라가려던 학생 하나가 아래로 추락할 뻔한 와중에 용남과 의주를 발견하고 구조하고자 헬기가 내려온다. 이미 한차례 용남의 가족들에게 구조를 양보했던 둘은 다시 한번 고민한다. 구조를 위해 사람처럼 세워놓은 마네킹들을 눕혀다 '인간 화살표'를 만드는 순간, 용남과 의주의 표정은 가족들에게 양보했을 때 지었던 울보 표정과 마찬가지의 웃음을 유발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 순간만의 울컥거림을 자아낸다. 실제 있었던 사건, 그리고 앞으로 실재할지도 모르는 재난 앞에서 약자를 향해있는 구조의 표시는,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자 의지이다. 용남과 의주 역시 죽음이 무섭고 두렵다. 그럼에도 더 나은 선택을 하고자 하는 그들의 액션은 불신과 환멸의 답으로 바닥을 치기보다 그들의 암벽처럼 위를 바라보고 앞을 향하고자 한다.



영화 중반부에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이 유해가스는 수용성으로 100퍼센트 물로 인해 씻겨 내려갈 수 있는 '쉬운' 장애물이다. 그러니까 비가 오거나 그에 버금가는 소방 지원이 있다면 이 사태는, 용남과 의주의 앞길을 막아선 생존의 위협은 어느 정도 해결이 날 것이다. 그러나 비가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고 대한민국에는 그에 마땅한 소방인력이 부족한 상태이다. 종결은 지연되고, 용남과 의주는 올라오는 연기를 피해 높이, 더 높이 피신한다. 이때 그들이 발하는 능력은 바로 클라이밍 동아리에서 갈고닦았던 암벽 실력이다. 직장생활에 치이고 까였던 구름 웨딩홀 부점장 의주와 직장생활에도 진입을 하지 못했던 백수 용남이 도심을 그저 몸 하나로만 누비고 있을 때 재난이라는 조건 안에서나마 옭아매었던 삶을 잠깐이나 벗어던지는 순간을 관객들도 느낀다. 이 쾌감을 배가시켜주는 것은 바로 주인공들의 시점 쇼트들. 뛰어내리기 전, 혹은 뛰어오르기 전의 시점을 통해 인물의 감정에 몰입시켜주는 전형적 역할의 이 연출들은 의주와 용남이 가지고 있는 전사에 부합하여 조금 다른 의미들을 자아낸다. 



이 1인칭의 시점에는 용남과 의주의 것 외에도, 유튜버 혹은 언론 미디어로 실시간 중계되는 드론이 추가된다. 맨몸으로 달린다는 주인공들의 상황을 여타의 다른 인물들의 리액션도 함께 동원시키기 위한 이 장치는 그들의 리액션으로 하여금 또 두 인물의 탈출에 실질적인 도움을 가하기도 한다. 영화에 감정적으로 몰입시킬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동원과 서사로의 직접적인 개입을 유도하고자 하는 이 드론, 혹은 드론들의 향연은 윙윙거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가장 확실하게 부각한다. 재난의 시작이기도 했던 독가스를 유발한 과학이 영화의 전면에 부각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재난의 끝을 완성 짓는 역할이기도 한 이 드론의 기술은 유튜브의 생중계 화면과 결합하며 영화가 가리키고자 하는 또 다른 '시스템'의 가능성을 바라보게 한다. 아직 그 새로운 신기술이 어디로 나아갈지는 모르겠으나, 어디로 향하게는 할 수 있다는 영화의 메시지는 역시 재난을 바라보는 재난영화의 태도와 결을 함께 한다. 



SNS의 <엑시트>의 후기들을 죽 읽다 보면 현직 소방관이나, 복지, 안전시설과 관련된 업무의 종사자나 학문의 전공자가 올린 글들이 눈에 띈다. 영화 속에서 구조를 지연시켰던 것은 다름 아닌 실제 한국의 부족한 소방헬기의 문제를 다룬 것이며, 지하철의 시각장애인 보도블록이 재난 상황에서 비장애인들에게도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등등. 영화를 향해 유독 재난 현장에 복무하고 있는 이들의 증언이 줄을 잇고 있는 흐름은 영화가 가진 고민과 태도에 비롯한 결과물 중 하나다. 영화가 주는 그 온전한 쾌감은 누구도 재난 안에서 대상화시키지 않겠다는 영화의 의지에서 비롯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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