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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May 04. 2019

들어오는 볕에서부터 서있는 그늘까지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초함하고 있습니다.


온힘을 다해 뛰고, 인상을 찌푸리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은 그야말로 멈출 겨를 없는 삶의 추동 그 자체다. 똘똘 뭉친 동력의 덩어리와도 같은 이들을 우리 머릿속에 가두려는 시도는  언제라도, 뛰쳐나가고 터져나올 수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의해 무마된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플로리다 주에 위치한 '매직 캐슬'의 빈민층 어린이들과 키를 맞춘다. 그러나 아이들의 꽁무니를 쫓아갈수록 과연 누가 누구의 눈높이를 맞춘 것인지 대한 시작점은 모호해진다.



무니가 살고 있는 '매직캐슬'이라는 맨션은 사실 디즈니랜드 옆에 위치해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 두 공간의 대립점을 쉽게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니와 핼리가 살고 있는 터전에 집중하는 카메라는 고개를 들어 플로리다의 따뜻한 날씨와 내리쬐는 햇볕을 본다. 채광을 실감하게 하는 영화 속 대비 높은 색감은 무니가 질주하는 공간과 그 생활의 뒤를 찌르려 날이 서있는 생존의 위치, 그 간극을 절감하게 한다. 볕이드는 공간뿐만이 아니다. 밤이 되고, 무니가 잠들고 난 뒤 핼리의 일상과 그늘진 스탠드와 주차장, 그들의 침대와 욕실을 슥 훑고 지나가는 카메라는 미처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낮은 곳에 임하며 볕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래서 아이들의 비속어를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장난들도 감독의 시선 앞에선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아무리 예측할 수 없는 생명력으로 툭툭 날을 세우더라도 어른들이 만든 잔인하고 냉정한 규칙에 비하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매직캐슬'의 아이들과 어른들의 생활이 뒤섞인 삶의 태동 앞에서 어느 누구도 아이들의 언행을 두고 단언하거나 동정할 수 없게 된다. 영화 속 인물들도 서로에게 그러하다. 생활의 질 자체를 어느 누구도 극적으로 구원해줄 수 없지만 곁에 서서 지켜보고 지탱해줄 수는 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것으로도 붙잡힐 수 없는 이들의 삶은 해가 뜨고 노을을 그리며 질 때까지, 하루의 원을 그리며 나날이 쌓여간다.  



이 공간을 딱 한 번 벗어나는 장면은 영화의 끝에서 온다. 핼리와 헤어질 위기에 처한 무니, 그리고 그 위기가 극복될 희망조차 거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무니는 단짝친구 제시를 찾아간다. 제시를 앞에 두고 인사하며 크게 울부짖는 무니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 얼굴에 바싹 다가가는 관객의 감정선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서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의 다음 바통을 무니로부터 제시에게 넘겨주는 바로 그 장면에서 씩씩거리던 제시는 무니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뛰쳐나간다. 누구도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않은 그 달리기는 마치 영화 내내 그들이 쫓거나 도망가던 하나의 놀이와도 같아 보인다.



숨이 차오르는 비트와 지평선이 점점 드러날 듯한 멜로디로 관객또한 무니와 제시가 향하고 있는 곳을 본다. 우뚝 서있는 디즈니 랜드의 성. 그간 무니의 생활을 옥죄어왔던 자본의 논리와 빈부 간의 단절. 자신의 생존과 가장 대척점에 있으면서도 생존 그 자체이기도 했던 실체와 아이들이 마주한 순간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이 영화가 마지막 시퀀스의 수평선으로부터 인물과 관객들의 감정을 수직적으로 이끈 그 고조는 크레딧이 올라가고도 좀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머나먼 원을 그리고 있는 감정의 동선은 무니라는 인물의 인생과 앞으로의 안녕을 살아숨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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