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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Jan 16. 2019

끝까지 미치지는 못한 상상력

영화 <리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82년 메사추체츠의 대부호와 그의 아내가 도끼로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용의자로 딸 리지 보든(클로에 세비니)이 지목됐고 그녀의 완강한 부정과 유서깊은 가문의 자제가 그럴 리 없다는 판단에 따라 무죄판결을 받는다. 영화 <리지>는 실화를 바탕으로, 실제 범인이 리지 보든이었다는 가상의 전제 아래 그녀뿐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사회에 대한 일정 부분의 고발을 품고 있다. 아버지와 새엄마는 병약한 그녀를 몰아세우기 일쑤고 그녀의 후견인이 될 가능성이 큰 삼촌은 여성인 그녀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폭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리지가 '집에서 억압받던 딸'에서 '감옥에 들어간 죄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에 삽입된 '범행을 저지르는 광인'의 이미지는 영화가 새롭게 추가한 맥락에 따라 '심판자'로까지 비춰진다. 또한 이 상상력은 페미니즘 영화라 불릴 수 있는 여지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 





리지에 대한 억압이 이뤄지는 집이라는 공간은 존재 자체로 위압인 곳으로 그려진다. 리지를 몰아세우는 아버지 혹은 삼촌이 그녀를 몰아세우는 장면에서 월등히 넓은 화면비를 삼켜버리는 구성만큼이나 발작 증세의 리지를 시설로 보내야 겠다는 아버지와 삼촌의 대화가 '벽'을 타고 들려오고 또다른 폭력이 행해지는 '문' 너머를 훔쳐보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은 집이 집이 아니라 주인공을 가두는 감옥에 가깝게 만든다. 외부 사람에게서 끊임없이 협박편지가 오지만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므로 함구하기로한 아버지의 결정처럼 리지의 목소리가 새어나갈 수 없고 새어나간다 한들 남성-보호자 없이는 미약함으로 그친다는 공간은 집 너머 1890년대의 미국 메사추세츠의 보수성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영화 초반 그녀의 앞길을 막는 아버지를 무릅쓰고 리지가 혼자 극장으로 가는 길을 나선 것처럼 리지는 집 안에서 하녀 브리짓 설리번(크리스틴 스튜어트)을 만나게 되고 그녀와 손을 잡으며 마침내 범행을 저지르게 된다. 





그녀의 하녀 브리짓은 리지보다 계급적으로 아래일 수밖에 없고 리지는 브리짓에게 성폭행을 한 아버지의 딸이기도 하다. 살인 혹은 심판이라는 상상력은 그 계급의 간극을 넘어서는 두 여성 간의 사랑까지도 그려낸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재판에 이르러 브리짓이 결국 리지를 포기하기까지의 전개는 실화라는 소재를 빌려 두 여성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으로 대두될 수 있는 여성 간의 사랑과 연대,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억압을 그려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화에 드라마를 끼워넣고자 하는 연출은 증거 인멸을 위해 전라의 모습으로 도끼 살인을 행하는 인물상으로 두 여성을 벼랑 끝으로 몰고가는 것 외엔 별다른 성과를 꾀하지 못하며, '장르'를 탄탄하게 뒷받침하기에 애매한 성격의 묘사로 보여진다. 상상력이 영화적 재현으로 끝까지 미치지 못한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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