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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Jun 03. 2019

낯선 땅에 발을 딛는 즐거움

영화 <파리의 딜릴리>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풍족한 문명 위에 화려한 문물이 쌓이고 또 쌓였던 파리의 벨 에포크 시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기도 한 도시에 이방인의 얼굴을 한 소녀가 등장한다. 희지 않은 피부를 가진 여자 아이 '딜릴리'는 다채로운 시대의 색채 위를 자유로이 뛰어다닌다.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백인이자, 프랑스인들이 구가하는 문명과 문물은 그녀의 피부색과 동떨어져 보이기 쉽지만 이 낯설음은 '어울리지 않음'이라는 이름으로 한 데 묶이려 들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빠져나와 반은 프랑스 인이요, 반은 아프리카 카나키 족의 피가 흐르는 피부색을 사랑하고, 능숙한 프랑스어 실력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는 무시하기까지 하는 무례함 앞에서 기를 죽일 줄을 모르는 딜릴리는 자신을 그림처럼 박제하려 드는 액자 바깥으로 끊임없이 튀어오르려는 생동감을 가진 존재다.



딜릴리가 가장 먼저 등장한 장소는 파리 한복판에서 원주민 행세를 하고 있는 한 공터이다. 딜릴리와 비슷한 피부색을 하고 있는 원시부족의 가족들을 백인이 죽 둘러싸며 마치 동물원과도 같은 공간을 연출하는데, 이때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소년 '오렐'에게 딜릴리는 "퇴근한 뒤 밖에서 보자" 라는 말을 건넨다. 스스로를 가두는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소녀의 이야기는 변주를 거쳐 영화 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된다. 낯선 파리의 정취에 이방인으로서의 주인공의 모습을 풍경으로 가두려할 때마다 딜릴리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거나, 주변 친구들과 마음껏 교감하며 자신이 옳다 생각하는 동작을 행한다. 딜릴리의 작은 키를 반영하듯 프레임 아래에 달라붙어있다시피한 그녀의 머리는 그렇기에 꽤 자유롭다. 화면의 중앙을 기준으로 주인공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의 소음 혹은 낯선 사람들, 마천루와도 같은 으리으리함 속에서 딜릴리는 자신이 어디로 갈지 알고 있거나 궁금해하고 있는 눈빛으로 절대 불안해지지 않은 존재이다. 이 존재의 확신은 프레임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딜릴리와 오렐은 서로의 에너지를 벗삼아 파리 한복판에서 사라지고 있는 아이들의 행방을 좇아 분주하게 움직인다.

 


두 주인공의 동선은 가장 아름다우며 '좋은 시대'라 칭해지기도 했던 벨 에포크 시대의 예술가들을 따라간다. 화려한 시대의 건축물, 미술품, 패션의 양식은 그들의 여정과 추리에 단서가 되기도 한다. 그 중 딜릴리에게 가장 큰 영향력과 영감을 안겨다 준 것은 여성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이다. 가장 정교한 시대배경을 담고 있는 사진 혹은 그만큼의 기교를 가지고 있는 배경이 펼쳐지면 1초에 몇십컷으로 쪼개진 움직임의 애니메이션이 그 배경 속을 질주한다. 정교할수록 부드럽고 아이들과 여성들의 부드러움은 이 아름다운 그림책을 다음 페이지로 넘길 수 있는 힘을 실어준다. 애니메이션의 정교한 움직임만큼이나,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뽑아낸 다채로운 색깔도 동작의 흐름에 한 몫한다.



'그림 같은 세상을 두고 액자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파리의 사라진 여자 아이들의 행방을 찾다보면 이 전제의 시작이자 끝이 보인다. 낯선 이방인의 영역에 딜릴리를 가두는 틀은 아이를 '아이'로만 남게끔, 여자를 '여자'로만 남기게끔하는 사뭇 폭력적인 시선이다. 딜릴리와 친구들은 사라진 아이들이 갇힌 지하세계에서 이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꿈과 희망을 대변하는 애니메이션이 그러하듯 탈출에 성공한다. 그 순간 영화는 다시금 딜릴리를 파리의 또 다른 낯선 공간으로 데려다놓는다. 여성 예술가들이 모여 딜릴리 일행과 아이들의 탈출을 도모할 때, 집에서 기르는 반려치타의 등에 올라탄 딜릴리가 집 안에 꾸며진 인공 정원을 거닐 때. 그리고 아이들이 탈출하는 비행선에서 밤하늘에 떠있는 별과 같은 아이들과 딜릴리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을 때. 정말이지 그림이란 무엇이며 그림 속에 살아 숨쉬는 인물과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마주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소녀의 튀어오르는 역동과 자꾸만 익숙해지지 않으려는 이국의 정취로 <파리의 딜릴리>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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