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본 영화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지 Mar 02. 2019

권위를 벗고 새 이름을 쓰는 일

영화 <항거 : 유관순 이야기>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항거 : 유관순 이야기>(이하 <항거>)는 18살이었던 학생 유관순(고아성)이 3.1 만세 운동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실려가는 관순의 시점에서 보이는 높다란 형무소의 지붕과 돌벽이 카메라 앞에 스쳐지나가고 영화가 시작한지 얼마지 않아 고문으로 불어터진 관순의 얼굴이 드러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던 빛바랜 사진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상처와 흉터에 이제 막 스크린과 대면한 관객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기 쉽다. 그렇게 수감자 사진을 찍고, 복도를 지나 관순이 앞으로 지내게 될 8호실의 문이 열린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우리에게 의외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방 안에 빼곡히 서있는 여성들, 그리고 그들과 눈이 마주치고 처음으로 당황한 관순, 배우 고아성의 표정들. 



'역사영화'만큼 영화 속 등장하는 요소들의 스펙트럼이 넓은 장르가 또 있을까. 당시의 시대상으로 눙칠 수 있는 수많은 재현과 재회들을 현재에 이르러 마주하는 관객들까지. 이 포부가 큰 장르에 <항거>의 각색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름에 아무나 알고 있지 않았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한 조금 특별한 방향을 시도한다. 사람들이 애초에 기대했던 3.1운동의 장면은 영화 중반에야 등장한다. 그마저도 장대한 시작에 집중한다기보다 사람들이 한창 만세를 부르는 현장 중앙에 들어선 카메라로 찍고자 한다. 이때 관순은 결연한 의지에 가득차있는 완전한 열사라기보다 제일 먼저 총칼을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피하라며 소리를 지르거나 눈앞에서 죽어가는 부모를 보며 오열한다. <항거>에서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은 감옥에 들어간 이후, 한 인간으로서 주변 여성들과 연대하는 유관순이다. 연대하며 열사로 살아간 인생의 나머지를 적고자 하는 여성의 일대기이다.    



8호실에 수감된 죄수의 생활, 방이 비좁아 교대로 서있거나 눕기를 반복해야 하고 몸이 붓는 것을 예방하기 위헤 끊임없이 방 안을 순회해야 했던 모습은 유관순과 그 주위에 함께 서있고 버티는 여성 동지들의 물리적 재현이다. 방이 비좁아 교대로 서있거나 눕기를 반복해야 하고 몸이 붓는 것을 예방하기 위헤 끊임없이 방 안을 순회해야 하는 질서는 자리와 음식을 서로 나누어주던 이들의 연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패턴이기까지 하다. 극 중 옥이와 관순, 향화가 대화를 나눈다. 천한 신분과 서울 학생이 대화를 나누는 게 신기하다는 옥이의 말에 관순이 그 차별을 없애기 위해 모두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남자였다면 만주도 가고 자유롭게 밖을 다녔을 거란 옥이의 말에 향화가 '여자도 하면 되지'라는 희망을 붙인다. <항거>의 흑백 속에서는 유관순 한 사람을 재현하는 일 뿐만이 아닌 참 많은 희망과 연대를 교차시킨다. 식민지배를 받으며 더군다나 여성이었을 때의 차별을 더하는 순간은 지금도 약자라는 이름 위에 선 많은 이들의 삶을 불러일으킨다. 그 사람들과 발걸음들을 함께하는 영화의 순간에 '유관순'이라는 위인의 이름이 다시 쓰여진다.



고문현장을 찍는데, 그 잔혹성을 덜어내기 위해 감옥에서의 장면은 모두 흑백처리했다는 감독의 인터뷰를 읽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과 얼굴에 색을 걷어낸 영화 <항거>는 이제껏 알고 있었던 편견, 알고 있다 생각했던 오해들을 과감하게 제외한다. 색이 빠진 자리엔 온연한 빛만이 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고요 속에, <항거>가 그리는 유관순은 문득 문득 장난도 치고, 웃을 줄도 아는 한 인간이다. 이 여성의 인간미, 빈틈을 구석 구석 메우는 또 다른 존재들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여성들의 이름들, 관순과 연대하고 이해했던 여성들의 얼굴들이다. 배우 김새벽이 맡은 '김향화', 김예은이 맡은 '권애라', 정하담이 맡은 '이옥이' 등 8호실을 끊임없이 돌고 한 사람이 잡혀나갈 때마다 필사적으로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는 장면들을 보고 있다 보면 만세를 부르고 독립을 외쳤지만 삭제되고 누락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존재에 의문을 갖게 되기까지, 이 영화를 보는 일은 그만큼 덧씌워진 권위라는 역사에 대해 건네는 질문과 일맥상통한다. 고요한 집중 속에 큰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키는 영화 <항거>는 한국 상업영화의 필드에서 실로 오랜만에 나타난 고찰과 성찰의 결과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대를 도려낸 낭만의 초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