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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본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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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Nov 25. 2019

고독을 풀어내는 영화언어

영화 <아비정전>

*** 본 리뷰는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비정전>의 첫 장면은 오후 3시 매표소로 걸어들어가는 아비(장국영)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비는 매표소 직원 수리진(장만옥)에게 아는 척을 하며 이내 친구가 되자 제안한다. 이 낯선 남자가 수리진의 이름을 어찌 알게 되었는지, 혹은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우리가 보는 영화의 첫 장면은 아무것도 설명하려 들지 않고 우리 앞에선 이 남자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다. 그러다 아비와 수리진이 한 프레임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맞대는 순간 아비는 그 어떤 스킨쉽 장면보다 강렬한 대사를 친다. 그리고 그 두 남녀가 함께한 1분은 영화가 개봉한 이후로도 20년 동안 사람들 입에서 지겹도록 오르내린다. 초침소리 가득한 프레임 안에서 오후 3시 1분 전을 가리키는 시계가 등장하고, 이후 클로즈업된 아비의 얼굴이 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가리켜 선언하며 고백한 순간. 배우 장국영의 얼굴이 화면 가득 담기며 관객 모두가 숨죽일 수밖에 없는 이 세기의 장면에서 나는 언뜻 알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낀 것 같았다. 선언한들, 과거의 선언을 기억한다 한들 다시 나란히 설 수 없었던 두 연인의 결말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화려한 시기에 눈감아 지금까지도 모두의 애도를 받고 있는 어느 배우의 죽음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당신 덕분에 나는 항상 이 시간을 기억하겠군요. 이제부터 우린 친구예요.' 장국영의 대사 장면에서 영화는 마냥 숨죽이고 있지 않다. 하염없이 울리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그의 목소리 뒷배경으로 깔린다. 그리고 이후 등장하는 수리진의 회고적인 시선과 내레이션 중에도 초침 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아비가 가리킨 그 1분의 시간도 과거였고, 그 이후 그를 잊지 못했다며 영화 속 스스로를 지칭하는 수리진의 목소리도 결국 과거를 지나온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렇게 뒤돌아보는 영화 <아비정전>은 그 어떤 강렬한 단어로 순간을 고백하고 붙잡으려한들 붙잡히지 않는 시간 속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인물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일까. 수리진과 헤어진 이후 양어머니와의 대화 장면을 제외한 아비의 얼굴을 정면으로 잡는 장면은 좀처럼 영화 속에서 보기 힘들다. 



그리고 앞선 장면 회고하는 수리진의 목소리처럼 회고하는 아비의 목소리 역시 등장한다. 첫번째 목소리가 떠나는 이를 바라보는 남겨진 이를 화면 중앙에 두고 들려왔다면 두번째 목소리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에서 들려온다. 생모가 자신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자 아비 역시 생모에게 등을 돌리는 장면인데, 그동안 거울에 비친 혹은 위에서 내려나보는 시선으로 아비의 얼굴을 '빗겨'볼 수 밖에 없는 관객들이 아비의 정면을 가장 확실하게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카메라와 함께 걷던 아비의 등에 일순 슬로우모션을 걸면서 배경음악이 깔리고, 아비는 느리게 카메라의 보폭을 제쳐 앞서 걸어나간다. 시간을 잡는 일은 어쩌면 시간 앞에서 인간사가 느낄 수 밖에 없는 무력감과 허무함을 그리는 일이고, 그렇기에 스스로 '땅에 닿지 않는 새'라 칭하던 아비가 카메라로부터 멀어질지언정 걸음을 멈추지 않는 이 장면에서 끊이지 않는 초점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하다. 허무함은 결국 죽지 않은 삶이기에, 살아숨쉬기에 가능한 것. 아직 우리들 머릿속에 잊혀지지 않은 영화 <아비정전>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시간을 붙잡을 수 없는 인물들이 그러했듯 영화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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