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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Feb 03. 2019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위안

영화 <이월>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월의 마지막 날 <이월>이라는 영화를 봤다. 좋아하는 기자님이 진행하는 GV에 다녀왔고 배우들과 감독의 문답을 들으며 고민에 빠졌다. 최근의 흐름만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우리가 보아온 독립영화 속 (비) 청소년-청년의 삶을 고통이란 단어로 치환하고 재현하는 양상에 대해서, 이것들을 그저 모두 같은 '고통 포르노'라는 손쉬운 단어로 매몰할 수 있을 것이냐는 고민. 개인의 힘으로 결코 바꿀 수 없고 앞으로 바뀌지 않을 세계를 떠안은 인물을 카메라 앞에 어떤 대상으로 두고 볼 것이냐에 대한 고찰이 결코 깊지 않았던 영화도 봤고, 오히려 새로운 시사점을 안겨준 영화 또한 접한 상태에서 영화 <이월>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고민 말이다. 





영화는 일하는 만두집에서 돈을 훔쳤단 누명을 쓴 민경(조민경)을 비추며 시작한다. 별 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았지만 죽일 듯이 자신을 몰아세우는 사장에게 민경이 욕을 뱉으며 가게를 나온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그동안 오만 원씩 빼돌려왔던 돈들을 다시 세어보는데, 창밖으로 익숙한 차 소리가 들린다. 이어지는 점프컷. 민경과 가게 주인의 한바탕을 목격했던 트럭 기사 진규(이주원)가 침대 위에서 옷을 추스르고 있다. 그리고 서랍 위에 오만 원을 건넨다. 



하루 벌어 하루 산다는 한 여성의 신체가 성으로 매매되거나 매수되는 현장을 목격할 때 항상 그 설정의 유약함에 치를 떤다. 리얼이라는 이름 아래에 너무 손쉬운 몸의 이미지로 관객의 한눈 팔이가 되어왔던 영화들을 기억한다면 역시 같은 걱정을 안고 민경을 볼 수밖에 없다. 이때 <이월>은 옷을 입고 돈을 건네주며 민경과 대화를 나누는 진규가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는 동선을 따라간다. 카메라는 돌고 돌아 다시 침대로, 몸을 일으켜 속옷을 입고 있는 민경을 본다. 옷을 입을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번 그가 집안 추위에 몸을 떨면서도 오만 원을 꾸역꾸역 보관함에 넣는 모습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신체라기보다 이미 그 주변의 생존법을 터득한 그녀의 요령 혹은 방식을 보여주기로 한 영화의 선택인 것 같다. 세계에 압도당할 것이냐 아님 맞서 싸울 것이냐는 물음마저 사치인 그녀가 그 이후로도 꾸역꾸역 음식을 먹고 주변 인물들로부터 돈을 받아내는 모습들이 그 선택을 뒷받침한다.





살고 있던 빌라 반지하가 재개발 구역에 들어가자, 민경은 한때 룸메이트였던 여진(김성령)의 시골집으로 들이닥친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민경을 향해 활짝 웃는 여진을 보니 둘은 한 때 절친한 사이었나 보다. 여진이 우울증을 앓았고, 민경과 함께 살던 그 집에서 자살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설명되지 않지만 지금은 행복한 여진을 보는 민경의 표정은 어딘가 비어있다. 여진을 따라다니는 이성친구인 영빈(박영빈)을 두고 이유 없는 악의를 보이기도 하던 민경은 여진이 자살 시도 이후 혼수상태에 빠진 동안 여진의 가족들에게 쳤던 거짓말 때문에 내쫓기게 된다. 아직 추운 2월 떨고 있던 민경을 진규가 발견하고 민경은 하는 수 없이 그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모든 것이 갱신되는 1월과 본격적으로 봄이 시작되는 3월 사이의 2월은 집에서 집으로, 문에서 문으로 넘어가며 꾸역꾸역 삶을 살아내는 민경과 많이 닮아있다. 여진과 있는 그 순간에도 마음 놓고 쉴 수 없었던 그는 여진의 이모할머니 실종과 관련한 뒷마당 웅덩이 얘길 들으며 유독 섬뜩해한다. 온전하게 발을 딛고 설 공간이 없던 그녀는 결국 웅덩이에 빠져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이모할머니의 두려움을 가장 가깝게 떠안고 있는 인물일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웅덩이 이야기에 쉽게 허덕인다. 여진에게 한 악행이 드러나자 집을 빠져나오는 도중 그 웅덩이에 빠지게 되고 몸을 일으켜 땅 위로 올라가려 하지만 번번이 미끄러지는 민경을 보며 관객들은 두 가지 사실을 떠올린다. '웅덩이가 생각보다 많이 깊었구나'와 '나는 민경에게 올라오라며 손 내밀 수 없구나'. 





그렇다면 여진의 시골집은 민경에게 언제나 불안했던 집 한구석이었나? 그렇게 얘기하긴 어려울 것 같다. 여진의 집안엔 돈이 많아서, 그 집엔 집과 마당 말고도 넓은 배밭과 그 땅을 등질 수 있는 언덕 따위가 있었다. 아직 싹이 나지 않은 2월의 배밭 한가운데를 걸어 나가는 민경은 스크린 상반부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선 배나무들을 올려다본다. 나뭇가지들은 아직 앙상해 보일지언정 찌를 듯한 가시를 품고 있지 않다. 민경을 안을지언정 내치지 않은 나무들 아래에서 민경은 그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을 본다. 발아래 아직 이름을 모르는 들풀을 본다. "봄이 되면 이 아이들도 제 이름을 찾겠지"라는 민경의 대사는 거친 결을 가진 영화 전체와 비교했을 때 동떨어진 느낌마저 난다.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민경에게 이것들은 모두 환기의 공간이었으며 어쩌면 민경 역시 여진과 같은 회복세를 보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마저 안겨준다. 이 희망들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는 민경의 악행, 여진에게 품은 그 열등감들이 온전한 민경의 잘못이냐는 질문 앞에 영화는 인물의 전사를 억지로 끌어내리기보다 그 앞에 육박해오는 집과 집, 공간과 공간 그 자체를 조망하고자 한다. 그로 인해 민경은 설명되지 않고, 이해받는다. 





민경과 성관계를 해왔던 진규의 얼굴이 처음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그가 추위에 떨고 있던 민경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다음날 아침이다. 그동안 옷을 입는 옆모습으로, 쓰러진 민경을 옆에서 지켜보는 옆모습으로만 보였던 그가 환한 아침 햇살에 얼굴을 드러내자 생각보다 많은 나이와 생각보다 많은 주름에 뜨악하고 말았던 나는 민경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과 그 앞에서 볶음밥을 연신 퍼먹는 민경이 한없이 불안해 보인다는 감상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이후 민경은 위험해지기는 커녕, 진규의 지원과 그의 아들 성훈과의 어울림 속에서 그야말로 안정을 찾게 된다. 특히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부모님의 이혼과 아버지가 지속적으로 데려오는 '아줌마들'의 존재로 인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들 성훈(박시완)이 민경의 존재에 익숙해짐으로 인해 민경 또한 그와 그의 집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그러나 사람 좋은 미소를 건네고, 약자인 그녀에게 어느 정도 양심마저 내비치는 이 공간을 한없이 폭력적이라면 폭력적으로 볼 수 있다. 이 따뜻한 신혼집과 같은 보금자리에 처음 당도했을 때 중국집 음식을 시켜놓고 진규는 만두집 사장이 그렇게까지 민경에게 화를 둔 이유를 말하며 그에게 한 번 몸을 대주라는 말을 뱉는다. 아님 같이 살자, 뒤이어 자신의 말과 더불어 그 대화 상황까지 삼킬 듯 후루룩 짬뽕 국물을 들이켜는 그는 민경에게 적절한 시기에 나타난 이일지는 모르나 적합한 보호자 내지 동반자가 될 수 없다. 세상에 완전하게 올바른 전제를 찾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부가 된 마냥 식탁에서 어린 아들 성훈을 돌봐주어 고맙다며 건네는 말이 어느덧 편해진 이 분위기가 너무 이상하다는 것이다. 갈 곳이 없어서 진규의 아파트 외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민경에게 이 두 남자가 기대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이냔 질문을 건네고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아내와 민경의 역할을 구분 짓는 진규와, 엄마가 아니라 끝까지 민경을 누나라고 불렀던 그의 아들 성훈은 그 상황에서 민경에게 최소한의 숨통을 트여주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적절한 선택과 적절하지 못한 선택이 뒤섞인 이 영화를 두고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장면들은 모두 진규의 집에서 나왔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려보기도 전에 민경은 그 집을 나오게 된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결국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는 듯이. 





민경은 사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취업준비생이었다. 돈이 없어 학원에서 도강을 하는 장면에서, 쪽지시험을 볼 것이니 수강신청을 하지 않는 사람은 나가 달라고 하는 선생 앞에 생각보다 꽤 많은 수의 학생이 일어선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동요하지 않는 분위기의 교실 속에 민경은 아직 눈치를 보며 앉아있다. 이때 민경의 뒤로 꽉 차 보였던 책상은 나간 학생들의 자리로 거의 비어있다. 아웃포커싱 처리된 이 빈자리들은 민경만큼이나 공간과 공간을 전전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을 떠올리게 하며 관객과 더불어 좀처럼 일어나려 하지 않은 민경을 지켜보고 있는 존재다. 



수강증을 보여달라는 말에 결국 민경이 짐을 챙겨 일어나고 가장 마지막까지 버틴 그녀를 학생들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일어설지언정 마지막까지 버틴 이는 딛고 설 온전한 땅 없이 웅덩이 같은 언덕들을 전전하다 하늘 길에 올라선다. 민경이 마지막으로 자리했던 컨테이너 박스가 공중 부양하고 그녀가 미소를 띠며 주변 지리를 내려다보는 결말은 그녀를 품었으나 혹은 품고 싶었으나 번번이 놓칠 수밖에 없었던 영화 전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완전할 수 없기에 쉽게 허물어지기 십상인 위안을 뒤로하고 가시를 안은 민경이 비로소 활짝 웃을 때 상황과 인물 간에 파고드는 재현에 관한 고민 또한 그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붕 떠오른다. 손쉬운 이미지로 환원할 수 없는 영화 재현만큼이나 같잖은 확신으로 감히 그 고민을 채울 수 없기에, 다만 이런 류의 영화와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계속해서 질문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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