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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Feb 18. 2019

누락된 이름들의 연대

영화 <어바웃 레이>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 3대의 가족이 있다. 할머니 돌리(수잔 서랜든)는 레즈비언으로 현재 동성 파트너와 동거 중이며 엄마 매기(나오미 왓츠)는 싱글맘으로 딸 레이(엘르 패닝)를 이제까지 혼자 키워왔다. 한때 라모나라는 이름의 딸이었던 레이는 4살 때부터 자신이 여자의 몸에 갇혀 있는 남자임을 인지했고 16살이 되는 해에 성전환 수술을 받기로 마음 먹는다. 딸이 아들로, 손녀가 손자로 변한다는 내용의 호르몬 주입 동의서를 눈앞에 둔 가족들은 서로 갈등과 화합을 거듭해나간다.  





뉴욕 도심 속에 위치한 이들의 집은 겉보기에 다른 가정과 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아파트이다. 삼대가 각자 갖고 있는 개성 혹은 정체성이란 현관으로 한 발자국만 더 나가도 이질적이고 이상하기까지한 것이기도 해서 집안에 속속들이 들어찬 그들 가족의 조금 특별한 규칙들은 서로를 지키고 감싸기에도 모자를 지경이다. 집안에 벽과 벽, 문과 문 사이의 빈 공간들을 오밀조밀하게 채워넣은 소품들을 보라. 깔끔하게 정돈되지 않았어도 그들 나름의 여유과 습관이 베어있는 집안 물건들의 합은 <어바웃 레이>의 출연진들의 연기합만큼이나 적절한 톤을 가지고 있다. 그 위로 종종 들어오는 햇빛은 레이의 침대가 붙어있는 벽을 비춘다. 남성 호르몬 주사 이후 레이가 남자의 몸을 갖기 까지 걸리는 시간, 적어놓은 숫자 위로 노을이 질 때마다 들어오는 빛 앞에선 레이가 앞으로 견디며 살아갈 삶은 결코 외로워보이지 않는다. 따뜻한 정서, 밝고 노란 톤의 조명은 이렇듯 내내 가족을 비춘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지니고 있는 정체성의 복잡다난함은 결국 바깥 세상과 맞부딪혀야만 공명할 수 있는 박수소리와도 같으며 이 세 여자 -돌리의 파트너 프랜시스(린다 애몬드)를 포함해서 네 여자- 가 갖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그 충돌은 나이, 지위, 역할 등의 위계에 좌우되는 영역이 아니다. 레이의 성전환 수술의 이슈가 영화 중심에 있긴 하지만 평생 여성 신체의 자유, 여성인권에 대해 설파하며 살아온 돌리나, 싱글맘으로 레이를 혼자 키우며 무거운 책임감에 직면한 매기의 삶 또한 레이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부딪혀 공명하고 이 잡음이 집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그들이 두려워하는 일은 없다. 레이가 동급생들로부터 놀림을 받고 난 뒤 도둑맞은 그의 신발을 찾기 위해 아닌 밤 중에 가족 모두가 랜턴을 들고 거리를 누비는 장면에선 손이 닿지 않은 높은 난간에 달려있는 레이의 노란색 신발이 어떤 희망으로까지 보여지기도 하는 것은 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레이가 자기 스스로를 찍은 영상을 편집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어떻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안게 되었으며 현재 레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내레이션과 영상이 교차편집되는데 이때 화자는 레이뿐만이 아니다. 호의적인 미소를 띈 엄마 매기는 그의 영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거나 혹은 편집된 영상을 딸과 함께 감상하기도 한다. 집안이라는 공간이 가족들이 서로 갖고 있는 서사를 공유한다면 레이의 컴퓨터 속에 1인칭 시점으로 드러난 바깥 세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레이는 스스로 말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를 괴롭히던 동급생으로부터 자신의 영상이 담겨있는 핸드폰을 지켜낸 레이는 마치 폭력적인 포착으로부터 벗어났고 앞으로도 벗어날 것처럼 보인다. 레이가 보드를 타며 찍은 아스팔트 바닥과 그가 운동하는 모습이 부자연스럽게 봉합되거나 포커스가 정확치 않고 다소 흔들림이 많은 이 셀프 테이프는 사실 바깥으로부터 쉽게 간파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존재한다'. 





<어바웃 레이>는 소수자의 무거운 주제의식 이전에 애초에 그들이 존재하고 있고 태초부터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일상, 집안환경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족들 모두가 병원으로 가서 레이의 문제에 대한 상담을 받고난 뒤 집으로 돌아와 이어가는 대화 속엔 그들 가족이 겪은 전상황들이 종종 등장한다. 서로의 내력과 역사를 알고 있는 구성원들에겐 누군가가 동성을 좋아하고, 이혼 이후 어떤 커밍아웃의 과정을 겪었는지 등의 기억들이 문제적 상황이나 트라우마라기 보다 장난이나 위트, 유머의 코드로 작용한다. 일련의 일들을 겪은 가족이기에 레이의 문제에 대해선 더더욱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이성애 중심사회에서 동성연애를 말하고, 정상가족의 환상 속에 한부모가정으로 버텨가기란 'Male'과 'Female' 사이 세상이 레이를 품을 수 없는 누락된 이름을 더욱 체감하는 위치일수밖에 없으니. 가족의 역할보다 더 중요한 건 가족이 함께 겪어온 전상황, 그야말로 내 편의 문제, 내가 연대하고자 하는 축선의 문제이기에 영화 속의 자기의 정체성, '나'로 등장하는 구성원들은 중립일 수 없고 존재의 찬반을 가릴 수 없는 문제 앞에 서로의 손을 붙잡는다. 존재를 둘러싼 외부의 시선을 조언하기도 전에 서로를 끌어안은 가족의 모습은 영화가 그 어떤 소수자의 형상보다도 가장 그리고 싶어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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