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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May 24. 2019

보통의 얼굴을 보편의 서사로 돌이킬 때

영화 <배심원들>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배심원들>은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참여재판을 소재로 한다. 2008년, 법과의 인연은커녕 연고는 더욱 없었던 8명의 사람들. 성별과 나이, 사회적 위치 모두 제각기였던 그들이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하기 위해 단상 앞에 선다. 사뭇 진지한 얼굴과 여유 있는 얼굴, 이들을 한 데 에워싸는 그 정적은 배심원들을 둘러싼 높은 벽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평범함', 사람들이 가진 '긴장감'이다. 법원은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진입장벽으로, 사실 2019년인 현재까지도 앞서 다가가기 힘든 권위의 공간이다.

  


기초생활수급자 지원조차 받지 못하던 가정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정말 이 가난한 남자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나'라는 질문은 사실 배심원들에게 처음부터 의문이 필요 없는 대답이기도 했다. 법원 측에서 제공하는 모든  증거와 증언은 피고인과 배심원들을 사각지대의 코너에 몰아넣고  확정 지을 수밖에 없는 확신을 불어넣으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고에 지친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말끔함에 좀처럼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못처럼 툭툭 튀어나와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판결문에 자꾸만 제동을 거는 젊은이들. 권남우(박형식), 오수정(조수정), 윤그림(백수창),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며 배심원단의 판결은 진심 어린 고군분투기로 거듭난다.   



실화로도 명시된 결론부터 말하자면, 배심원단의 판결은 법원의 판결을 '앞지른다'. 밤을 새우고 동이 터올 때까지 상기된 얼굴은 클로즈업되고 배심원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따라 카메라가 팬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의견을 조합하고 증거자료에 나와있지 않은 시점을 더하며, 보통의 얼굴로 돌이킬 수 있는 보통의 사연을 대조하고 또 대조했던 것은 모두 '나 같은 누군가가 억울함에 처할 수 있다'신념 때문이리라. 공동의 의기투합이 만들어낸 '선함'은 피고인(서현우)에게 구원이었고 판사 김준겸(문소리)에게 희망이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그러나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이 모든 올바름이 너무 쉽게 눈에 띄고 너무 쉽게 손에 잡히며 너무 쉽게 만져진다. 아름다움이 비현실적이다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춘다기보다, 영화 속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이 또 다른 모순이나 질문거리의 여지를 막고 있지는 않았는가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다.




모두의 노력이 선함에 수렴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 <배심원들>은 보통의 얼굴을 보편의 표본으로 치환하고자 하는 시도의 대중서사이다. '모든 것에 공통되거나 들어맞는' 본보기를 '특별하지 아니하며 흔히 볼 수 있는' 얼굴로 포섭하고자 하는 이 도모에 사실은 깜빡 속아 넘어가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은 피고인을 보며 무죄 판결을 감히 다행스럽게 여길 수 있는 처지인가에 대해,  이 상업영화가 미처 챙기지 못한 잉여의 영역, 보통이라는 은 자꾸만 우리를 반성하게 만든다.



주변에 흔하다는 전제는, 자연스럽게 그 흔함을 인지하고 있는 나 자신의 위치를 견지하게 만든다. 내가 보는 모든 것이 내가 아는 세계일지라도, 내가 딛고 선 땅과 마주 본 하늘 전부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아는 만큼 상상할 수 있다면, 사실 우리가 '아는 만큼만' 돌이켜볼 수 있는 범위도 짧고 얄팍한 것이리라. 이때 영화의 기승전결을 위해 다소 극화된 배심원들 간의 대화, 피고인의 억울함과 법의 정의를 따라 울려 퍼지는 톤의 목소리는 이 빈틈을 보이지 않게 채워버리곤 한다. 반복되는 범행의 플래쉬백마저 피고인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자 하는 배심원들의 진심이자 진정성이겠지만, 모든 사정을 확신하는 이야기들은 법정의 유효한 물증이 되어버린다. 실제 벌어진 사건과 맞아떨어지는 그 말끔한 서사의 구조는 피고인의 입을 열어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만들며, 배심원들의 질문은 열어놨을지언정 관객들이 가질 수 있는 더 이상의 반문은 닫버린 영화의 문 앞에서 우리는 영화 초반 주인공들이 재판장 앞에 섰을 때의 눅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실 이에 대해 <배심원들>이 완전히 손을 놓고 있지는 않다. 영화 속 첫 오프닝 시퀀스를 생각해보자. 포커스 아웃되었던 배경에 초점이 잡히고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한 사람, 아니 그 뒤의 두 세 사람, 그보다 더 많은 인파가 왁자지껄하게 자동차 한 대를 에워싼다. 뒷좌석에 탄 사람의 시점에서 우리는 다급하게 부르는 소, 터지는 카메라 후레시들을 보며 관객들은 로 그 장면이 <배심원들>이라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란 예상을 하기 쉽다. 사실 그 시퀀스는 배심원들이 참석한 재판 도중 돌발상황으로 인해 피습 아닌 피습을 당한 판사 김준겸의 것이었것이었다. 절대적인 권위인 줄로만 알았던 직책에서 내려와 돌출된 질문과 의심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셈이었던 그 장면은 재판 전체를 통틀어 기승전결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권위자의 당황 혹은 당혹의 감정을 영화의 가장 첫 번째에 배치한 이유는 영화 <배심원들>이 앞으로 포커스를 맞출 권위의 이면을 명시한 지점이기도 하다.  



서사의 빈틈과 감정의 여백을 채우기 위한 캐릭터의 설정도 재밌는 요소 중 하나다. 법원에서 길에 잘못 든 권남우를 잡아끈 청소부(김선영)의 정체는 다름 아닌, (네이버 영화 출연진 프로필 상) '청소 요정이다. 우리의 청소 요정은 단박에 주인공을 옳은 길로 인도하지 않는다. 법원 구석구석, 판사만이 다니는 복도부터 피고인이 대기하고 있는 지하까지 종횡무진한다. 나침반이 되어 직행하기보다 막연한 지도를 손수 펼쳐 보이는 요정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결국 미로도 길이 된다.' 미로라는 지리를 젖혔을지언정 미로에서 정확한 하나의 결말로 달하는 과정은 지나치게 사실이 법원에 더욱 흥미를 돋우었던 장면에 안타까움을 싣는다.  



무언가를 대표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발품 팔아 곳곳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기에 육체적으로 고되며  구석과 구석을 기억하고 기술해야 하기에 정신적인 수고가 든다. 어떻게 모든 시도가 완벽하랴. 그러나 의도와 의도를 벗어난 재현의 방식은 어느 시기의, 어떤 영화에게나 반드시 적용해야 할 질문이어야 한다.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더 나은 영화들과 마주해야 하고 그렇기 위해 좀처럼 울타리를 낮출 수가 없는 노릇이다. 약자의 이야기를 너무 말끔한 재미로만 소비하지는 않았는가에 대한 울타리가 영화를 보는 누군가에게는 돌출한 장애물일지라도 결국 영화 <배심원들>의 배심원단의 선택처럼 나은 서사로 다가가기 위한 제동과 제어는 누군가에게 뜻밖의 구원이자 희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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