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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Feb 22. 2019

10년도 더 된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영화 <바르게 살자>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형사과 경찰이었으나 모종의 사건으로 교통과 순경으로 좌천된 정도만(정재형). 영화의 첫 장면, 아침 풍광이 밝은 방 안에서 손수 유니폼을 다리고 정갈하게 모자를 맞춰쓰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일상과 업무처리는 항상 칼로 잰 듯 딱딱 맞아떨어지는 각과 품격을 갖추고 있다. 때마침 새로 부임해온 경찰서장 이승우(손병호)는 연달아 시에서 일어나는 은행강도 사건에 전례없는 은행강도 모의훈련을 실시한다. 가장 중요한 강도 역에 이승우는 정도만을 지목하고 정도만은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사명감을 안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은행의 문을 연다. 





모의훈련이라는 공간은 안전에 불감한 한국사회에서 애초에 비웃음을 살 사건이었다. 이를 직접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서장 이승훈마저 모의훈련을 그저 사람들의 불안을 잠재우고 대외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 치부한다. 그러나 이 한복판에 실제 강도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내는 정도만이 등장하고 그저 그가 형식보다 실속을 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의 고리타분한 위계질서를 가로지르는 인물이 되어버린다. 이 흥미로운 실험실은 낮부터 밤까지 반나절이 넘는 시간동안 강도와 인질들이 은행 안에 한데 모여있다는 설정에서 연극적인데, 인질 역할을 부여받고나서 의외로 지시에 잘 따라주는 사람들이 그다지 극적으로 몰입하고 있지 않은 것은 연극 무대와 배우의 이질성, 실재하는 배우와 가상의 역할 간 간극으로, 사실 한국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영화의 위치를 그 스스로가 훌륭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풍자라는 의도가 사명감으로 바뀌며 숙연해지는 순간 한국사회 전반을 은유하고 있는 인질들과 인질극은 영화 바깥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 풍자는 진지함으로 너무 몰입하고 있지 않아야 한다. 그 자체로 '거리두기'가 되어야 한다. 

 




강도 역할의 정도만은 제대로된 훈련을 위해 인질들에게 그들의 상태가 적혀있는 팻말을 씌워준다. 문자 그대로 '포박'하고 '실신'하며 '사망'하기까지에 이른 그들 중 유독 큰 목소리로 항의하는 '미쓰 리'라는 여성에게 정도만은 두 가지 폭력을 행사한다. 얼굴 바로 앞에서의 박수 소리로 그녀의 뺨을 치는 예행을 선보이는 것이 첫번째고 갑자기 서있는 여성 앞에서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장면이 두번째이다. 두번째 이어지는 장면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그녀의 목에 걸려있는 건 '강간'이라 적혀있는 팻말이 보인다. 인질들에게 극적인 상황을 부여할 때 정도만이 같은 경찰 동료가 아닌 일반인에게 특정 행위를 가한 것은 그 두 장면이 거의 유일하다. 이때 영화는 전자에서는 실제의 박수 효과음과 때릴 것처럼 보이는 액션 직전의 정도만의 표정을, 후자에서는 윗몸일으키기라는 실제 행위와 이후 머리를 풀어해친 여성의 클로즈업을 함께 매치시킨다. 이 모든 것이 가상이며 가짜이고, 그렇기에 정도만의 행동 또한 극적인 사건으로 치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영화는 이 폭력의 장면들을 촬영과 편집을 통해 굳이 이미지화시킨다. 한국 사회를 비웃으며 그 코드와 위계를 비틀 수 있어야 하는 건 분명 강자보다 약자편에 있어야 하는데 누군가에 대한 폭력과 위력을 행사하는 이미지는 다시 그 약자들 간에 수직적인 단절을 그어버린다. 남성 정도만이 여성 미쓰리에게 행하는 폭력을 웃음거리, 유머코드로 치환하고 관객들이 그것을 보고 웃는 그 순간부터 영화에 담긴 풍자의 의도가 산산조각나는 것이다. 





<바르게 살자>의 개봉연도가 2007년이더라. 영화가 개봉하고 12년이 지난 지금 현재의 우리곁엔 영화 스트리밍 플랫폼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있어서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굳이 먼지께가 쌓인 DVD를 툭툭 털 필요가 사라졌다. 암만 편하다 한들, 제목 옆에 붙어있는 숫자를 보며 이렇게까지 오래된 영화였나라는 씁쓸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추석특집 TV에서 틀어주는 영화를 보며 낄낄대던 어린 내가 그리 오래지 않은 것 같은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팽팽한 얼굴을 시간에 견주며 그 간극을 몸소 체감했더랬다. 그 간극은 매끈한 얼굴만큼이나 영화에게도 공평했다. <바르게 살자>의 소재와 설정의 참신함에 여전히 감복하지만 그때 그 시절에 분명 웃겼던 장면들이 잠시 일시정지 되며, 현재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돌이켜 정녕 웃어도 되는 코드인가에 대한 물음이 끼어들었다. '정말 웃어도 되나'라며 시작된 질문은 이내 '우리가 이런 것에 웃었던가' 라는 회고로 한 획을 그었고 내게 <바르게 살다>는 여전히 좋은 영화였지만 영화가 젊은 배우들과 더불어 간직하고 있는 시간은 10년이 흐른 영화 바깥에서 이질적인 만듦새를 경유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 물음에 대한 글을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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