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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Jan 26. 2019

누구도 감히 구원자일 수 없는

영화 <가버나움>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끊임없이 글을 써내야 하는 이 방향이 좀처럼 깊어지지 않을 때마다 들추게 되는 책을 우연히 <가버나움> 상영 직전까지 붙들고 있었고, 읽었던 구절과 영화의 재현이 맞아떨어지는 순간과 마주하고야 말았다. 영화 <한공주>의 특정 시퀀스에 대해 평론가 남다은이 시선의 폭력성, 이미지의 재현 윤리를 언급하는 문단을 영화 리뷰에 앞서 인용한다.




폴란드의 거장 키에슬롭스키의 선택은 이 질문(다큐멘터리와 허구의 간극)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영화를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극영화로 관심을 돌렸다. 그 이유는 "타인의 내밀한 부분에 허락도 없이 파고 들어가는 (다큐의) 외설성"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현실이 외설성을 돌파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그 순간을 허구로 만드는 것이며, 그 위장된 허구 속에서 오히려 진실을 탐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슬라보예 지젝, 『진짜 눈물의 공포』).

남다은, 『감정과 욕망의 시간』, p192

 





실화에 기반했다는 사실을 넘어, 영화가 세상에 알려지고 난 뒤 이 실화 속 인물들의 삶마저 바꿔놓았다는 <가버나움>의 결과물은 허구라는 영화 장치 안에 레바논 빈민가와 불법 체류자, 그리고 난민이라는 인권 문제를 데려와 작동시킨다. 빈민가에 살고 있던 12살 자인이라는 배역의 이름을 시리아 난민이었던 출연자 '자인 알 라피아'에서 따온 것과 같이 영화 속 줄거리는 캐스팅된 배우들의 실제 삶과 크게 동떨어져있지 않다. 어린 여동생이 팔려가듯 결혼을 해버린 이후 가출한 자인이 놀이동산에서 만난 라힐은 영화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결심했던 불법 체류자 '요르다노스 시프로우'가 분한 인물이었고 그런 라힐의 아들인 요나스 역 '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 역시 인종차별 등의 문제를 겪으며 가족과 체류 중이었다. 영화가 칸영화제에 노미네이트 된 후 행사에 참석하기 전까지 출생 신고서, 신분증 등 배우들의 존재 자체를 증명할만한 법적인 근거가 부재했다는 사실은 허구의 울타리가 그들의 존재를 고발하고 또 구제하기까지에 이르는 영화 매체의 쓸모와 보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스크린의 하얀 화폭과 관객석 사이에 끼어든 <가버나움>이라는 영상물, 레바논 국토 위에서 행해진 디스토피아를 재현한 이미지는 이 생각의 선순환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는 12살 자인의 키높이에 맞춰진 카메라의 시선을 통한 그의 생존기 혹은 생활감으로 인해 처음부터 끝까지 휘몰아친다. 자인이, 혹은 자인이 처한 생존의 연속을 그저 필름의 연속으로 대체하며 전람할 수 없고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를 조금이라도 풍경 안에 두지 않으려는 감독의 몸부림에 있다. 면과 면 혹은 선과 선으로, 한폭의 그림으로 포개어지지 않는 인물들이 결코 '예뻐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계적이지 않은 카메라와 약자의 생동으로, 그야말로 치열하게 위장된 허구는 영화가 레바논 최초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고 역시 최초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1차 후보에 아랍여성의 이름을 올린다는 쾌거를 이룬다. 영화의 성공 이후에 영화의 제목을 딴 '가버나움'이라는 단체가 설립되었고 영화 속 인물들과 같은 약자를 적극 돕는데 기여하고 있단 내용은 하나의 이미지로 일시정지되지 않는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과 이후의 과정을 영화를 보기 이전과 이후의 과정으로 보기 좋게 합치시키려들지 않는다.





출생 신고서도 없이 약 12살로 추정되는 소년 자인은 그 자신을 태어나게 한 부모를 직접 고소하며 재판의 자리에 선다. 원고인 자식과 피고인인 부모의 자리, 그들 삶에 연루된 이들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증언하는 양상은 곧 과거 자인이 겪어온 고행에 대한 플래쉬백으로 대체된다. 여동생을 조혼으로 하여금 죽음까지 이르게 한 빈민가를 뛰쳐나와 낡디 낡은 놀이공원으로, 거기서 만난 라힐의 집으로 들어가지만 보호자가 부재하는 세상으로 다시 내쳐지는 행보가 영화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과정은 그 주인공 자신이 방송국에 부모의 무책임함을 전화로 제보하고 재판 현장에서 원고의 자격으로 경험을 직접 서술하는 말하기 일치한다. 삶을 가시화하고 공식화한다는 명목 하에 실제와 그 실재에 덧씌워진 허구의 간극은 자인을 둘러싼 시선의 역학과 그의 입이 행하는 거짓말 혹은 연기의 위치라는 구성단위를 통해 더 자세히 드러나게 된다.





소년의 머리 위에서 닥쳐오거나 그 눈높이 혹은 아래에 임하거는 카메라를 두고 주인공을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는 앵글을 모두 고려할 때 소년의 키에 최대한 아이레벨을 맞추고자 한 시선에 대해 그것이 핵심이라고 쓸지언정 그것만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프닝 크레디트가 나오는 시점에 디스토피아를 조감하는 드론 카메라가 그 시야를 좁혀 들어갈 때 자인이 딛고선 세계엔 그를 둘러싼 시선과 자인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함께 양립한다. 그가 직접 돌보며 함께 동반하는 동생 요나스를 내려다볼 때를 제외하고, 자인은 그를 둘러싼 어른들 혹은 어른들의 세계를 올려다본다.



작은 키로 인한 위치부터 시작된 시점이 스크린 상반부를 점찍을 때 점과 점 사이를 잇는 대각선은 가난한 자인의 집에 걸려있던 빨래줄을 연상시킨다. 카메라가 틸팅되어 기울어진 그 장면은 안정으로 수렴할 수 없는 이탈선으로, 투시도 가운데에 그려진 소실점을 절대 지날 수 없는 선으로 그려진다. 애초에 그려질 수 없고 그려져선 안 되는 시선의 끝은 그러므로 부재해있다. 보호자가 없는 아이가 어른들을 올려다보는 시선 속에 동경과 존경을 찾아볼 수 없는 사실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온다. 영화 초반, 자인의 엄마가 감옥에 있는 자인의 형을 면회할 때 그들을 바라보는 자인의 무표정한 표정을 보라. 불법 마약 주스에 대한 대화를 들으며 엄마와 평행한 위치에서 멍하게 어딘가를 바라보는 자인은 가족 구성원도 되지 못한 제 3자의 무감정으로 응하고 있다. 자인의 얼굴을 반정도 가리고 있는 엄마의 옆모습은 아웃포커싱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은 벽이자 장애물로까지 느껴진다.





자인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은 이 이후에 끊임없이 나타난다. 집을 나온 자인에게 보호처가 되어주었던 라힐이 불법체류자로 구금되자 자인과 요나스는 그들을 보살펴줄 보호자 없이 서로를 지탱하는 힘으로 버티며 살아간다. 어느날 시장에서 난민을 위한 무료 배급소에 대해 알게 된 자인은 거울 앞에서 자신이 난민이라며 배급소에 호소하는 연기를 연습하게 된다. 영화의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는 그 장면에서 자인과 거울에 비친 자인의 상(像)이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은 실제 시리아 난민이었던 배우 자인과 레바논 빈민가의 자인이라는 배역이 함께 맞물리는 경계에 이른다. 이제까지 거짓말은 자신을 보호하거나 누군가를 경계할 목적으로 능숙하게 뱉어온 수단이었지만 마치 배우의 실제 사연과도 같아보이는 대사가 읊어짐으로써 덧씌워진 허구는 마침내 실재를 감싸고 그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고야 만다.  





그렇게 자인은 종종 거짓말을 한다. 그 거짓말을 이어받는 어른들의 존재에 대해 쓰라고 했을 때 사실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재판이란 공간으로 돌아가서, 자인의 반대편에 위치한 피고인석은 그를 보호하지 못하고 책임지지 않은 상대적 강자라는 우위를 범하기 쉽지 않은가. 재판이 끝나고 법원을 나서면 그 앞에 몰려든 기자들에게 어떤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라 말하는 자인의 부모 또한 자신들의 위치를 아는 것도 같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을 내몰기보다 레바논 안에서 다시 상대적인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제약을 그려내고자 한다. 특히 사하르의 남편이 사하르와 자인의 엄마 역시 같은 조혼 방식을 통해 가정을 꾸렸다며 진술하는 장면과 더불어 자식들을 위해 무엇인들 못하겠냐며 절규하는 엄마의 눈물을 바라보는 이는 이 영화의 감독이자 자인을 변호하는 검사 역할의 나딘(라딘 라바키)이다. 자인의 행보를 따라가기도 바빴던 카메라가 그 눈물을 보는 여성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 것은 부모가 가진 죄의식에 심정적으로 동감하는 역할이라기보다 자인이 그리는 시선의 대각선 위로 수렴점 없이 떠도는 또다른 대각선을 적층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의 함의에 가깝다. 적층된 대각선은 서로 만나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하며 그들이 가진 상대적 위치의 우위와 제한을 끊임없이 파고든다. 그 운동과 방향성이 이 영화가 허구로 점유하고자 했던 지옥도의 실체인 것이다.





약자에 대한 재현, 나아가 그 약자가 처한 고통의 형상은 형상화의 과정과 그 결과물 모두 이것들을 보고 느끼는 관점 앞에서 항상 윤리적 재현이라는 시련을 겪는다. 보고 느낄 뿐 직접 개입할 수 없다는 관객의 위치에서 전시하며 관음한 것이냐는 문책은 실재하는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영화 지형도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같은 것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결국 영화를 보는 관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기에, 특히 영화 상영이 가능한 환경이라는 전제 자체가 영화라는 문화마저 사치인 입장을 짓누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해두고 있어야 한다.  



이때 영화 <가버나움>에서 제시되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자인이 맞딱들이는 절망의 상황들은 캐릭터를 사지로 몰아넣는 마구잡이라기보다 실재해있는 고통과 그 앞에 놓인 자인 스스로의 결단과 행동력 자체로 동한다. 살기 위해 스스로 거울을 보며 거짓과 연기를 행하던 자인이 마침내 세상에 알려진 후, 그의 신분증에 들어갈 증명사진을 찍으려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을 기억한다. 활짝 웃는 그 얼굴에서 드디어 전망이라 부를 만한 미래 외에 이제까지 이 지옥도를 살아온 생명력을 본다. 곤경의 처한 아이의 얼굴일 틈이 없는 캐릭터의 생동은 스크린 앞에 앉아있는 관객 어느 누구도 감히 구원할 수 없는 삶을 두고서 시혜적 시선이라는 명분이 그 복잡 다난한 지도를 깔끔한 종횡으로 가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제1세계'를 경유하여 '제3세계'라는 꼬리 자르기에 동참할 만한 대상화의 여지를 두지 않고 그럴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은 <가버나움>이 가지고 있는 미덕이며, 약자를 재현하는 이미지에 도래한 흔치 않은 윤리적 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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