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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May 06. 2019

조금 다른 가족, 더 풀어야 할 숙제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영화에선 형제애를 다룬 이야기도 많았고 장애를 다룬 이미지도 많았다. 장애를 가진 형제의 우애, 모자 간의 사랑 등 '장애와 가족애'로 똘똘 뭉친 영화들을 보며 그들이 기꺼이 무언가를 '극복'하길 바랬던 관객들의 기대에 부합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작품들을 돌아봤을 때, 비장애인들을 관객의 대다수로 상정하곤 얄팍한 그림이나마 눈물을 착즙하던 그간의 흐름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워 해야 한다. 장애를 웃음의 코드로 삼느라, 그들의 희화화되지 않은 평소 말투에도 간혹 웃음을 터트리지 않았는지, 결국 가족애와 눈물로 치장할 영화를 보며 재현 윤리에 대한 일말의 코멘트도 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는 이 기대와 조금 다른 노선으로 부합한다. 그 선택엔 장애인 캐릭터에 쉽게 덧씌웠던 약자 프레임에 대한 반성이 녹아있기도 하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 지체 장애 세하(신하균)와 5살 지능의 지적 장애 동구(이광수)는 이들을 한데서 보살핀 '책임의 집'에서 형제처럼 커왔다. 가장 노릇을 해왔던 박신부(권해효)가 죽자 복지 지원이 취소될 위기에 처하고 세하는 이대로 물러나지 않기위해 봉사활동 시간을 빌미로 사람들과 돈거래를 한다. 봉사시간에 대한 수요와 봉사활동 기록 공급이 언덕을 내려가는 휠체어 바퀴처럼 착착 맞아떨어져들어가지만 그들 주변 사회는 형제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논리가 경계, 아니 경계 바깥에 밀려난 인물에게 맞아떨어지지 않도록 호락호락하지 않는다.



세하가 곤경에 처해있는 반면, 동구는 자꾸만 수영장에 놀러가려고 한다. 심지어 헤엄도 잘 친다. 장애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결핍에 대한 극복일 수 있다며 수영 대회까지 앞둔 동구의 물장구에 어떤 희망을 가졌을 관객들에게 영화는 조금 빗나간 그림을 보여준다. 재능은 무지막지하게 성장하지도 않으며, 성장할 새 없이 현실은 세하와 동구를 조여온다. 세하의 휠체어를 끌며 동구가 짓는 표정도 마냥 비어있지 않다. 세하가 기쁘면 기쁜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교감하는 이목구비들은 그들 캐릭터가 보낸 시간들을 절감하게 하며 배우 이광수이기 보다 캐릭터 박동수로 살아움직인다. 이광수를 알고 있던 관객들 또한 영화를 보며 자신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던 일말의 희화화와 동정의 이미지를 한꺼풀 벗겨낸다.



영화가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 장애에 대한 오해와 비장애의 오만을 딛고 한국 영화에서 반발짝 나아간 이미지를 보여준다면, 이 이야기를 영상화하는 방식에서 미숙함을 보여준 연출과 편집은 아쉬움은 두고 두고 남을 수 밖에 없다. 세하와 동구를 제외한 그들의 곁을 지키고 선 주조연의 캐릭터 재현은 캐릭터의 앞뒤가 어딘가 썰려나간 듯 얄팍하다. 어린 세하가 '책임의 집'에 들어서고 난 뒤 그를 놀리고 폭행하던 또 다른 장애자 멧돼지(김민석)의 갑작스러운 울음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다른 시설로 넘어가기 직전 세하에게 매달리는 형제들의 우는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 카메라 시선도 소모적이다. 갑작스레 동구의 가슴팍에 뛰어드는 동구 엄마 정순(길해연)의 동선 또한 갑작스러운 타이밍으로 인해 전체적인 흐름에서 튀기 일쑤다. 뒤늦게 세하의 입을 빌려 멧돼지의 전사를 설명해주거나, 동구와 정순의 관계 회복을 그리고자 하지만 영화 속 장애인 재현의 만듦새큼이나 서사를 잇는 이음새가 결코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영화 초반 취준생 미현(이솜)이 TV 앞에서 식사하는 밥상은 또 다른 약자이기도 한 20대 청년 캐릭터를 조금 분간할 수 있게 하는 듯 보이지만 그마저 조력이라는 역할에 휩쓸려 영화 서사의 감정적인 지렛대 역할을 겨우 해낼 뿐이다.



조금 다른 가족을 다루는 영화 앞에서, 단지 코미디는 코미디일 뿐 토 달 것이 남아있냐며 이 글을 나무라는 반응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가 반발짝 나아간 만큼 완전한 한 걸음을 이루기 위해 더 나아가야 할 숙제를 이야기하는 행위는 아직 영화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놓지 않았기 때문이라 쓰고 싶다. 이 영화에서 재현하는 윤리에 대한 논리를 완성시키기 위해 영화의 노선을 더 나은 방향으로 틀어보자는 수정의 요구는 <나의 특별한 형제>가 해낸 진보 딱 그만큼 더 나아갈 수 있는 또다른 한국영화에 대한 격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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