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본 영화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지 Jun 09. 2019

이 탁월한 적재적소를 불편해하길

영화 <기생충>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를 봤는데 반응은 세계적이더라. 세계 영화계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한 감독이 지닌 후광. 유수 영화제의 유력한 상을 수상했다는 영광. 두 빛을 등에 업은 영화 <기생충>이 동원하는 서울의 반지하 혹은 대저택, 세대와 성별을 아우르는 빈부격차의 이미지는 한국에서만 구가할 수 있는 특유의 로컬리즘을 내포하면서 시의적절한 은유라는 명분을 동원한다. '황금종려상'이라 인정받으며 우화와 판타지의 선을 넘나드는 영화의 이미지가 한국적이기까지 하다니.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사실 우리들이 오랫동안 열망하며 훌쩍 뛰어넘어보고 싶었던 선에 도달하는 영화 <기생충>의 성과는 한국영화 100주년에 이룩한 쾌거로 기록될 것이다. 영화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한국인은 드디어 세계인이 되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세계 속의 한국에서 무척 외로워졌다. 반기를 들고 싶었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어떤 이야기이든지 간에,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쾌감 내지 불쾌감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것에 비롯한 감정인지, 영화가 그리고 있지 않은 것에 비롯한 김상인 지부터 초장에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사실 이 둘은 맞닿아있는 논지이기도 하다. 봉준호의 영화 속엔 무엇이 있나. 상하의 방향성과 상관없이 발을 디디면 그 반대쪽 발을 딛어야 하는, 즉 '오르고' '내려간다'는 행위의 층위는 영화 속 집이라는 공간을 위아래로 잡아당겨가며 확장시킨다. 세로로 길어진 공간에는 자연스럽게 여백이 생기고 영화는 빈 공간과 남아도는 자원을 먹어치우기 위해 배고픈 자들이 외부로부터 침범해온다는 전제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과외선생 혹은 벤츠 기사이자 가정부로, 박사장(이선균)과 그의 부인 연교(조여정)에게 필요한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기택 부부(송강호, 장혜진)와 그의 자식들(최우식, 박소담)이 대저택에서 저마다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무렵 의외의 공간에서 의외의 인물이 등장하며 줄거리의 판도를 뒤집어놓는다. 박사장 부부가 이사 오기 전부터 집안을 지켜왔지만 기택네 가족의 모략에 넘어가 일을 그만두어야 했던 문광(이정은)의 남편 근세(박명훈)의 존재, 그가 집안에 숨겨진 지하실에서 목숨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설정이 그것이다.



생존 가능한 기준치 이상의 여유, 취식 이상의 취미이자 취향이 될 수 있는 동익의 대저택은 기택네 가족이 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소망의 영역이며 판타지에 가까운 공간이다. 이에 반해 기택네 가족은 한국의 특수한 가옥 구조인 '반지하'를 활용하며 그 안에 들어찬 식기구와 가구, 살림살이의 배치와 생김새를 통해 가난의 리얼리즘으로 형상화된다. 그렇다면 <기생충>은 문광이 알고 있고 근세가 살고 있던 대저택의 지하실에 대해 어떤 논거를 이어 붙이고 있는가. 동익의 가족이 아들의 생일을 맞아 캠핑을 떠나고, 기택네 가족이 빈 집에서 파티를 열던 어느 비 오는 밤을 돌이켜보라. 문광이 대저택의 문을 두드리며 이야기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명확하게 가르는 그 순간, 영화가 그리고 있는 공간들의 성질도 함께 쪼개어진다. 영화의 후반부가 미스터리와 서스펜스의 스타일로 밀어붙였던 근세의 지하실을 논하기 전에 매실주가 가득한 찬장으로 내려가는 지하계단, 양 옆으로 와인들이 정갈한 지하실 입구를 다시 생각해보자. 영화의 전반부에 잠시 반짝였던, 그러나 결론을 향해 달려가며 너무 쉽게 포장하고 너무 쉽게 단정 지었던 경계의 이미지에서부터 이야기를 출발시키자는 이야기다.



기우(최우식)의 여동생 기정(박소담)이 '제시카'라는 예명으로 박사장 아들의 미술교육을 도맡은 첫날. 수업에 참관하지 못해 걱정이 가득한 얼굴의 연교는 문광에게 매실주스를 아들의 방에 가져다 놓으라 귀띔한다. 주스잔을 들고 부엌으로 올라가려는 찰나, 이 순진한 부자와 노련한 가정부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일순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ADHD가 의심될 만큼 산만했던 아들을 제시카가 얌전한 모습으로 길들여 무려 1층 식탁에 '앉혀놨기 때문'이다. 기택네 가족의 침입이 동익네 집안에서의 균열이 되는 순간, 질서를 흔들고자 하는 전조의 희열이 첫 축포를 터트리는 순간이다. 자신이 딛었던 땅에서 내려올 줄 모르던 계층이 무언가를 올려다보는 최초의 경험은 그것이 표피적인 우화의 한 장면일지라도 영화를, 적어도 영화의 전반부를 신나게 잡아끄는 희열의 시작이기도 하다. 중산층과 가난 사이, 서로가 닿을 수 없는 간극이자 서로를 밀어내는 약력의 작용은 영화가 말하지 않고 보여주지 않은 또 다른 계층, 그러니까 영화 바깥의 또 다른 세상에 대한 비가시적인 은유이자 상상력의 확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집 안에 두고 간 것이 있어 잠시 들어가기를 청하는 문광이 무거운 찬장을 직접 옮겨 지하실의 문을 여는 순간 봉준호는 집안의 그림자, 영화 속 경계, 계층과 계층으로 말하면서도 말하지 안 했던 공백을 스스로 닫아버린다.



문광이 입을 열수록 근세가 살고 있던 지하실의 속속들이 드러난다. 너무 오래 지하실에 머무른 탓인지, 아니면 지하실보다 못한 가난에 발이 묶였던 탓인지 근세는 상식선에 종종 벗어나는 기이한 행위를 한다. 박사장의 기사와 사진을 걸어두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거나 지상에 살고 있는 가족의 동선을 따라 불을 켜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기이한 근세의 이미지를 더욱 기이하게 바라보게끔 하는 건 봉준호가 들이미는 카메라, 그가 포착한 어느 한 장면이다. 연교와 문광이 '제시카'가 만들어낸 1층의 광경을 보고 우뚝 멈춰 섰던 바로 그 계단에서 근세는 밤새 케이크를 퍼먹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흰자위를 번뜩인다. 연교가 반가움에 1층으로 뛰어올라와 따뜻한 조명이 가득한 부엌에서 활짝 웃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귀신과도 같은 침입자를 본 아이는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영화 전반부를 풍성하게 했던 상상력의 추동은 바로 이 순간 멈춘다. 근세가, 근세를 지하실에 숨겨두어야만 했던 문광의 사연이, 생존을 위한 빈 공간을 찾아내어 먹고살기만 했던 이들의 고군분투, 그 고군분투로 하여금 서로 연대할 여유조차 없게 만드는 '가난'의 굴레가 위협적인 귀신의 탈을 쓰는 그 순간 말이다.



우스꽝스럽게도, '가난보다 더 가난한' 이미지가 너무 명백한 공포로 치닫는 순간 근세와 기택 가족의 위협적인 추동력은 힘을 잃는다. 근세가 존재를 드러낸 뒤, 관객들이 지하실의 이미지를 목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반부에서 엎치락뒤치락했던 박사장 가족과 기택 가족 행동의 패턴은 달라진다. 캠핑장에서 중도에 돌아왔던 그날 밤 이후 좌석에 발을 올리고 코를 틀어막는 연교의 행동은 이상할 정도로 과시적이며 구성원이기만 했던 기택네 가족 전원을 필요 이상으로 불러들이는 동익의 행동은 도를 넘는다. '반지하 냄새'를 은유로 한 가난한 이들의 열등감이 동익이 그은 선을 의도치 않게 넘었다면 부를 누리는 이들의 기만은 갑작스레 비대해진다. 계층을 이미지로서 동원하는 영화의 방법론이 스스로가 세워놓은 규칙을 뭉게 버리며 영화적 상상력은 오히려 퇴행하는데, 이 두 가족의 '생일 번개'는 직후 이어지는 근세의 칼부림에 대한 전조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근세의 칼부림이 공포스러운가. 기정을 찌르고, 죽어가는 기정 앞에서 기택이 우진 또한 죽이기 때문에? 공포란 주체 불가능한 그 무엇이 눈앞에 있는 순간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자신을 해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대저택의 잔디밭에 귀신으로 서있을 수밖에 없는 근세와 이미 문광을 해친 인과응보로 그와 공존할 수 없는 기택네의 희생은 상상력을 멈춘 우화 속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통제가 가능한 플롯이다. 오히려 영화는 슬로모션과 음소거의 현장을 동원하여 살인의 현장을 잘 짜인 볼거리로 내놓기에 이른다. 가난한 이들이 대저택의 앞마당에서 벌이는 아수라장은 상류층의 판타지를 판타지로 남겨두고 반지하의 도상들을 리얼리즘을 위한 리얼리즘으로 도식화시킨다. 찬장 입구를 드리우는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가난한 이들이 위를 향해 품고 있던 가시의 끝이 무디어진다. 근세와 기택 가족의 고군분투가 우스꽝스러워질수록 '누굴 위한 난리이며 어느 균열을 위한 난동인가'라는 질문의 대상은 희미해진다.



영화가 시작하며 끝날 때까지 영화관 바깥의 세상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영화 또한 그 무엇도 바꾸지 않겠다는 무기력의 선언은 가난한 이들을 더욱 가난한 의식 속에 가둔다.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며 가난의 이미지를 점철하고 위로부터의 환상을 공고히 했다는 죄명이 아니라 봉준호가 구가하는 장르의 적재적소가 우리의 상상력을 거기까지만 멈추게 했기 때문에 윤리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명백함을 그리면서 공백을 그리려 하지 않는 봉준호의 서사를 두고 집안의 수직적 도식과 계층의 구조만을 찬반 하는 논쟁에 그 어떠한 효력이 있느냐는 질문을 건네고 싶었다. 지하실에 물난리가 나서 빗물이 가슴께로 얼마큼 차오르든, 기택이 얼마큼 내려가 있으며 기우가 얼마큼 올라가고 싶어 하든지 간에 영화 속 고무와 독려는 말을 멈춘 지 오래이다. 이 박제된 상상력은 금방이고 허물어질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낯선 땅에 발을 딛는 즐거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